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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5, 6일은 (사)충장공한백록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전적지 답사에 1박2일로 참가하고
돌아왔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지난달 말에 법인등록을 알리는 고유제를 묘소에서 봉행한 바 있고,
청주한씨 문중의 후원으로 이번에 각계각층 시민들의 답사까지 마련하였으니 그 추진력이 대단
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에 장수로 순절하신 충장공에 대해서는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도 매년 묘역의 답사를
진행하며 시민들의 관심을 넓히는 역할을 해온 터였지만, 이처럼 선양사업으로 규모를 갖춘
데에는 사업회 구성원들이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며 노력하였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 역시 연전에 신대수 운영위원을 통해 해금강테마박물관의 유관장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선양사업의 구상을 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이번 사업회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누구보다 그 진척
정도를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답사에도 역시 그런 인연이 없지 않았습니다.
서면에서 1555년에 태어나신 한백록(韓百祿) 장군은 왜란이 터져 진행중이던 해 7월 17일에
순절하셨습니다. 선조 대에 선무공신으로 책록되었지만 전해오는 <행장>은 훨씬 후대인 2백여
년 뒤에 지어진 것으로, 시호가 내려지던 19세기초였습니다. 수년 전에 이런 기본적인 행적들이
소개*되며 알려진 뒤로는 별다른 내용이 더 보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역의 역사문화에
관심을 가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역사인물이 있었던 춘천이라면 지역의 학계
에서도 임진왜란에 관심을 가지고 최근의 연구성과로부터 최신의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늘 있어왔던 게 사실입니다.
*유재춘, "임진왜란과 충장공 한백록 연구", 강원향토문화연구회, <강원문화사연구> 1(1996).
허준구, "충장공 한백록의 실기 연구", 춘천문화원, <춘주문화> 19(2004).[문화원 홈피에 원문이
올려져 있음 / 끝에 행장,시장,묘갈명 원문과 번역문이 수록돼 있음]
그런데 이제 답사를 준비하고 다녀오면서 새로이 확인된 사실이나 정보들도 적지 않았을 것
입니다. 특히 역사문연의 감사이기도 한 한희민 후손은 문중의 총무 일을 맡고 사업회의 진척에
문중과 중간역할을 하면서, 스스로가 임진왜란 해전사와 관련하여 부지런히 찾아서 연구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필자가 옆에서 지켜본 것이 벌써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기존의 <행장>
에서는 전해지지 않던 새로운 사실도 찾아냈음을 우리 모두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충장공께서
한산도대첩에도 참전하셨다는 (어쩌면 학계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확인된 사항일지는 몰라도
춘천사람들한테는 놀랍도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그중 대표적인 점이라 보입니다.
답사의 일정표에는 남해 미조항까지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무리한 계획으로 조정된
일정표도 함께 배포되었습니다. 답사란 늘 즐겁고, 역사 저편의 옛 모습을 찾는 답사는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이번 답사는 번거로운 여러 준비 없이 몸만 얹는 꼴이었
으니, 늘 이것저것 챙기던 버릇 때문에 오히려 좀 실감이 덜 나는 출발이었다고 할까요. 숙소의
방배정 목록을 보자니 연배가 한참이나 위인 어르신들과 함께라 조심스런 마음이 되기도 하였
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무난한 답사는 또 없었다는 편한 마음이 더 앞섰던 게 사실이겠지요.
6시에 춘천을 출발하자 인사와 소개가 있었습니다. 몽계공파 종친회장님 부부나 종친회 어르신
들이 5분 있었고, 민성숙 사업회대표님 부부나 신대수 님 부부처럼 안팎이 동반한 행차가 있는가
하면 또 김남덕 님처럼 아들을 동행한 분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중일 시의원, 문학이나 여러
예술분야의 인사들, 도민일보의 여기자님 등등, 두루 참가를 하시어 총 30분이었습니다.
곧 이창연 님과 엄대종 님 들이 부지런히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를 나눠주었고, 신대수 님은
진행 사회를, 한희민 님은 이동중 내내 답사설명을 맡아 보탰습니다.
필자에게 경상남도는 진주 말고는 이제까지 답사의 공백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산을 서너
번, 거제도도 안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역시 답사로서는 초행길인 셈이었지요. 거제도 해금강
이나 통영도 대학 때 마냥 술에 절어 다녔던 반은 강제연행 격인 수학여행이었으니 기억에 남은
것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집다.
그래서 이번엔 더욱 맨정신으로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앞세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자주 휴게소를 들렀으면 했으나 청도에 와서야 처음으로 쉬었습니다.
답사에는 행선지들의 지도가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버릇 때문에 얼른 안내소에 들러 거제, 통영의
관광안내도를 챙겼습니다. 오늘 일정은 전적지 두 곳과 거제도 끝에 있다는 숙소까지입니다.
그런데 가거대교를 거쳐서 가는 길이라니 그 초행길에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2010년의 개통
전후로 티비 다큐방송을 보며 언젠가 가보겠지 하고 기대감을 가졌기도 했거든요. 해저로
내려가는 '가덕해저터널'은 가덕도에서 중죽도까지 3.7km이고, 다시 거가대교로 이어져
거제도에 연결되며 거가대로를 이룹니다. 외국의 기술을 빌렸지만 대우건설에서도 새 기술
노하우를 보탰다고 했지요.
"거가대교 침매터널은 세계 최초로 내해가 아닌 파도와 바람, 조류가 심한 외해에 건설되는 해저
침매터널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수심 48m의 연약지반에 시공되고 있다.
이 공사를 통해 대우건설은 세계 최장 함체(180m), 세계 최초 2중 조인트 함체 연결 등 5가지의
세계기록과 함체 연결시 공기주입, 침매함체 구간 자갈포설 장비, EPS 등 3가지의 국제특허로
토목학계는 물론,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국토일보> 2010.9.14)
'침매'란 가라앉혀 묻었단 말이지요. 당시 연합뉴스의 그래픽입니다.
김해평야를 지나자
곧 부산신항만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가덕해저터널로 들어갑니다.
거가대교에서 보이는 풍경인데, 중간에 청해대라는 대통령 하계 별장이 있다는 저도도 스쳐
지났습니다.
이제 이틀간의 답사 개요를 지도로 표시해 보면 이렇습니다(다움지도를 사용하였고, 클릭하면
크게 보임).
12시가 덜 되었으나 먼길에 우선 시장기부터 다스리기로 하고 기사님이 안내하는 장승포의
'옥포정식당'으로 갔습니다. 근처에 여객터미널이 보였고, 메뉴는 거제도의 별미라는 멍게덮밥
이었습니다.
(1) 거제도 옥포
식후의 느긋함으로 6시간 가까이 앉았던 버스도 다시금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옥포 지역의
답사 세부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옥포조선소를 끼고 왔던 길을 다시 조금 거슬러 옥포만 북안
끄트머리의 옥포대첩기념공원으로 갔습니다.
조선소가 차창으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대규모 산업시설을 지척에서 보는 일이 춘천사람에게는
결코 일상의 낯익은 모습이라 할 수 없지요.
원래 옥포진 자리는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차지하였다는데, 기념비 등이 두 번이나 옮겨서
1996년에 이 자리에 공원이 준공된 다음 사당도 지었다고 안내 팜플렛에 적혀 있습니다.
매표를 하고 우선 해설사를 기다리다가 단체기념촬영을 하고 기념관을 먼저 관람하였습니다.
이 공원지역의 위성사진 및 마당 한켠의 안내판 조감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1전시실은 주로 무기나 배, 복장 등의 자료적 성격이 강한 유물전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복제품이라도 보여준다는 사실에 치중한 나머지, 실제로 어디에 있는 어떤 유물을 왜 이렇게
복제하여 전시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전시문화의 일반적인 현수준이 거기까지인가 싶은 거였지요. 이에 비해 2층은
왜 옥포대첩인지를 보여주는 전시였습니다.
처음에 보이는 요약 설명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궤멸상태에 있던 수군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군들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드디어 대대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고, 마침내 5월 7일 가덕도 쪽의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던 중이었다지요. 육지
에서는 북상하던 왜군들에게 이미 한양의 함락이 목전에 있던 즈음이었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협선 포작선 등 85척을 이끌었고, 경상우수사 원균 아래 지세포만호 한백록을
포함한 경상도 진장들이 전선과 협선 등 6척을 합하여 모두 91척의 함대였고, 옥포만을 지날
무렵 옥포 남안 능포 끄트머리의 양지암에서 옥포만 안쪽에 왜적들이 있음을 알리는 척후가
날아들었습니다(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조선수군들은 기수를 돌려 옥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던
왜선 50여 척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그중 26척을 격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왜적
수군들은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이었고, 조선수군들은 이후로도 같은 날에 연이어 합포(
창원군)해전을 치르고, 다음날 적진포에서까지 승전을 거두고 첫 연합 출전을 마감했습니다.
<행장>에서 이 옥포전을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전투가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적선 50여 척이 사면에서 포위하여 버티고 있고 바람을 타고 화약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어 대적하지 못할 형세였다. 공이 홀로 군중(軍中)에서 기세를 독려하며 힘써 싸우자,
휘하의 병사들 또한 모두 깊이 감동하여 격력하고도 절절하게 죽기를 기약하며 적선과 세 번
접전하였다. [갑자기 동서로 충돌하며 바람이나 번개와 같은 형세로] 큰 배 수 척을 파괴
시키자, 적은 곧 궤멸하여 흩어졌다."([]안은 諡狀의 말로 여기서는 '당파撞破'란 말을 썼음.
이 말은 들이쳐 깨트린다는 의미인데, 조선배의 특성을 이용한 조선수군의 대표적인 전술
이었다.)
이 옥포해전은 충장공이 치른 첫 전투였습니다.(나눠준 답사설명문에는 왜선이 30척이라고 되어
있고, <임진왜란 해전 목록>에는 옥포해전 날짜가 5/4일로 되어 있었음)
위 지도에서 적진포는 통영 쪽에 표기되어 있으나, 학자마다 옛 지명의 고증이 다르답니다. 우리는
당항포 동쪽의 내산리라는 주장을 따라 다음 날에 답사하였습니다.
아래는 학익진(鶴翼陣) 모형.
이항복이 지었다는 전라좌수영비의 탁본.
구석엔 양지암의 모형도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에는 큰북이 있었습니다. 장군의 신호로 쓰이던 이 대고는 매년 6월에 거행한다는
옥포대첩기념제전 때도 반드시 등장하는 의기.
둥! 둥! 둥!
기념관을 나오자 마침 여성해설사가 당도하였는데, 사당과 기념탐을 돌아보고 오라고 하였
습니다. 사실 사당에 먼저 참배를 하여야 하였지요.
홍살문을 지난 사당 입구 우측에는 거북선 모형이 있습니다.
외삼문 경앙문(敬仰門, 경건하게 우러르는 문).
외삼문 안 우측은 사당인 거충사(巨忠祠), 좌측은 재숙소였으나 닫힌 문에 바로 현판만 보고는
내삼문으로 올라갔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주사당으로 문이름도 경충문(景忠門:
커다란 충신에게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실 거충사에 모셨다는 신위들을 보고 나서 올랐어야 했지요.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본 사진을
여기 올립니다. 굳이 올리는 이유는 누가 어떻게 모셔졌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사진이 작아
잘 보이지 않으나 가운데 주 신위가 충무공이고 좌우로 모두 22분의 거제출신 의병의 신위들
입니다. '22공신 사당 현판식'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던 <새거제신문>은 2010년 7월 1일자에
"거충사는 임진왜란에서의 무공을 인정받아 전후 선무원종공신에 추존(追尊)됐던 거제출신 의병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신위(神位)"
를 모신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옥포대첩은 분명 거제의병들만의 전쟁은 아니었는데 어쩐
일일까요?
주사당은 '효충사(效忠祠)'입니다. '효충'이란 충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중앙의 영정 곁에는 명 황제가 하사했다는 팔사품을 그린 병풍의 모사도와 그 설명이 있었습니다.
잠시 묵념으로 일행과 참배의 예를 올렸습니다.
영정은 양화로 사당을 지을 때 그린 것입니다.
효충사의 오른편으로 옥포루 쪽으로 나가는 샛길이 나 있습니다.
옥포루에서 부산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먼 물길에 비해 매우 가까워 보였습니다.
첫댓글 역시 학자십니다. 잘 정리된 글 잘 읽었습니다.
답사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셨지요??
노고가 많으셨습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