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노인이 던지는 묵직한 직구 - 영화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은퇴 앞둔 스카우터와 야구를 포기한 젊은이
서로의 인생을 반전시킬 변화구 같은 만남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제목에 내용이 대략 암시된 작품이다. 영화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한 남자의 어떤 삶을 보여준다. 나이가 들다보니 아침엔 전립선 비대증으로 화장실에서 소변보는 것부터 전쟁이다. 야구 선수 스카우트가 일인데 눈까지 말썽이다. 눈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사물의 중심이 구분되지 않는다. 아침식사랍시고 가공햄 통조림이나 떠먹는 할아버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왕년의 카우보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감독으로 변신해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야기에 담긴 깊이를 말한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그렇다. 노인 프랭키의 소중한 제자, 매기. 프랭키는 매기가 복싱을 배우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복싱은 재밌고 훌륭한 스포츠지만,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랭키가 우려한 대로 사고가 일어나고 매기는 전신마비가 되어 병석에 눕는다. 노인의 우려는 잔소리에 그치면 좋으련만 종종 현실이 되고 만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의 표면적 주인공은 거스이다. 은퇴할 시기가 된 그에게 베테랑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과 몸의 고장이 동시에 찾아온다. 당당히 은퇴하라는 말은 평생을 야구에 바쳐 온 그에게 잔인해 보인다. 그의 인생에 야구 선수 스카우트 빼곤 남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거스의 딸 미키는 성공한 변호사다.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는 이제 회사의 파트너 자리라는 야망의 한 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책임져야 할 사람인 아버지가 걱정이다. 남남인 듯 따로 살아왔지만, 막상 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플래니건’은 젊은 시절 불꽃같은 강속구를 던진 파이어볼러였지만 부상으로 너무 빨리 선수 생활을 접게 된 인물이다.
영화에선 미키와 플래니건이 거스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영화의 중반부에선 거스가 빠지고 이 젊은이들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느낌이다.
영화는 결국 ‘새 출발’에 대해서 말한다. 노인에게 은퇴가 새 출발이듯,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미키와 플래니건에게도 새 출발이 필요하다.
야구를 좋아했지만 야구계를 떠나 사는 게 낫다는 아버지의 강요에 변호사가 된 미키,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고 잘했지만 부상 때문에 그만두게 된 플래니건은 각자 다른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오해와 애증을 간직해온 딸과 아버지가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상처와 미안함에 대해 말한다. 계약서 쓰듯 연애하던 오랜 애인과 헤어진 미키는 플래니건과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영화는 세속적 성공이 아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공의 가치에 대해서 말해 준다.
줄거리만 보면 조금은 뻔한 가족 드라마처럼 여겨지지만 세 사람의 연기가 이야기에 윤기를 더해준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묘소에서 부르는 ‘당신의 나의 햇살(You’re my sunshine)’은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그 노래의 가사를 다시금 새겨듣게 한다.
“당신은 나의 햇살, 유일한 햇살, 우울하고 흐린 날에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사적인 고백을 할 줄 모르는 고집쟁이 할아버지가 가사에 빗대 이야기하는 사랑 노래.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맥주 한 잔 두고 부르는 노래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아마 조금 더 오래 살고, 나이가 많다는 것은 노래가사 너머의 깊은 의미까지 속속들이 이해한다는 뜻일 지도 모른다.
가늘어진 팔과 얼굴을 뒤덮은 검버섯이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기에 더 존경스러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명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작품임에 분명하다.
강유정 영화칼럼니스트가 한국교직원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댓글 곰발바닥 님 본인의 글이 아니라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평 방이 있는데 못봤군요. 덕분에 지자리를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