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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묵상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 두 개의 밧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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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두 개의 밧줄
주님 말씀 가운데 그 뜻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것이 바로 목숨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바로 그 말씀이 나옵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 33)
그리고 복음의 다른 곳에선 주님 때문에, 또는 주님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오늘 복음에선
주님 때문에나 복음 때문에가 빠져서 더 헷갈립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니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거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을 내가 지키는 것은, 힘도 없는 내가 내 목숨 지키려다 뺏기지만,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힘세신 주님께 맡기기에
뺏기지 않고 보존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께 바치면
사랑으로 주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특히 주님께서 오시는 날 곧 종말의 날 얘기이니
종말의 때에 현세의 목숨을 붙들고 아등바등 애쓰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붙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니 잃게 되겠지요.
이는 마치 밧줄이 두 개인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는 썩은 밧줄이고 다른 하나는 튼튼한 밧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밧줄은 썩은 밧줄이고,
튼튼한 밧줄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밧줄을 놔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폐암 말기의 저를 상상합니다.
지금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사고 생명의 주님께 청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제가 곧 끊어질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연명하려고 애쓰느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줄을 붙잡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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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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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이 있는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 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지금은 참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은 없습니다.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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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제게 길을 보여 주신 적이 많습니다. 몸이 조금 피곤하고, 지쳤을 때입니다. 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을 취소하기 어려웠습니다. 신부님들과 전임 사목위원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 날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신문사의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 홍보는 신문사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데 전혀 홍보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신문의 광고도 도움이 되지만 예년에 비해서 광고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제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라면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습니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인 성당이 생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가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합니다. 주말에 가면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주말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교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중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고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본당 미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정은 본당 신부님의 몫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 그 뒤로 본당의 봉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한인 공동체에 한국학교가 생겼고, 아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이 결실을 맺어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고등학교 교과에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부님과 의견이 달라서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이민사회에서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 제게는 깊은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二心異體)’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 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삶의 기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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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정신과 의사 ‘에릭 번’은 인간에게 3가지 인생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각본은 평범한 각본입니다. 나답기보다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하게 하는데….’, ‘내가 뭐 특별하다고….’ 등의 말을 합니다.
두 번째 각본은 패배자 각본입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고,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나는 나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각본에 따라 사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승리자 각본을 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평범한 각본, 패배자 각본에 더 가깝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절대로 평범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 각자를 보면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분명히 다릅니다.
패배자 각본 역시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아오스딩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시간입니다. 후회하며 뒤를 바라봐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닥치는 날이고, 모든 가치 판단이 뒤바뀌는 날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은 그 소명만을 향하여 가야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의 길을 따라가다가 남기고 온 재산이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다보고 죽었다는 기사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구원의 피난 길을 떠났으면 그저 그 길만을 향하여 가야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자 각본에 맞춰서는 사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이 세상의 법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 나라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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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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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심판
-심판의 잣대는 사랑-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와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 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어 검증되는 사랑입니다. 요한 1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어제의 사랑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착한 자매님이 제 졸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이 좋다하여 품절된 책을 복사 제본하여 그 무거운 책들을 가져왔습니다. 우선 ‘평화의 집’ 피정집 10개의 방에 넣으려 합니다. 오래 지나다 보니 비치했던 책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또한 동사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평범한 사실을 새벽 강론을 쓰면서 새롭게 깨닫습니다. 새삼 진리는 세월에 색깔 바래지 않고 늘 새롭게 빛남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진리입니다. 참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최후심판의 잣대 역시 사랑입니다. 성 마르티노의 전생애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심판의 잣대이자 성덕의 잣대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인데,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기념일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성인이 수도승 출신 주교인데다 베네딕도 수도회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성 마르티노 주교에 관한 일화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마르티노는 항가리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후에 군복무중 프랑스에서 퇴역하여 은수생활을 시작하여 마침내 투르의 주교 수도승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 한나라와 같은 로마제국 유럽 전체가 성인의 활동 주무대였음을 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술피기우스 세베루스가 전하는 성인의 임종어 역시 감동적입니다. 불화한 성직자들의 화해를 이루고 수도원에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이들을 보며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당신이 계속 함께 해 달라는 성직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악마들을 향하여는,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놈아, 네가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마지막 임종어를 남기고 성 마르티노는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 성 마르티노였고,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성인을 성소에로 이끈 다음 전설적 일화는 너무 유명합니다. 늘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느낌입니다.
-성 마르티노는 자신이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서 주둔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만납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기에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갈라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 그 반쪽을 걸인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게 준 망토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이 신비체험후 마르티노는 18세에 세례를 받았고 얼마간 군대생활후 제대합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행위의 사랑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이런 일화 때문에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가 복음으로 채택된 것 같습니다. 오늘 최후심판은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이뤄집니다. 기도를 많이 했느냐, 수행생활을 많이 했느냐, 신학지식이 많으냐가 아닌 구체적 사랑을 실천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최후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최후심판에 통과한 의인들에 대한 주님의 언급입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고,
4.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5.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6.너희는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전부 6개 항목의 실천적 동사의 사랑입니다. 과연 몇개 항목에 걸쳐 실천된 사랑인지 우리의 사랑을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바로 성 마르티노가 걸인에게 실천한 사랑은 4째 항목에, 베네딕도 성인이 당신 수도자들에게 강조하는 환대의 사랑은 3째 항목에 관련됨을 봅니다. 이어지는 의인들의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냐?”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충격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며 길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국적이나 인종, 종교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 모두를 당신 형제들이라 하며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 바로 당신께 한 사랑이라며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참 놀랍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가 누구든 곤경이나 궁핍중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자들 모두가 당신의 형제이고 당신의 현존이며 구원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도, 멀리 밖에서도 아닌 바로 가까이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고 외로운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며 주님의 현존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는 무지에 눈이 가려 곤경중에 있는 주님을 모르고 지나친 일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종이자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5.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6.슬퍼하는 이들에게 재대신 화관을,
7.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8.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참으로 이런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자유인의 삶에 받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만나 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온갖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며 자유롭게 하시어 당신 사랑의 도구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사제서품식 미사 때 화답송 후렴과 같으며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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