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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그놈 목소리> 91년 영화 <그놈 목소리>의 실제 사건인 이형호 군 유괴사건이 미제로 남아 있던 와중에 그와 비슷한 유괴 살인 사건이 발생해 국민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1991년 11월 11일 오전 7시경. 간밤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탓에 날씨는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 경기도 수원시 평동 중보교 아래 서호천변에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30여 명의 수사관들은 다리 밑 개천 물속을 헤집으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지난달 유괴살해된 한 어린이의 사체인양 작업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사관들에 의해 물속에서 가로 60cm, 세로 100cm 크기의 대형 청색 여행용 가방이 끌려 올라왔다. 가방을 열자 안에서는 쪼그린 자세로 엎드려 있는 남자아이의 사체가 모습을 보였다. 아이의 온몸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으며 가방 안에도 피가 흥건히 괴어 있는 처참한 상태였다.
설마 그 어린 것을…’이라는 심정으로 숨죽이며 사체인양 작업을 지켜보던 주민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분노에 찬 욕설이 터져 나왔고 아이의 신원을 확인한 부모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얘기는 약 18년 전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일명 ‘이종규 군(가명•8) 유괴살해사건’이다.
사건은 그해 10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이 군은 집 근처인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의 정자시장 뒤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군은 이날 오후 6시 30분께 홀연히 사라졌다. 저녁이 되도 아이가 귀가하지 않자 걱정스런 마음에 가족들은 이 군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 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군의 부모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가족들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몇 시간 후 이 군의 집에 낯선 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처음 전화가 걸려온 시각은 이날 밤 9시 10분경이었다. 그리고 새벽 2시 10분경 두 번째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범인은 종규 엄마에게 ‘종규를 데리고 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만원권으로 1500만 원을 준비해서 계좌에 넣으면 2시간 안에 아이를 돌려보내 주겠다. 계좌번호는 내일 오후 2시에 알려주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경찰에 알리면 아이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는 단서도 붙었다.
하지만 이 군의 가족은 아이가 실종된 직후 유괴됐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미 경찰에 신고를 해 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군의 집으로 걸려온 범인의 협박전화는 수사팀에 의해 녹취가 되었다.
호남과 충남 서해안 지방의 억양과 낮은 톤의 목소리. 녹취된 협박전화의 성문분석을 진행한 수사팀은 말투 등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포착, 수원 인근에 거주하는 동일수법 전과자와 대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목격자를 찾아 나섰다. 수사팀은 사건발생 무렵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다행히 이 군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사건 당일 이 군과 같은 장소에서 놀고 있었던 A 군(7)이었다. A 군은 “은색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온 30대 초반 남자가 이 군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문방구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더니 ‘문방구에 같이 가주면 장난감 총을 사주겠다’고 꾀었다. 그리고는 이 군을 승용차 옆자리에 태우고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고 진술했다.
A 군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범인은 ‘얼굴이 희고 둥글며 광대뼈가 나왔으며 몸이 통통한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수사팀은 범인이 타고 왔다는 은색 프라이드 승용차에 대한 검문검색을 실시하는 동시에 이 군의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탐문수사를 했다. 이 군이 선뜻 차량에 올라탄 것을 보면 면식범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또 이 군의 실제 가정형편이 부유하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 군의 부모 등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유괴를 가장해 저지른 범행일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범인이 이 군을 태우고 사라졌다는 3도어 은색 프라이드 승용차에 주목했다. 수사팀은 87년부터 사건발생 직전까지 출고된 동종차량 소유주 가운데 30세 전후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사건 당일 알리바이 및 전화발신지 추적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건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사건발생 직후 걸려온 협박전화에 대한 발신지 추적도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수원 전화국에서 발신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당시 전화국에서는 전쟁 발발시 군사목적 또는 통신두절에 대해 전화회선의 일부를 전자식으로 교체하지 않고 기계식으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범인이 협박전화를 건 공중전화가 있던 장소가 공교롭게도 그 지역에 해당됐던 것이었다. 따라서 발신지 추적을 통해 범인의 위치를 파악하려던 수사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범인으로부터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범인은 유괴 당일 새벽 전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다음날 계좌번호를 알려주겠다던 범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후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가족들은 종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피말리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범인이 더 이상 협박전화를 해오지 않으면서 수사팀의 발도 묶였다. 범인의 전화가 없다는 것은 분명 불길한 조짐이었다. 수사팀 내에서 아이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군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인근 야산과 저수지 등을 수색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결국 수사팀은 11월 6일 공개수사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사건발생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수사팀은 범인의 몽타주를 배포하고 방송을 통해 범인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수사팀은 ‘범인과 진짜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는 제법 그럴듯한 제보들만 종합, 수원에 사는 자동차정비공 B 씨(27) 등 3명의 신병을 확보했다. 수사팀은 이들의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목소리를 녹취해 국과수에 성문감식을 의뢰했다. 하지만 국과수 성문분석도 경찰의 알리바이 조사에서도 특별한 혐의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제보자가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은 문재호(가명•23)였다. 제보자는 ‘범인의 목소리 끝 부분이 흐려지는 특성이 내가 알고 있는 문 씨와 동일하다’며 신고했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문재호는 경찰 수사망에 이미 올라있던 인물이었다. 애초에 수사팀은 문재호의 나이가 어린 데다가 전과가 없는 청년이라 크게 의심하지 않았으나 사건 직후 운영하던 가게 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것을 수상히 여겨 그의 주변을 수사해오고 있었다. 수사팀은 문재호의 행적을 알 만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문재호에게 당시 연상의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내사결과 문 씨의 행적에는 분명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수사팀은 문 씨의 애인을 설득, 무선호출기로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날 밤 10시 30분께 애인을 만나러 약속장소인 장안구 영화동의 다방에 나타난 문 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서로 연행된 문 씨는 범행사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며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소지품에서 이 군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되자 고개를 떨궜다. 사건 발생 13일 만이었다.
끔찍한 유괴범은 전과가 없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살아있지 않았다. 그는 “유괴한 지 9시간 만에 살해했다”고 털어놨다.
조사결과 드러난 범행의 전모는 이렇다. 사건 당일 문 씨는 공터에서 놀고 있던 이 군에게 접근, ‘장난감 총을 사주겠다’고 꾀어 자신의 은색 프라이드 승용차에 태워 유괴했다. 시내 완구점에서 이 군에게 5500원짜리 장난감 총을 사주고 이 군의 환심을 산 문 씨는 이 군으로부터 알아낸 전화번호로 두 차례 협박전화를 걸었다.
이 군을 태운 채 유괴현장에서 11km 떨어진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1번 국도를 주행하던 문 씨는 잠에서 깬 이 군이 “집에 데려다 달라”며 울며 보채자 새벽 3시께 목을 졸라 이 군을 살해했다. 그리고 새벽 3시 20분께 미리 준비해둔 커다란 가방에 10kg 정도 되는 큰 돌과 함께 이 군의 사체를 넣고 서호천 중보교 아래로 던지고 달아났다. 범행 후 수원시 인계동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문 씨는 다음 날 대전으로 내려가 3일간 머무는 등 대전과 오산 등을 오가며 도피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결과 문 씨는 이 군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당연히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그렇다면 문 씨는 왜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문 씨의 범행동기는 돈 때문이었다. 문 씨는 “노름빚 700만 원과 사업에서 손해본 800만 원 등을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문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위도식하다 지난 4월 집에서 1000만 원을 조달받아 수원에서 카폰과 무선호출기 판매가게를 차려 운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장사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월 17만 원의 월세를 내기도 어려워지자 결국 문 씨는 한탕할 요량으로 동네 선배들과 어울려 포커 등 노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었다. 지난 10월 한 달간 네 차례 포커를 하면서 무려 700만 원을 탕진한 문 씨는 결국 극심한 자금난에 처하고 말았다. 문 씨는 경찰에서 “특별히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은 아니지만 매일 들어오는 물건 판매대금을 야금야금 써버리면서 적자가 누적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업부진으로 이미 아버지로부터 400만 원을 지원받았던 문 씨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수 없게 되자 당장 필요한 사업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11월 13일 오후 2시부터 수원지검 김홍일 검사의 지휘 아래 세 시간여에 걸친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어린 생명을 굳이 죽여야 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문 씨는 “저도 모르게 겁에 질려서 그만…”이라며 울먹였다. 문 씨는 “죽고싶다. 자살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 종규 군 부모님을 비롯, 모든 분들께 사죄한다”고 말하며 참회했다.
미성년자 약취유인 및 살인•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문 씨는 이례적으로 기소 22일 만에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노름빚과 사업자금을 마련키 위해 어린이를 유괴살해하는 잔혹한 행위에서 한가닥 인간성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 군의 영혼과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이 같은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극형을 선고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은 문 씨는 1994년 10월 스물여섯 살의 한창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