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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류장화(路柳墻花)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란 뜻으로,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에서 기생을 말한다.
路 : 길 노(足/6)
柳 : 버들 류(木/5)
墻 : 담 장(土/13)
花 : 꽃 화(艹/4)
길거리의 버들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뭇 남정네 손에 꺾이기 쉬운 연약한 꽃이고 시들면 버려지는 서글픈 꽃이 기녀였다.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 듣는 꽃이란 뜻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연꽃을 구경하다 양귀비를 가리키며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연꽃이 어찌 나의 해어화(解語花)만 하겠느냐”고 해서 생긴 말이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도 해어화란 기생이 등장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기녀(妓女)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는것은 추운 겨울에도 홀로 참고 견디어 눈밭에 향기을 날리는 매화(梅花) 내한매(耐寒梅), 또 달나라 선녀(仙女) 계궁선(桂宮仙), 양귀비 뺨치게 예쁘다는 승양비(勝楊妃) 등이다.
이들 기생의 주된 임무는 노래와 춤으로 잔치의 흥을 돋우는 것이나 때로는 성(性)을 제공하는 것도 책무였다. 특히 지방 관기(官妓)들은 밤이 되면 사신이나 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방기(房妓)노릇을 하였으나 이들을 일명 수청기생(守廳妓生)이라 했다.
이들 기생들은 주로 고관들의 잔치에 불려가 전두(纏頭)나 연폐(宴幣)라고 하는 팀을 받아 생활했고 옷 벗기는 값이라는 뜻의 해웃값(解衣債)을 받아 살아갔다. 조선시대에도 팀 문화가 있었고 관기들의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세상 풍속이 예전같지 않게 야박해져서 치사한 양반들이 창기(娼妓)를 불러들여 밤새워 놀고 연패를 주지 않아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창기들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기녀(妓女)들은 양반들의 첩이 되어 일시적으로 호사를 누렸지만 남자의 애정이 시들해지면 이 양반 저 양반 품을 떠돌아 살았다. 그 예로 숙종(肅宗)때 천연두 치료로 명성을 날린 유상의 어머니도 본래 평양의 관기였다. 그 여인에게 유상을 포함해서 세명의 아들이 있지만 성(姓)이 모두 달랐다. 그래서 숙종이 놀리느라 “너희 형제는 어째서 성이 모두 다르냐?”고 물었더니 “신의 어머니가 어려서 재주가 많아 그렇습니다”라고 답해 숙종이 웃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관기들은 또 착한 남편을 만났어도 남편이 죽고 나면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 남의 남자를 찾아 떠도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특히 젊어 양귀비 같은 몸매도 나이가 들면 몸매가 망가지고 미색이 바래고 나면 물 긷는 수급비(水汲婢)로 하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생에게 나이가 들면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달콤한 말 재간 만 남는다고 했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新羅) 24대 진흥왕(眞興王)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丁若鏞)과 이익(李瀷)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百濟)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또는 기녀(妓女),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로 통용된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나 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기생의 기(妓)를 妓(기생 기) 외에 伎(재주 기)로도 표기했다. 妓(기생 기)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伎(재주 기)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 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 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妓生廳)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歌舞)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技藝)는 물론 행의(行儀), 시(詩),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 무대인 요리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기생 죽은 넋이라는 말이 있다. 기생의 우아하고 당당한 자태를 나타낸 말로, 기생은 죽어도 볼품이 있다는 뜻이다. 반면 ‘기생의 자릿저고리’라는 말도 있다. 자릿저고리란 잠옷을 뜻하는데, 기생의 잠옷은 머릿기름과 화장분으로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외모가 단정치 못하고 말씨가 간사한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
이처럼 기생은 화려하게 혹은 초라하게 세상을 누비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남들이 이들의 희노애락을 ‘기생 죽은 넋’이니 ‘기생의 자릿저고리’니 딱 잘라 극단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기생의 삶을 가장 잘 증언할 수 있는 자는 역시 기생 자신일 것이니. 기생들 사연을 들어 보면,그들이 돈을 밝히는건 당연해 보인다.
함경도 기생 군산월은 서울에서 유배 온 선비 김진형에게 살뜰한 순정을 바쳤건만, 사내는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별주를 권하며 군산월을 내친다. “눈물이 흘러 내려 반잔 술이 한잔 되고 한잔 술이 넘쳤구나”란 군산월의 시 한 구절은 배신 당한 기생의 아픔을 잘 보여준다. 운좋게 양반의 첩이 된다 해도 앞날은 순탄치 않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소원성취문중 별실자탄가에는 기생첩의 고통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음전하고 진중하면 대가 세다 논란이요/ 조용 않고 떠들면은 거만하다 수군수군/ 똑똑하고 어여쁘면 여우라 별명이요/ 맵시 있고 간드러지면 방정맞다 쓴 말이요/ 잘한다는 말이 없고 칭찬 들을 일이 없네."
그러나 늙은 기생은 첩보다 더 비참한 처지다. 한 늙은 기생이 한탄했다. "늘 봄날로 알았더니 이십 삼십 잠깐이라/ 날짐승 길 버러지도 다 쌍쌍 있건마는/ 이런 팔자 어이하여 만사 막혀 버렸는고" 뭇 사내를 치마폭에 감쌌던 명기라해도 노류장화 처지는 벗어날 수 없었다. 화사한 겉모습보다 가슴앓이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노류장화(路柳墻花)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창녀나 기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노류장화(路柳墻花)란 말은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을 때 근거가 되었던 명(明)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 중 애경전(愛卿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꿩과 들오리는(山鷄野鶩), 집에서 길들이지 못하고(家莫能馴), 길가 버들과 담장의 꽃은(路柳墻花), 누구나 꺾어댄다네(人皆可折)"
기생 출신인 애경(愛卿)이 "새 손님 받고 옛 손님 보내며, 이 집에서 밥 먹고 잠은 저 집에서 자는 오랜 습관에 젖어 있었지요. 오늘은 장(長)씨의 부인이 되고, 내일은 이(李)씨의 아내가 됩니다(迎新送舊, 東家食而西家宿, 久習遺風, 長郞婦而李郞妻)"라고 한탄하면서 한 말이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시(詩)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노류장화(路柳墻花)란 말은 길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와 담장에 핀 꽃이라는 뜻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여인 또는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장화노류(牆花路柳), 장화노초(牆花路草)라고도 한다. 중국 명(明)나라 구우(瞿佑)가 엮은 소설집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애경전(愛卿傳)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절강성(浙江省)에 명기 나애애(羅愛愛)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용모와 재덕을 겸비하였을 뿐 아니라 성품도 뛰어나고 시문도 잘 지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사모해 애경(愛卿)이라고 불렀다. 같은 고을의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조생(趙生)이 그녀를 연모하였고 곧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다 조생이 친척에게 강남땅의 관직 자리를 제안을 받게 되어 멀리 떠났다. 먼 곳까지 찾아갔으나 결국 자리를 구하지 못한 조생은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 한참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이에 시어머니 장례까지 치른 애경은 심신이 지친 상태로 남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외적이 침입해 애경의 고을까지 쳐들어왔는데, 외적 장수가 애경의 미모에 반해 강제로 첩으로 삼으려 하였다. 애경은 일단 달콤한 말로 기다리게 해 놓고 방으로 들어가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장수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고 결국 애경의 시체를 싸서 후원의 은행나무 아래에 묻었다.
얼마 후 외적은 물러가고 남편 조생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은 조생은 아내의 시신을 찾아 어머니 무덤 옆에 장사지내고 아내가 묻혀 있었던 후원에서 매일 밤을 통곡했다.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곡성이 들려오더니 애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애경은 그간의 사연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본래 기생으로 양갓집 출신이 아닙니다. 산에서 멋대로 자란 꿩과 따오기는 집안에서 길들이지 못하는 법이요, 길가의 버들 담장에 핀 꽃을 누구든지 쉽게 꺾을 수 있는 법입니다(山雞野騖, 家莫能馴, 路柳牆花, 人皆可折) (중략) 그런데 다행히 낭군을 만나 아내로 맞아주셔서 예전의 습관을 버리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중략) 하늘도 무심하게도 큰 화가 닥쳤으니, 죽기로 결심한 것은 남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배반하고 남의 신하가 되어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되어 나타난 애경은 자신이 곧 다른 집의 남자로 환생하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하룻밤을 보낸 뒤 사라졌다. 다음날 조생이 애경이 말한 고을에 찾아가니 과연 그 집에 아들이 한 명 태어났는데 울음을 그치지 않아 부모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생이 방에 들어가자 아이가 바로 울음을 그쳤고 아이의 부모가 기뻐하며 아들 이름을 나생(羅生)이라고 지었다.
이 고사에 쓰인 대로 노류장화는 누구든지 쉽게 만지거나 꺾을 수 있는 꽃처럼 주변 가에 있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존재라는 뜻이다. 기생이나 창부(娼婦)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노류장화(路柳墻花)
길가에 핀 꽃이 기생이기만 할까?
명나라 구우(瞿佑)의 소설 전등신화(剪燈新話) 애경전(愛卿傳)을 아십니까? 이 소설은 한 기생이 좋은 남편을 만나 백년해로하려 하였다가 뜻하지 않은 풍파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다시 환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녀는 이 남편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숨겼던 모양인지 죽은 뒤 남편에게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산 속의 꿩과 들판의 따오기를 집에서 길들일 수 없듯이 길가 버드나무에 핀 꽃은 아무나 꺾을 수 있습니다(山鷄野鶩, 家莫能馴 ; 路柳墻花, 人皆可折).”
이것이 기생을 뜻하는 노류장화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 글귀입니다. 즉, 길가에 주인 없이 피어난 꽃이기 때문에 무소유이고, 이는 곧 누구든 꺾으면 임자라는 말입니다. 때로 이런 인식은 기생을 천시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 한 여인으로서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혜원 신윤복은 이를 춘화(春畫)로 탄생시킨 인물입니다. 그가 그린 노류장화도(路柳墻花圖)는 정인(情人)을 기다리며 장옷을 손에 들고 담벼락 뒤에 숨은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남녀 간의 만남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의 주인공이 양반가의 여식일 수는 없었던 겁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이 결혼 전까지 남편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는 말을 전설같이 하시는 점으로 봐도 알 수 있지요. 혜원 신윤복은 기생의 일탈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금기를 비틀어 본 것입니다. 엄중한 예법도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서설이 참 길었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 전 국회에서 기가 막힌 일이 세 번이나 벌어졌습니다. 하나는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발의였고, 또 하나는 야당 대표 체포동의안 발의, 그리고 마지막은 검사 개인에 대한 탄핵안 발의였습니다. 같은 날 이 세 개는 모두 가결되었습니다. 언론지상에는 야당 대표의 건만 오르내렸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한 가지 건만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이유는 바로 나머지 두 건이 이 한 건을 위해서 발의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은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종의 협박이었고, 검사 개인에 대한 탄핵안 역시 비슷한 이유로 행해졌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두 건 모두 야당 측의 주도로 이뤄진 발의이기 때문입니다.
야당 대표 체포동의안을 제외한 이 두 건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예상대로(?)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죠. 말 그대로 야당 체포동의안 때문에 두 사람이 그 피탄(被彈)을 맞은 셈이었습니다. 철저하게 국회를 자기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불가능한, 웃지못할 촌극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이후 야당 국회의원들의 행태였습니다. 속칭 강성 지지층들이 결과에 발끈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무려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나는 아니다’를 외치며 온갖 방법으로 자기변명을 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중 국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무기명 투표를 깨버리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아마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이 강성 지지층 중에 ‘라이플(사냥총)을 꺼내야 할까 보다’라는 극언조차 내뱉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대놓고 살인예고를 하는 자들이나 ‘수박’ 소리 듣기 싫어서 벌벌 떨며 자기 인증을 하는 정치인이나 참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정치인이 비단 요즘만 있었겠습니까. 유주자사 유우와 공손찬은 서로 불편한 관계로 매우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중 유우가 먼저 공손찬을 상대로 제거를 시도합니다. 흔히 덕과 억압이라는 서로 다른 이민족 통치 방법을 선택하면서 생긴 갈등이었다고 하나 그 골이 아주 깊었던 것이죠.
그러나 오히려 유우가 역공을 당해 거용(居庸)으로 도주하자 공손찬이 뒤를 쫓아 생포해 버립니다. 이 무렵 동탁의 사망으로 힘이 공백인 틈을 이용해 헌제가 유우와 공손찬에게 벼슬을 내리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공손찬은 자신의 잘못을 피하기 위해 사신으로 온 단훈(段訓)을 겁박해 유우를 역적으로 만들었죠. 바로 이 때 생긴 원한은 후일 공손찬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유우와 공손찬 간 신뢰가 무너진 데 있었습니다. 유우 입장에서 유주를 안정화시키고 백성의 피해와 동요를 줄일 방법이 분명 있었음에도 공손찬은 무조건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오로지 오랑캐 토벌을 고집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관인 유우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도 잦았죠. 이러다보니 공손찬이 원소와 맞선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공손찬은 원소를 계교에 묶어둔 상황에서 유우마저 손쉽게 정리하고 역모로 몰아버림으로써 일시적으로 북방의 강자다운 위용을 부렸으나 결과적으로 오랜 전쟁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무너져 역경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익만 쫓아 간 인생이었기에 그 말로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손에 위기를 맞았던 원소가 전세를 만회한 뒤 북방의 패자로 확정되어 공손찬을 대체하게 된 것은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공손찬이 이익바리기가 되어 마치 쾌락만을 쫓아 사는 노류장화 같은 인생을 걸어온 결과로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일의 시인 보덴슈테트는 “현명하게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명하게 침묵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지요. 현명하게 말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침묵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명하게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처럼 현명하게 순간을 선택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인간의 인생은 오로지 이익만 쫓는 노류장화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절을 포기함으로써 사회적 인망을 잃었던 노류장화처럼 인의 대신 이익만 바라게 되면 그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은 오로지 표심만 쫓으면서 점점 추해지고 올바름과 선의를 버리면서 이해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옛날 노류장화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관점이 그대로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수백 년 뒤 노류장화라는 뜻은 기생이 아니라 정치인을 뜻하는 말이 될 지도 모릅니다. 특히 우리 한국에서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나라 정치의 수준도 그런 노류장화의 삶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니 참으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황진이와 소세양(蘇世讓)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을 들라면 허난설헌과 황진이, 이매창을 들 수가 있다. 그중에 황진이와 이매창은 기생 시인이다. 기생은 흔히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도 불렸는데, 길가의 버들이나 담장 밑의 꽃을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것처럼 기생 역시 누구나 쉽게 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 표현이다.
그러나 기생이라고 하여 아무 남자나 품어 상대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있고 그 사랑은 절창을 쏟아내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 개성 기생 황진이와 전주의 소세양은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 전기의 출중한 시인이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널리 회자되고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소세양은 1486년생의 전주 익산 사람으로 호는 양곡(陽谷)이며 시서(詩書)에 능했고, 형조, 호조, 이조, 병조판서 등을 고루 역임하여 호 보다는 소판서(蘇判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세양은 당대 임금들에게 신임을 받아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능력 있는 관료이기도 하지만 특히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양곡선생집'을 남겼는데 양곡집 외에도 많은 시문과 일화가 전한다.
황진이(黃眞伊)는 소세양과 같은 시대를 살며 당대를 풍미한 기생이자 최고 반열의 여류 시인이다. 신분질서와 남녀가 유별했던 시대였음에도, 황진이는 특유의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천민 취급을 받는 기생이라는 한계를 딛고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화려한 명성을 떨쳤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교과서에 그녀의 작품이 수록될 만큼 훌륭한 시인으로 역사적 명사 반열에까지 올랐다.
황진이는 실존 인물이지만 여성과 하천민에 대한 기록이 빈약한 시대 특성상 그녀의 생몰 연도나 가족관계, 성장 과정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진위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록들로 보면, 황진이가 머물던 송도(松都)에는 어떻게든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들로 넘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황진이는 비록 기생 신분이었으나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하여 결코 아무 남자나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신분이 높은 고관이나 여느 사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자신만큼 뛰어난 예술성은 물론 고결한 인품까지 겸비한 풍류명사(風流名士)였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만난 몇 사람 중에 풍류명사인 소세양이 있었다. 소세양은 일찍이 친구들에게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큰소리쳐왔다고 하는 인사였다. 어느날 그는 황진이의 재주와 용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한 달에서 하루라도 더 황진이와 묵는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네”라며 호언장담을 하고 송도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평소 큰소리쳤던 것을 후회할 만큼 황진이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큰소리친 대로 한 달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주저 앉았다고 한다.
여색쯤은 절제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친구들에게 개성 기생 황진이가 절색이라고 하지만 딱 한 달만 살고 오겠다고 내기를 했다던 소세양이다. 소세양이 떠나려 할 때 황진이가 읊었던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하늘 닿게 높이 솟았는데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해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유수는 거문고 소리 맞춰 차갑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 소리에 들어와 향기롭다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을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운 정은 파도처럼 끝없으리
버들가지가 여인을 상징하는 까닭
버드나무는 여성다움을 표현하거나 섬세한 아름다움에 비유되곤 한다. 여인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요(柳腰)라 하고, 고사성어 노류장화(路柳墻花)는 창녀를 뜻한다. 화려한 직업여성의 사회를 의미하는 화류계(花柳界)도 버들 유(柳)가 중심인 말이다. 이래저래 버드나무는 여인과 관련이 많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하는 이상(?)한 피서법. 그것이 식은땀을 흘릴 만큼 무서운 귀신출몰이었던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귀신출몰의 오싹한 장면으로 채워진 TV의 납량특집 오락프로가 자취를 감췄다. 시작부터 귀신얘기를 꺼내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 주제의 버드나무가 귀신나무로 알려져 있어 간략하게나마 소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버드나무는 대체로 집 뜰에 심지 않는다. 왜일까. 귀신이 나오는 나무로 믿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도깨비들이 비오는 날 밤이면 버드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장난을 치는 것으로 믿어 왔다. 실제로 버드나무 아래서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이 더러 있는 걸 보면 완전 허구로만 여길 일은 아니다. 또한 축 늘어진 버들가지의 모습은 상(喪)을 당해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이러한 형상의 버드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간 빗나가지만 자식을 못 가진 집안에서도 버드나무를 울안에 심지 않는다는 속설도 재미있게 전한다. 옛날 어떤 난봉꾼이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던 중에 냇가를 지나다가 목욕하는 처녀를 보았다. 난봉꾼은 허겁지겁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밤새도록 몸부림했다. 아침에 정신을 차린 난봉꾼은 자신이 밤새도록 껴안고 몸부림쳤던 그녀가 여인이 아닌 귀신 같은 버드나무였음을 알았고, 그후 양기(陽氣)를 잃어 남자구실을 못했단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귀신나무로 평가절하된 것만이 아니다. 버드나무 가는 가지는 실바람에도 흐느적거린다. 때문에 나무이름도 나뭇가지가 부드럽고 부들부들하다는 뜻이 변해 버들이 된 것이 아닐까. 이는 버드나무가 부드럽고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버드나무는 재질이 부드럽고 연해 마치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온유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온유함을 표현함이다.
버들 유(柳)자는 미모의 여인을 의미
이처럼 버드나무는 전통적으로 여성다움을 표현하거나 섬세한 아름다움에 비유되곤 했다. 예전에 아름다운 여인을 비유해 매화는 선녀(仙女)요, 벚꽃은 숙녀(淑女)요, 해당화는 기녀(妓女)라 했다. 그리고 버드나무는 재녀(才女)라 했는데, 버드나무는 이밖에도 여자를 비유한 경우가 많다.
가느다란 것의 표현으로 세류(細柳)라 하지 않았던가. 서양에서 황금사자를 지키던 요정 헤스페리데스의 네 자매 중 한 사람인 아이글레가 버드나무로 변신했고, '버들 같은(Willowy)'이라고 하면 우아하고 날씬한 여자를 뜻하고 있어 동서양이 그 가느다란 가지에서 느끼는 이미지는 비슷하다고 하겠다.
여인의 버들잎 같은 눈썹, 곧 미인의 가지런한 눈썹을 유미(柳眉)라 했다. 재능이 많은 여인을 뜻하는 유지(柳枝), 예쁜 모습을 의미하는 유태(柳態), 늘어뜨린 머리의 유발(柳髮) 등도 버들 유(柳)에서 비롯된 말이다. 모두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관계된 말이다. 늘어진 버들가지의 모습을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에 비유해 유요(柳腰)라 했는데, 유요는 버들가지와 같이 가는 허리를 뜻한다.
태조 왕건의 첫째 왕비였던 신혜왕후(神惠王后)는 버드나무처럼 호리호리한 허리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성도 버들 유씨(柳氏)이고 버드나무 옆에서 태조와 인연을 맺은 후에 임금을 갈아치운 대단한 여장부였다. 열전에는 왕건이 신혜왕후 유(柳)씨와 처음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태조 등극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 유씨와 버드나무의 이야기가 있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 시절에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가다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유씨가 길옆의 시냇가에 서 있었다. 그날 왕건이 그녀의 집에서 유숙한 후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후 그녀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다. 왕건이 소식을 듣고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궁예 말년에 장군들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왕건이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이때 유씨가 왕건에게 말하기를 "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치우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갑옷을 입혀 줬다. 장군들은 그를 호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단다. 이와 같이 유씨는 손수 갑옷을 입혀 왕건이 대업을 이룩하는 데 있어 큰 용기를 불어 넣어준 부인으로 유명하다.
또한 왕건의 또 다른 왕비였던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버들잎 일화도 유명하다. 왕건이 전략적 요충지인 나주에 주둔할 때에 우물가에서 어느 처자에게 물 한 그릇을 요구했다. 이때 이 처자가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물을 천천히 드시라는 배려의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장화왕후이고, 고려 제2대 황제인 혜종의 어머니이다.
노는 계집 창녀도 버드나무에 비유
여인을 버드나무에 비유한 말은 이밖에도 많다. 고사성어의 하나로서 노류장화(路柳墻花)는 '길가에 늘어진 버들과 담 밑에 핀 꽃'이라는 뜻이지만 이 버들가지와 꽃송이들은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 누구나 꺾을 수 있다는 의미로서 창부(娼婦), 창기, 창녀 등을 비유한 말이다. 즉 화류계(花柳界)의 여인들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더 나아가 패류잔화(敗柳殘花)라고 하면 잎이 떨어진 버드나무와 시든 꽃으로서 아름다움을 잃은 미인이나 권세를 잃은 관리를 비유하고 있다.
꽃과 버들을 의미하는 화류(花柳)와 화류계(花柳界)도 여인을 비유한 버들 유(柳)가 중심인 말이다. 화류계(花柳界)는 원래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의 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유흥가의 여성을 꽃과 버드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화려한 직업의 여인, 즉 노는 계집의 사회를 의미하며 화류장(花柳場)과 같이 쓴다. 화류항(花柳巷)은 노는 계집들이 모여서 사는 거리이다.
'진주 난봉가'에는 기생 첩과 노는 것을 본 부인이 한탄하며 목 매달아 죽자 남편이 후회하는 내용의 가사에 화류계라는 말이 나온다. "화류계 정은 삼년이요/ 본댁 정은 백년인데/ 내 이럴 줄 왜 몰랐든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라는 노랫말이 있다.
화류계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쓰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원래 화류계(카류카이)의 화(꽃)는 유녀이고 유(버들)는 '예자(藝者, 게이샤; 한국의 기생과 비슷한 직업의 여인사회를 말함)'를 지칭했지만 최근에는 한국에서와 같이 화려한 직업여성 사회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일본 화류계의 말이 나왔기에 이와 관련한 영화 한 토막을 전한다.
일본의 전통 기생 '게이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로맨스 드라마가 미국에서 만들어져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가난한 어부의 딸에서 전설적인 게이샤가 된 '사유리'라는 실존인물을 그린 작품으로 1997년 발간된 아서 골든(Arthur Golden)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게이샤역을 중화권 여배우가 맡아 '중-일'간 껄끄러운 설전을 불러일으켰던 블록버스터다.
게이샤는 '예자(藝者)'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춤, 음악, 미술, 서예, 화술 등 예술 다방면에 능한 예능인에 가까운 개념이다. 원칙적으로 게이샤들은 돈을 받고 성적인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는 게이샤와 몸을 파는 유녀들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게이샤들은 일본 전통을 이어간 '예술가'로 재조명하지만 춤추는 기생과 다를 바 없다.
영화에서도 "게이샤는 예술인이지 몸을 팔지는 않는다"는 굳건한 대사와는 달리 남자와 처음 동침하는 의식을 치르면서 처녀성을 경매에 올리는 대목을 꽤 비중 있게 다뤘다. 게이샤는 사무라이와 함께 '일본의 극단성과 선정성'을 단적으로 상징하지만 정제된 기예와 은밀한 성적 자극으로 빚어진 존재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주제의 여인에 초점을 맞춰 버드나무를 소개했지만 버드나무는 뭐라고 해도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던 어릴 적 추억의 나무다. 연인들은 그 버들피리에 맞춰 사랑 표현의 노래를 했다. 버들잎을 말아서 멋들어진 가락을 불어젖히기도 했다. 게다가 여인이 먼 길 떠나는 낭군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민간전승의 속설에는 버들가지로 아이를 때리면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동물의 경우에는 내장을 상하게 한다고 전한다. 또한 속설에 버들가지를 탐낸다는 말은 백정의 본색이 드러남을 뜻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서 얘기를 마칠까 한다. 주위에서 격식을 갖춘 커다란 식당의 간판에 ‘버드나무집’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왜 하필이면 한식 전문식당 이름이 버드나무집일까 못마땅할 때가 더러 있다. 왜냐하면 옛날의 버드나무집은 오늘날의 단란주점과 같은 선술집 또는 아가씨가 있는 주막을 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식 전문식당에 술집이름을 버젓이 붙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나만의 생각일까. 이래저래 버드나무는 여인과 관련이 많은 나무다.
▶️ 路(길 로/노, 울짱 락/낙)는 ❶회의문자로 저마다 각각(各) 발로(足) 걸어 다니는 곳이라는 데서 길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路자는 ‘길’이나 ‘도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路자는 足(발 족)자와 各(각각 각)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各자는 발이 입구에 도달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各자의 본래 의미는 ‘오다’나 ‘도착하다’였다. 반면 足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두 글자를 결합하면 ‘오고 가다’라는 뜻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路자는 통행이 빈번한 길이나 도로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路(로)는 성(性)의 하나로 ①길, 통행(通行), 도로(道路) ②도리(道理), 도의(道義) ③방도(方道), 방법 ④사물의 조리(條理) ⑤중요한 자리 ⑥지위(地位), 요처(要處) ⑦길손, 나그넷길 ⑧거쳐 가는 길 ⑨수레 ⑩모(물건의 거죽으로 쑥 나온 귀퉁이) ⑪행정구획의 이름 ⑫크다 ⑬드러나다 ⑭고달프다, 피로하다 ⑮쇠망하다 ⑯모지다(모양이 둥글지 않고 모가 나 있다) ⑰길을 가다 ⑱바르다 그리고 ⓐ울짱, 울타리(락) ⓑ즐기다(락)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길 도(塗)이다. 용례로는 버스나 기차가 정해 놓고 다니도록 되어 있는 길을 노선(路線), 거쳐 가는 길이나 과정을 노정(路程), 길바닥 또는 길 가는 도중을 노상(路上), 여관을 노실(路室), 길바닥 또는 길의 바닥 표면을 노면(路面), 여행의 비용을 노용(路用), 먼길에 지치고 시달리어 생긴 피로나 병을 노독(路毒), 길 옆이나 길의 옆을 노방(路傍), 먼 길을 가고 오고 하는데 드는 돈을 노자(路資), 내왕하는 길의 과정을 노중(路中), 길의 경로를 노차(路次), 도로나 철로의 바탕이 되는 땅바닥을 노반(路盤),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노변(路邊), 길의 너비를 노폭(路幅), 길이 갈리는 곳 또는 갈림길을 노기(路岐), 앞으로 나아가는 길 또는 나아갈 길을 진로(進路), 통행하는 길을 통로(通路),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든 길을 도로(道路), 여러 갈래로 갈린 길로 갈림길을 기로(岐路), 돌아오거나 돌아가는 길을 귀로(歸路), 여행하며 다니는 길을 여로(旅路), 도덕적으로 그릇되고 옳지 못한 길을 사로(邪路), 살아 나갈 길이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길을 활로(活路), 갈피를 잡을수 없는 길을 미로(迷路), 배가 다니는 길 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의 길을 항로(航路), 기차나 전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레일 길을 선로(線路), 물을 보내는 통로를 수로(水路), 지나가는 길이나 밟아 온 순서를 경로(經路), 좁고 험한 길 또는 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장애를 애로(隘路), 길가에서 사람을 협박하여 재물 따위를 빼앗는 짓을 노상강도(路上强盜), 백성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는 노불습유(路不拾遺),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노류장화(路柳墻花), 경쾌한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간다는 뜻으로 일에 숙달되어 조금도 막힘이 없는 모양을 경거숙로(輕車熟路), 한 길로 곧장 거침없이 나아감을 일로매진(一路邁進), 높낮이가 없이 평탄하고 넓은 길이라는 뜻으로 앞이 환히 트여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을 탄탄대로(坦坦大路),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로지인(行路之人) 등에 쓰인다.
▶️ 柳(버들 류/유)는 형성문자로 栁(류), 桞(류)는 통자(通字), 桺(류)는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흐르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卯(묘, 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가지나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곧 버드나무를 말한다. 그래서 柳(류/유)는 ①버들, 버드나무 ②상여(喪輿)의 장식(裝飾), 관(棺)의 장식(裝飾) ③수레의 이름 ④별의 이름 ⑤오음(五音)의 하나 ⑥혹(=瘤) ⑦모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버들 양(楊)이다. 용례로는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미인의 허리를 유요(柳腰), 버드나무의 잎을 유엽(柳葉), 버드나무 가지를 유지(柳枝), 버드나무의 꽃을 유화(柳花), 미인의 눈썹을 유미(柳眉), 버드나무의 그늘을 유음(柳陰), 버드나무 가지와 같은 고운 맵시를 유태(柳態), 가지가 가는 버드나무를 세류(細柳), 꽃과 버들을 화류(花柳), 강 언덕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안류(岸柳), 여자의 글재주를 기리는 말을 유서지재(柳絮之才), 푸른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는 뜻으로 자연의 모습 그대로 사람의 손을 더 하지 않는 것을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들은 무성하여 그윽이 어둡고 꽃은 활짝 피어 밝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강촌의 봄 경치를 이르는 말을 유암화명(柳暗花明), 버들 같은 눈썹에 개미 같은 허리를 유미봉요(柳尾蜂腰), 갯버들 같은 모습이라는 뜻으로 허약한 몸을 이르는 말을 포류지자(蒲柳之姿), 갯버들 같은 체질이라는 뜻으로 나이보다 빨리 늙어 버리는 체질이나 몸이 약하여 병에 잘 걸리는 체질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포류지질(蒲柳之質),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기생을 의미함을 노류장화(路柳墻花), 마른 버드나무와 시든 꽃이라는 뜻으로 용모와 안색이 쇠한 미인의 모습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패류잔화(敗柳殘花), 바람 앞에 나부끼는 세버들의 뜻으로 부드럽고 영리한 사람이 성격을 평한 말을 풍전세류(風前細柳) 등에 쓰인다.
▶️ 墻(담장 장)은 ❶형성문자로 墙(장)은 통자(通字), 墙(장)은 간자(簡字), 廧(장), 牆(장)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嗇(색, 장)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墻자는 '담장'이나 '경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墻자는 土(흙 토)자와 嗇(아낄 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嗇자는 논과 벼를 함께 그린 것으로 '수확한 곡식'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소전에서는 爿(나뭇조각 장)자가 들어간 牆(담장 장)자가 쓰였었다. 牆자는 수확한 곡식을 안전하게 '보관하다'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누가 훔쳐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후에 牆자가 주변과의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해서에서는 담장의 재질을 표현한 墻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墻(장)은 ①담, 담장 ②경계(境界) ③관을 덮는 옷 ④관의 옆널 ⑤궁녀(宮女) ⑥담을 치다, 쌓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담 원(垣), 담 도(堵), 담 용(埇)이다. 용례로는 담과 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장벽(障壁), 담 밑 담 가까이를 장하(墻下), 담을 뚫음을 천장(穿墻), 난간처럼 둘러 막은 담장을 난장(欄墻), 집의 정면에 쌓은 담을 조장(照墻), 담이 이웃하여 서로 맞닿음을 연장(連墻), 담을 쌓아 막음을 방장(防墻), 낮은 담 또는 나지막한 담을 단장(短墻), 담을 쌓음을 축장(築墻),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견요어장(見堯於墻), 형제가 담장 안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동족상쟁을 일컫는 말을 형제혁장(兄弟鬩墻),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기생을 의미하는 말을 노류장화(路柳墻花), 담에 구멍을 뚫는다는 뜻으로 재물이나 여자에게 탐심을 가지고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감을 이르는 말을 유장천혈(窬墻穿穴), 담을 사이에 한 가까운 이웃을 일컫는 말을 격장지린(隔墻之隣) 등에 쓰인다.
▶️ 花(꽃 화)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化(화)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초두머리(艹)部는 식물, 花(화)는 후세에 생긴 글자로 본래는 華(화)로 쓰였다. 음(音)이 같은 化(화)를 써서 쉬운 자형(字形)으로 한 것이다. ❷형성문자로 花자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花자는 艹(풀 초)자와 化(될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化자는 ‘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본래 소전에서는 땅속에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운 모습을 그린 芲(꽃 화)자가 ‘꽃’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花자가 모든 ‘꽃’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花(화)는 성(姓)의 하나로 ①꽃 ②꽃 모양의 물건 ③꽃이 피는 초목 ④아름다운 것의 비유 ⑤기생(妓生) ⑥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⑦비용(費用) ⑧얽은 자국 ⑨꽃이 피다 ⑩꽃답다, 아름답다 ⑪흐려지다, 어두워지다 ⑫소비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꽃구경을 하는 사람을 화객(花客), 꽃을 꽂는 그릇을 화기(花器), 뜰 한쪽에 조금 높게 하여 꽃을 심기 위해 꾸며 놓은 터 꽃밭을 화단(花壇), 꽃 이름을 화명(花名),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화용(花容), 환갑날에 베푸는 잔치를 화연(花宴), 화초를 심은 동산을 화원(花園), 꽃과 열매를 화과(花果), 꽃을 파는 곳을 화방(花房), 꽃병 또는 꽃을 꽂는 병을 화병(花甁), 꽃놀이 또는 꽃을 구경하며 즐기는 놀이를 화유(花遊), 비가 오듯이 흩어져 날리는 꽃잎을 화우(花雨), 온갖 꽃을 백화(百花), 많은 꽃들을 군화(群花), 꽃이 핌으로 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사상이나 풍속이 발달함을 개화(開花), 떨어진 꽃이나 꽃이 떨어짐을 낙화(落花), 한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하게 여기는 꽃을 국화(國花), 암술만이 있는 꽃을 자화(雌花), 소나무의 꽃 또는 그 꽃가루를 송화(松花), 시들어 말라 가는 꽃을 고화(枯花), 살아 있는 나무나 풀에서 꺾은 꽃을 생화(生花), 종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꽃을 조화(造花),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무늬가 같지 않음 또는 문장이 남과 같지 않음을 화양부동(花樣不同),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자태를 이르는 말을 화용월태(花容月態), 꽃이 핀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경치가 가장 좋은 때를 이르는 말을 화조월석(花朝月夕),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금상첨화(錦上添花), 말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녀를 일컫는 말 또는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을 해어화(解語花),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이란 뜻으로 미인의 용모를 일컫는 말을 설부화용(雪膚花容), 마른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곤궁한 처지의 사람이 행운을 만나 신기하게도 잘 됨을 말함을 고목생화(枯木生花),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 한다는 뜻으로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폐월수화(閉月羞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