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40/문답사]“제주학濟州學을 아십니까?”
그제(12월 1일) 제주濟州에서 ‘두 달 살이’를 하고 있는 친구가 눈 쌓인 한라산漢拏山 정상 백록담白鹿潭 인증샷을 보내왔다. 성판악 - 관음사코스 20km를 9시간에 걸쳐 등반했다는 거다. 이제 설악산 대청봉이나 공룡능성, 지리산 천왕봉 등을 올랐다하면 “대단하다” “축하한다” 감탄사가 먼저 나올 우리의 나이, 사진을 보자마자 “정교장, 화이팅” 댓글을 보냈다.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금세라도 달려가 오르고 싶은 한라산. 몇 년 전 2월 엄청나게 쌓인 눈길을 뚫고 진달래대피소까지 오르다 돌아온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다. 눈 속에 즐겁게 파묻힌 몇 시간 그리고 몇 달 후 아내와 어렵게 오른 한라산 정상, 준비가 소홀하여 귤 하나를 구걸해 먹던 추억, 한 달 전 어리목에서 윗세오름과 남벽을 거쳐 돈내코로 내려오던 섬나라 제주 영산靈山의 아련한 추억들이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문득, 몇 년 전에 사놓고 한 줄도 읽지 않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제주편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2016년 22쇄 창비 발행, 467쪽, 18000원) 책이 생각났다. ‘제주허씨들을 위한 제주학 안내서’ 머리말 제목이 재밌다. ‘제주허씨’가 렌터카의 별칭임을 처음 알았다. 불현듯 독서욕讀書慾이 맹렬하게 솟아났다. 이틀간 꼬박 완독, 정독을 하며 내 자신이 모처럼 뿌듯했다. 요즘 애들 말대로 ‘보람진 이틀’이었다. 제주는 언제 가도 이국적異國的이다. 엑조틱exotic하고 환타스틱fantastic한 남도의 섬, 이곳은 ‘외국外國’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이곳이 우리나라라니 얼마만한 축복인가. 제주의 역사가 고맙기까지 하다. 그저 한라산과 여러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기만 했던, 우리가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오직 제주만이 간직하고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문화유산 속살들을 유홍준씨처럼 조목조목, 시시콜콜 마치 눈으로 보고 있는 듯 이야기를 재밌고 유익하게 펼쳐가는 스토리텔러를 본 적이 있는가. 그분은 늘 나를, 우리를 감탄케 하는 타고난 탁월한 ‘문화 재줏꾼’이다. 참으로 도저한 책이다. 인문백과사전에 다름 아니다.
1993년이던가? <문화유산답사기>(약칭 문답사) 1권을 펴낸 게. 남도답사 1번지로 해남과 강진을 손꼽았다. 발간되자마자 30만권이 팔려 인세印稅기 1억이었다던가. 그는 그 책 한 권으로 일약 이 땅의 ‘문화권력’이 되었다. 대단했다. 이 땅에 ‘문화답사 열풍’을 불러왔다. 나는 저자가 시키는대로 남도답사 1번지를 일주일 동안 순례했었다. 먹으라는 데서 먹고, 자라는 데서 자며, 바라보라는 데에서 바라본 1993년 그 어느 여름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문화재청을 '종신' 맡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그분이 청장으로 있었기에 문화재의 중요성이나 보전, 관리 등이 선진국 수준이 되었지 않았을까. 옛날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말 잘 하는 사람은 글을 잘 쓰지 못한다했는데, 그는 두 가지를 잘하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표본이다. 잇달아 펴낸 2,3,4,5,6,7,8권의 깊이 있는 '청산유수형'의 현란한 문화유산 해설서들은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로서는 읽지 않아도 사놓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대중인문교양서. 유홍준처럼 이런 종류의 책 한 권만 써놓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희구해왔다. 족탈불급足脫不及임을 왜 모르랴. 몇 년 전에 펴낸 서울편 두 권은 나의 감탄에 아예 쐐기를 박았다. 일본편 4권과 중국편은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내 고향 서울이야기’ 두 권은 여러 번 읽어 나의 인문학 특강을 더욱 윤택하게 해준 '컨텐츠의 보물창고'이다. 두 권을 더 쓸 생각이라고 했는데, 언제나 나올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골프와 미각여행을 위해 제주를 자주 찾는 친구들이 많다지만, 우리 부부는 ‘걷기의 명소’이므로 올레길과 오름 그리고 여러 숲길을 걸으려 제주를 10여차례 다녀왔다. 단 한번도 문화유산을 답사하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신천지가 전개되는 ‘개안開眼’이 된 듯했다. 제주의 역사, 문화, 언어, 자연, 민속, 신화와 전설 그리고 사람들이 머리 속에 쏙쏙쏙 들어오기 시작하자 지금껏 알고 보았던 제주와는 생판 다른 것이었다. 아내에게만 이 책 읽기를 강추할 게 아니라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강강강추추추’하자고 이 새벽 졸문을 타닥거리는 것이다. ‘무엇이든 알아야 면장面長이라도 해먹는다’는 속설처럼, 다음 여행 때에는 제주가 달리 보이리라. “좋아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알게 되며, 알게 되면 모든 것이 그 전과 달리 보인다”는 말은 “우리나라 국토는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말과 함께 유홍준의 문답사 1권 머리말에 있던 문구였다. 공자가 부러워하고 말년에 살고 싶어했던 동이東夷의 나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우리나라가 어찌 이런 스토리 하나 없는 ‘천박한 나라’일 수가 있겠는가. 그럼 그렇지. 우리의 국토는 온통 박물관인 것을.
추상적인가? 그럼 이 책을 빌려보든 사보든 ‘답사 1번지-와흘 본향당’편과 ‘다랑쉬 오름’편만이라도 읽어보시라. ‘설문대할망’(제주의 창조여신)이 만들어놓은 장대한 대지예술을 훑어보시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리라. 그리고 ‘윗세오름 등반기-영실’편 20여쪽을 읽으며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위트와 유머도 감상하게 될 것이다. 이왕 유홍준님 얘기가 나왔으니 '관촌수필'의 이문구 작가가 쓴 유홍준과 유홍준의 저작에 대한 촌평을 옮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그 동네의 누대 토박이보다도 그 동네를 더 잘 알뿐만 아니라, 한결 사랑하고 자랑하는 타동네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보면 그는 타동네 사람이 아니며, 그야말로 고향은 전국의 산천이요, 주소는 전국의 도로이며, 연구실은 전국의 동네인, 하나뿐인 전국적인 원주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홍준이 있는데도 매월 김시습이나 토정 이지함 선생, 김삿갓 선생의 후생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마살도 유홍준의 경지에 이르면 문화재급이다. 아니, 그 인간 자체가 문화유산에 속하는 한 물건인지도 모르를 일이다" 작가에게 이런 찬사를 받아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문구의 말대로 유홍준이라는 인간 자체가 문화유산라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말로 대단한 ‘이빨’이다. 여기에서의 이빨은 말빨과 글빨 그리고 발빨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지적知的 구라’ 3인방에 당당히 명함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도올 김용옥, 이어령박사). 이런 ‘지적 엔터테이너’들이 있어 세상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게 나의 오랜 지론이다.
인문학人文學이라고 하여 고상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인문학이 어찌 문과대학 학자들의 전유물일 수 있으랴. 우리 살아가는 역사와 스토리가 인문학인 것을. 유홍준님이 펼치는 제주 이야기야말로 ‘제주학濟州學’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나의 도반인 축령산 방외지사는 “짜안헌 것이 바로 인문학인디, 뭐라고 시끄럽게 할 필요가 어디 있다요?” 곧장 반문을 한다. 그렇다. 우리에게 ‘역사와 스토리’가 없으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제주의 갖은 전설이 온갖 유물을 만나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투성이가 바로 이 책이다. 하멜상선전시관, 오현단, 추사유배지, 조랑말박물관, 삼성혈, 해녀들의 불턱, 용천동굴, 조천 너븐숭이, 와흘 본향당, 관덕정, 모슬포 등등등등,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제주학’이므로 ‘전공’까지는 아니어도 ‘선택’으로 들어보심이 어떠하신지? A학점을 못받으면 어떠리. 과락科落만 하지 않으면 될 터.
무슨 말을 더 하랴. 하지만 마지막 교훈은 우리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오늘날의 '제주학'을 있게 한 선구자들의 이름이다. 김만덕할머니와 공덕비에 오른 재일동포들, 헌마공신 김만일, 기록을 남긴 제주목사들, 역사적인 시인과 묵객들, 추사 김정희, 나비박사 석주명, 일본인 이즈미 세이이찌, 소설 <화산도>를 쓴 제주출신 김석범, <순이삼촌>으로 4.3항쟁의 비극을 알린 현기영, 오름을 집대성한 김종철, 화가 강요배, 사진작가 김영갑, 올레 서명숙 등등등등. 제주도는 결코 만만한 땅이나 섬이 아니거늘. 졸부 중국인들의 투기나 놀이터가 될 수 없는 일이거늘. 제주가 있어 우리는 외롭지 않다. 아니, 오래오래 행복할 것이다. 특별자치도 제주 만세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