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이념에 대한 정체성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극우 중에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국힘 조차도 중도를 부르짓고, 유력한 두 대선 주자들 사이에서도 한쪽을 좌파라고 얘기하고, 개혁, 진보를 이야기 한다. 개가 지나가다 웃을 일이다.
스스로,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했던 대통령 조차도 기가 찰 노릇이다.
뿐만아니다. 스스로 좌파라고, 진보라는 믿고 있는 사람들, 진보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내가 몸 담고 있었던 민주노동당에서도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정체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고, 반성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의 오류를 알지 못해서 발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나 같은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국민부터 시작해서, 지식인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알고 있더라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때문인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야 할 때인 것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은 우리가 세계사의 조류 속에서 제 역할을 하고, 주도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좌파 우파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후,
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의 우측에는 왕정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고 온건한 혁명세력(지롱드당)들이 앉았고, 좌측에는 왕정에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이며 급진적이고 과격한 혁명세력(쟈코팽당)들이 자리 한 것에 유래한다.
그런데, 그 당시 좌파가 부르짓었던 자유, 평등, 인권 같은 가치들은 지금의 우파들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이어서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좌 우의 구분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급진적인 혁명 세력 안에는 신흥 자본가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는 세력도 있었으니, 그 의미는 한층 더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6월 항쟁이 있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들이 주체가 된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386 세력이 있었지만, 누구나가 공감했던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이다. 6월 항쟁의 성격이 꼭 프랑스 대혁명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386 세력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좌파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대학 때 데모한 이력이 있는 이명박씨도 박근혜 측에서 이야기 하듯이 좌파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정치권의 386 들을 과연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 이명박을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 모두를 좌파라고 한다면, 화를 낼 사람이 아마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 당 두 대선 주자 사이의 싸움에서, 상대를 끌어내리는 단어로 쓰인 무식한 좌파, 자유시장주의자인 노무현이 스스로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고 칭했던 코메디 같았던 좌파, 아니, 온 대다수의 국민이 듣기만 해도 몸서리 치는 빨갱이 좌파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 기원을 맑스의 자본론에서 찾고자 한다.
사회 공동체의 분업조직이 사적이면 자본주의이고, 공적이라면 사회주의이다. 사적인 분업조직은 당연히 자본가가 주도 할 것이고, 공적인 분업조직은 당연히 사회공동체가 주체가 된 노동자 스스로의 생산조직이 될 것이다.
사적인 분업조직의 사회적 분배는 당연히 사적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어, 시장이 형성될 것이고, 공적인 분업조직은 분배도 역시 공동체 전체의 방식대로 공적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은 여기서 착각을 한 것이다. 스스로 분배주의자라고 자처했기에, 좌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현재 노무현 정부는 그가 생각했던 분배조차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사적인 분업조직의 사회에서는 분배가 평등하게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그 분배 과정 속에서는 당연히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원활하고 균형있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사회가 나설 수 밖에 없다. 그런 사회 시스템을 유럽국가들이 채택한 사회민주주의라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사회민주주의 대신에 사회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자본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가 과연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날 수가 있을까? 자본가가 주인이 될 수는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주인이 될 수는 없다.
하긴, 자본가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 굳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해도,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동의 할 수 없다.
현재, 지구상의 대다수 국가가 자본주의를 택하고 스스로 민주국가라고 하지만, 나는 여기에 의아심을 느낀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의 속성은 자유시장에서나, 사회민주주의 시장에서나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숨어 있을 뿐이지,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이윤 확대라는 가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 간단한 예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다.
노동조합의 천국인 프랑스나 스웨덴 대기업들이 우리나라에서 벌이는 행태(구조조정, 아웃소싱, 노동탄압)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좌파라고 부르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사 노무현이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펼쳤다 해도 좌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역동성이다.
사적인 분업체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대로 이윤확대를 가장 큰 가치로 삼는다.
그 역동성은 경쟁과 생산성 향상에서 힘을 발휘한다. 자본가는 이윤이 확대되고, 세상에는 상품이 넘처나고 풍요로워 진다.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의 장점인 그 역동성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마냥 놔두면, 마치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커져서 공룡이 되고 이 사회를 위협한다.
경쟁에서 이긴 기업은 독재자가 되어 대중을 위협하고 국가 마저도 손아귀에 넣는다. 세상은 물질만능으로 넘처나고, 경쟁에서 떨어진 기업이 생겨나고, 생산성 향상에 희생된 노동자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양극화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또, 그 과정에서 환경파괴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자본주의의 장점인 역동성은 어쩌면 자본주의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는 반대로 분업체제가 느슨해 질 수 밖에 없다. 생산조직이 개인의 것이 아니니, 분업조직이 만든 생산물은 상품이 될 수가 없고, 분업조직 사이에 경쟁이 일어날 수가 없으니, 생산성 향상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성 향상이다. 소련이 망하고 북한이 힘들어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점에 있다. 사회는 자칫 빈곤해 질 수 있다.
물론, 물질적인 면으로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교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지만, 인간의 정신은 절대로 물질에 자유스러울 수 없다.
자본주의는 소비를 하지 않으면 망한다.
사회주의는 소비를 줄이면 건강해진다. 지구는 소비를 위한 개발과 생산 때문에 파멸해 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체제를 택해야 할 것인가. 좌파인가 우파인가. 그것은 우리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고,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약속한다.
사적인 분업체계이든, 공적인 분업체계이든, 지금까지 국가가 한 일은 과연 무엇인가.
국가는 그 체제를 한층 확고하게 만들었고, 그것들의 규칙을 정해주었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택한 소련을 비롯한 국가들의 현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과연 국가는 그 체계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는가. 아니면, 필요악이었던가.
현재, 자본주의는 국가간의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역동성이 지나쳐 그것을 통제해야 할 국가 조차도 끌려 다닐 정도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가는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것인가.
분명한 것은, 공적인 분업체제(사회주의)의 사회 속에서는 굳이 통제를 않더라도 공동체의 윤리대로 분배가 된다는 것이다.
공적인 분업체계 속에는 이미 분배에 대한 약속이 내포되어 있어, 개인 간의 사회적인 통제조직의 의미는 중복된 의미이고 자칫하면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강제할 가능성이 크다.
공적인 분업체제라도 개인의 자유는 인간이 가진 고유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유는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시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적인 분업체계(자본주의)는 통제를 해야지만, 분배가 올바르고 원할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이 사적이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면, 그 역동성에 의해 현재와 같은 양극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 통제는 당연히 사회공동체의 몫이다. 현재로서는 국가의 몫이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가 있다.
그들은,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인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한다.
여기서는 생존을 위한 로빈슨 크루소 같은 노동이 모든 특징들이 재현되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을 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의 차체의 성격에 따라, 또는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무리 생산수단이 공적인 것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을 우리 미래 사회의 사회체계가 되길 원하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현재, 한국 뿐 만아니라 지구상 도처에,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있다. 그들은 만약 자본주의나 국가주의가 억압이나 유혹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류의 미래는 좌파냐 우파냐, 혹은 자유롭게 살 것인가, 억압받고 살 것인가를 명확하게 정하고, 그 정체성을 따르는데 있다.
그곳에서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계급의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