속죄제에 담겨져 있는 심오한 의미성소4
두 가지 경우의 속죄제 속죄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실물교훈이다. 다시 말하자면, 속죄제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된 제사제도이다. 구약 시대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그 죄인은 양을 끌고 성소로 가야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죄를 지은 인간은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가 범한 죄를 가지고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 양되신 예수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나아가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면, 그 죄인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전가되어서 죄인이 그 지은 죄로부터 용서받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속죄제가 상징하는 바이다.
성소 뜰에서 행해지는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무한한 댓가를 치루셔야 했는지를 인간의 우둔한 마음 속에 깊이 심어주고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마련하신 상징적 제도이다. 특별히 속죄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더욱 깊이 담겨 있다.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는 조금 다르게 디자인 되었다. 속죄제를 드릴 때는 동물의 전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기름만 도려내어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희생 제물의 기름은 죄 또는 죄인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시편 37:20참조). 그런데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다른 제사들과 현저하게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 회중이 함께 범죄했을 경우에 제사하는 방법과, 어떤 개인이 범죄 했을 경우의 제사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희생 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뚜렸하게 나타났다.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나 온 회중이 함께 범죄 했을 때는 속죄제의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일곱번 뿌렸다. 이러한 속죄제의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죄인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면 상징적으로 그의 죄가 흠없는 희생제물에게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희생 제물이 흘린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뿌리는 것은 그 희생 제물의 피에 전가된 죄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던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자신의 피에 전가된 인류의 죄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하시는 중요한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색다른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셨는데 그 특이한 속죄제의 절차가 우리로 하여금 갈보리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속죄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에 앞서, 한가지 간단한 사실을 짚고 지나가 보도록 하자! 믿음은 선물이다. 왜 그럴까? 어린아기가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손길을 매일 경험하고 나면 자연히 어머니를 신뢰하고 믿게 된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자연히 생겨난 반응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돌봄의 결과로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과 희생을 보여 주셨기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속죄제는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이해케 하기 위하여 디자인 하신 제사이다. 속죄제는 우둔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속죄의 희생과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디자인하신 제도였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개인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속죄제물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이한 면이 우리에게 한가지 큰 깨달음을 주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으면 제사장이 죄인이 고백한 그 죄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제사장은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성소 안에서 중보하는 기도를 할 때에만 죄의 용서가 있다고 레위기서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레 4:20,26,31,35).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어도, 당신의 피를 가지고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신 속죄하는 중보의 역활을 하늘에서 해 주셔야 우리에게 죄의 용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 사실은 히브리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히 8장~10장 참조).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아무리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흘려 주셨어도, 죄인은 회개와 고백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하며, 또한 예수께서 그 죄인의 회개의 기도를 용납하시고 그를 위하여 대신 흘려 주신 보혈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며,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중보의 기도를 대신 드려 주심으로써, 그 죄인을 인정해 주셔야만 용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 뜰에 들어와 제사를 드린 사람은,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사장은 그 속죄제의 피를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만 바르고 그 주위에 피를 뿌린 후 나머지를 땅에 쏟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속죄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제사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피를 그냥 성소 뜰에 쏟아 버리다니요! 소 안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린 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놀란 죄인에게 제사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제여! 속죄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교육시키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 속죄제에는, 장래에 올 메시야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귀중한 실물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형제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 저의 죄가 속죄 양에게 전가 되었지요!” “그렇소!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잘 지켜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사장이 그 속죄제물 짐승의 살점을 조금 칼로 도려내어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하였을 것이다. “형제여! 이제 당신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죄인은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네! 제사장님! 저의 죄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전가되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내가 지은 죄가 바로 당신의 죄가 되어 버렸군요!” 그때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죄, 아니 내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그 죄를 가지고 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 아니 내 죄를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죄인은 눈물이 함박고인 눈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 가는 제사장의 뒷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쳐 주는 얼마나 힘있는 실물교훈인가! (레위기 6:25-30참조).
속죄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베드로 전서 2:24은 우리에게 힌트를 제공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지실 수가 있었는가?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 몸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였는데, 길을 가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 때에 우리의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식은 땀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 오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가슴을 메워 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죄를 지시는 경험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들의 죄가 마치 당신께서 지으신 죄들처럼 그 분 위에 엄습하여 왔다. 한번도 죄를 지어 보지 않으신 분께서 죄책감을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들이 갑자기 예수께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은 그 때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 고뇌는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당신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2장 전체와, 4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당하신 심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준 장들이다. 시편 40: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깊은 고뇌를 예언하면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도대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을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대신 지셨던 우리들의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은 “Therefore my heart failed me” 이다. 다시 말해서“나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지시는 영혼의 고뇌 때문에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가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의 장면을 찾아보면, 큰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구시며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로마 군병이 예수께서 죽으셨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의학적인 증명이다. 죄로 인한 깊은 고뇌 때문에 심장이 터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심장이 피를 생성하는 일을 멈추자 혈청과 혈구가 분리되어서 창에 찔린 상처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는 과정에서 우리 죄의 악함과 두려움을 짊어 지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어 버리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없이 자신이 범한 죄의 댓가를 있는 그대로 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죄를 대신 지셨” 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지 않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갑자기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들이 당했어야 할 그 형벌과 심판을 대신 지신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느끼게 되셨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님의 눈 앞에는 이제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마치 대신 지신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되어 완전히 멸망당할 것처럼 느끼게 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게 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만 하였다. 마귀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고 멸망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분의 귀에 속삭임으로써,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전에 들었던 하늘 아버지의 모든 약속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끼졌다. 또한 당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메달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도 당신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영원히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나타내시었다. 당신 자신이 영원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줌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사랑을 실현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부모의 사랑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예수의 죽음의 선택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믿을 때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께서 그 댓가를 이미 십자가에서 치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였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인류를 그냥 죽게 내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온 우주의 천사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사랑의 장면을 지켜 보면서 감탄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답하여야 하겠는가?
독자들이시여!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상하라. 십자가에서 치루어진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와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인류를 위한 값없는 용서와 구원이 마련되기 위해서 치루어진 댓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이다. 십자가는 쑈(show)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정도로 보여 주신 엄청난 사랑의 현시이다. 우리가 2000년전에 갈보리 산 위에 서있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지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죄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순교자의 죽음도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속죄제는 바로 이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별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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