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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표준이 되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나 감은사지 삼층석탑(신문왕 대)의 장중한 스타일에서, 불국사 석가탑(경덕왕 대) 스타일의 정제되고 아담한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과도기)를 보여준다.
1942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의 사리공(사리를 모시는 공간)에서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 뚜껑 안쪽에 안팎으로 99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692년(효소왕 원년)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과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복사에 이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706년(성덕왕 5) 효소왕과 신목태후마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성덕왕이 먼저 간 세 사람(아버지 신문왕, 형 효소왕, 어머니 신목태후)의 영혼을 위해 사리 4과와 순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탑의 2층에 추가로 안치했다.
황복사는 이름에 '임금 황(皇)' 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왕실의 복을 빌던 국가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29세에 이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인 의상의 출발점이 바로 이 탑이 서 있는 자리인 셈이다.
1942년 수리 당시 사리함 안에서는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순금 불상 두 구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동사리외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신라 역사와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금석문 중 하나이다.
사방에 칸을 질러 1행에 20자씩, 총 18행 99자의 해서체 글씨를 새겨 넣었으며, 신라 왕실의 상장례 풍습과 탑의 정확한 조성 경위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夫聖人垂拱處濁世而育蒼生, 至德無爲應閻浮而濟群有.
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大后 孝照大王 奉爲宗廟聖靈 禪院伽藍 建立三層石塔.
대저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사바세계(염부제)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께서는 오계로 세상에 응하시고 십선으로 백성을 다스려 다스림이 안정되고 공을 이루시더니, 천수 3년 임진년(692년) 7월 2일 하늘로 오르셨다(승하하셨다).
이에 신목태후와 효소대왕이 종묘의 성령을 받들기 위해 선원가람(황복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효소왕대 기록>
聖德大王 ... 景龍元年丙午五月三十日 卽以此塔 二層之上 納安 佛舍利四箇 施純金彌勒像一軀 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
성덕대왕께서는... 경룡 원년 병오년(706년) 5월 30일에 곧 이 탑의 2층 위에 부처님 사리 4과와 순금 미륵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였다.
<성덕왕 대 기록>
이 명문은 삼대에 걸친 왕실의 내력과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고 있다.
신라 중대 왕실의 핵심인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과 그들의 승하·즉위 시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692년에 탑의 건립이 시작되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이 추가로 안치되면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또 최초기의 다라니경 신앙을 확인하게 해준다.
성덕왕이 706년에 탑 속에 넣었다고 기록한『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탑을 지어 재앙을 막고 수명을 늘린다는 내용을 담은 불경이다. 당나라에서 이 경전이 번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왕실에 곧바로 유입되어 국가적인 탑 건립(불사)에 반영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정밀 판독 결과, 명문 중 기존에 '종묘(廟)'로 읽히기도 했던 글자가 '조(厝, 가매장할 조)'의 이체자로 확인되면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곧바로 왕릉에 묻힌 것이 아니라, 황복사 경내에 약 1년간 임시로 가매장(조장)해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왕을 가매장했던 신성한 자리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효소왕과 신목태후가 이 삼층석탑을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조장(厝葬)'이라는 신라 왕실의 가매장 풍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조장(厝葬)은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무덤(왕릉)에 묻는 것이 아니라, 시신이나 관을 지상 혹은 임시 공간에 일정 기간 안치(가매장)해 두는 풍습이다.
황복사지 사리함 명문에 따르면, 신문왕은 692년 7월에 승하했는데 이 탑은 693년에 세워진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약 1년 동안 황복사 어딘가에 그의 시신(또는 관)을 임시로 모셔두었던 것이다.
왜 신라 왕실은 곧바로 묻지 않고 '조장'을 했을까?
먼저 거대한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을 지을 시간 벌기위함이다.
신라 중대의 왕릉들은 거대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흙을 쌓아 올리는 대공사였다. 왕이 살아있을 때 무덤을 미리 만들어두는 수릉(壽陵) 제도가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승하 직후 서거 소식을 전하고 국장을 치르면서 동시에 왕릉을 완공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왕릉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 안치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로 불교적 '빈소'이자 국가 사찰의 역할이다.
왕이 승하하면 불교식 선종(善終) 의례와 복을 빌어주는 재(齋)를 올려야 했다. 신라 왕실은 국가 사찰이자 왕실 원찰인 황복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
즉, 황복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왕이 숨진 뒤 저승으로 가기 전 국장(國葬) 의례를 치르던 '왕실 전용 빈소'였던 셈이다.
임시 안치(조장) 기간이 끝나고 신문왕의 시신이 마침내 진짜 왕릉으로 이장되자, 신목태후와 효소왕은 왕의 시신이 머물렀던 그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를 그냥 비워둘 수 없었다.
"이곳에 아버님이 머무셨다."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가매장 장소 바로 그 자리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운 것이다. 삼층석탑은 빈 자리에 남겨진 기념비였던 것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빈장(殯葬)이나 조장(厝葬) 풍습은 단순히 '왕릉 만드는 물리적 시간'만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사회 속에서 외교적 프로토콜(의례)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 확보가 아주 큰 목적이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 왜(일본), 그리고 발해 등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라 왕이 승하하면, 신라 사신이 배를 타고 당나라 수도(장안성)까지 가거나 바다를 건너 왜에 서거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 이동에만 최소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다. 상보(서거 소식)를 전하기 의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거 소식을 들은 외국 조정에서 조문 사절단을 구성하고, 그 사절단이 다시 신라 서라벌(경주)까지 찾아오는 데 또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만약 왕이 숨졌다고 해서 며칠 만에 정식으로 매장(본장)을 해버리면, 외국 사절단이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다 끝나고 흙무덤만 남은 상황이 된다. 이는 국제 외교상 있을 수 없는 결례이자 낭비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전임 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애(告哀)와, 새로운 왕의 즉위를 공인받는 책봉(冊封)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핵심 외교 절차였다.
외국(특히 당나라) 사절단은 단순히 상복을 입고 우는 조문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의 조서(애도문)를 가지고 와서 전임 왕의 영전(빈소)에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새로 즉위한 신왕(예: 효소왕)에게 정식 왕위를 인정하는 책봉 문서를 전달했다.
따라서 전임 왕의 시신(또는 관)이 빈소에 온전히 모셔져 있는 상태에서 이 국제적인 의례를 치러야만 권력 이양의 정통성이 완벽해졌다. 빈장이 길었던 이유는 외국 사절단이 전임 왕의 관 앞에서 정식으로 조문하고, 새 왕을 공인하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기간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나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신라 왕이 승하했을 때 당나라 황제가 조문 사절을 보내 대대적으로 애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단골로 등장한다.
고구려나 백제가 '3년상'을 치르며 빈소를 오래 유지했던 것도 요동이나 남중국, 왜 등 사방에서 오는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넉넉한 시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 역시 비록 기간은 1년 정도로 비교적 짧았지만, 이 1년이라는 시간은 당나라나 왜의 사절단이 왕복하기에 가장 현실적이고 타당한 외교적 골든타임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효소왕이 즉위한 첫해(692년) 조에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조제)하고 책봉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唐 則天 遣使吊祭, 仍冊王爲 新羅王 輔國大將軍 行左豹韜衛大將軍 鷄林州都督.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이어 왕을 책봉하여 '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
선왕(신문왕)의 서거에 대해 당나라 황제 차원에서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주었고, 아버지 신문왕이 가졌던 관작을 승계하여, 정2품 관작인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및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衛大將軍),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임명한 것이다.
중국 사서인 《구당서》舊唐書 신라전에도 신문왕 서거 이후 측천무후가 조문 사절과 책봉 조서를 보낸 정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天授三年 神文卒, 其子理洪爲新羅王. 則天遣使吊祭, 冊立爲新羅王, 繼襲爵位.
천수 3년(692년) 신문왕이 죽고, 그 아들 이홍(理洪, 효소왕)이 신라왕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준 뒤, 책봉하여 신라왕으로 삼고 벼슬과 위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문왕 서거 후 신라가 중국에 부고(告哀)를 보내자, 측천무후가 조문 사절(弔祭使)을 보내 선왕의 넋을 달래고 새 왕을 정식 책봉하는 대외 상례 절차가 원활히 수행되었다.
효소왕은 즉위 당시 약 6세(만 5세)에 불과한 매우 어린 나이였다. 측천무후가 즉시 조문 사절을 파견하고 선왕의 관작을 그대로 승계하여 책봉해 줌으로써, 어린 효소왕의 왕위 계승에 대한 대외적 정통성이 확고해졌다.
황복사라는 공간은 신문왕 개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적 공간이자, 왕릉 완공을 기다리는 건축적 유예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멀리 해외에서 온 외교 사절들이 전임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던 '국제적인 외교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례의례는 비단 신라만의 풍습이 아니라 이웃나라인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백제 왕실의 장례 문화는 문헌 기록이 극히 적어 오랜 기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무령왕릉 지석(誌石)의 발굴과 공주 정지산 유적의 발견을 통해 백제가 왕과 왕비의 상례(喪禮)를 어떻게 치렀는지 구체적인 시말이 밝혀졌다.
백제 무령왕의 장례과정을 보면 3년상을 치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에 자세히 나와 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가 되는 계묘년(癸卯年, 523년)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乙巳年, 525년) 8월 (계유일이 초하루인데)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大墓)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릉 지석>
錢一万文. 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돈 1만 매 이상 1건. 을사년(乙巳年, 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상기의 금액으로 매주(賣主)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상하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신지(申地)를 매입해서 능묘(陵墓)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확한 증험으로 삼는다. 부종율령(주문이므로 해석하지 않음. 또는 모든 율령(律令)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령왕릉 매지권>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병오년(丙午年, 526년) 12월 백제국 왕대비(王大妃)가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유지(酉地)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己酉年, 529년) 계미(癸未)일이 초하루인 2월의 갑오(甲午)일인 12일에 다시 대묘(大墓)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무령왕릉 출토 지석에는 왕과 왕비의 승하 일자와 장지(대묘)에 안치된 날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은 523년(계묘년)에 승하하고 5월525년(을사년) 8월에 안장되었고, 왕비는 526년(병오년) 12월에 승하한 후529년(기유년) 2월에 대묘에 안장되었다.
이 기록은 백제 왕실이 약 27개월에 달하는 '3년상'을 치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왕이 서거한 후 곧바로 무덤에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안치 장소인 빈전(殯殿)에 시신을 모시고 오랫동안 추모하며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
지석과 장례 절차 속에는 백제 사회의 복합적인 내세관과 사상이 담겨 있다.
지석 뒷면에는 토지신(토왕)에게 돈(수전 10,000문)을 주고 묘자리를 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매지권(買地券)인데 도교의 영향으로, 사후 세계에서도 합법적으로 땅을 소유하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방위를 표시하는 간지 표현과 오행 사상이 반영되어 있어, 당시 백제 왕실이 장지를 정할 때 풍수지리적 개념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3년상을 치르는 정밀한 상례 체계는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유교적 예법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무령왕릉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금강변의 정지산 유적은 바로 이 빈전 의례가 실제로 행해졌던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지 내부에서 기와, 얼음 보관용 얼음창고(빙고)로 추정되는 구덩이, 의례용 토기(삼족오기 등)가 다수 출토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토기 양식이 무령왕릉 출토품과 일치하며, 지석에 기록된 왕비의 빈전 기간(526~529년)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강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대지 위에 대형 목조 건물을 세우고, 여름철 시신 부패를 막기 위해 빙고를 활용하며 약 2년 동안 왕비의 시신을 모셨던 공간이다.
무령왕릉 지석과 정지산 유적은 백제가 국왕 승하 후 빈전에서 약 2년간의 3년상을 치른 뒤 왕릉에 안장하는 철저하고 격식을 갖춘 장례 체계를 운영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무령왕릉 지석과 정지산 유적이 보여주는 약 27개월간의 장례 기간(3년상) 역시 대외 관계 및 외교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아시아 고대 국가에서 왕의 장례를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길게 치른 이유에는 정치·유교적 명분뿐만 아니라 '외교적 필요성'이 핵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에서도 이러한 외교적 맥락을 몇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6세기 백제는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와 매우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 왕이 서거하면 바다 건너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고(訃告)를 알리고, 양나라 황제로부터 추증(시호나 관작)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서해를 건너 항해하는 외교 여정은 왕복에만 최소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황제의 조문 사신이나 책봉 사절단이 백제 웅진(공주)에 도달할 때까지 장례 절차를 일정 부분 유지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빈전(정지산 유적 등)에 시신을 오랫동안 모셔두는 것은 동맹국과 주변국에서 왕래하는 사신들이 정식으로 추모할 수 있는 국가적 외교 의례의 기간을 확보해 주었다.
왕의 사망은 국가적 위기이자 주변국(고구려, 신라 등)이 정세를 주시하는 민감한 시기였다.
긴 빈전 기간을 거치면서 내부적으로는 왕위 계승(성왕의 즉위)을 안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동맹국들에 "백제가 흔들림 없이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二年, 梁高祖詔冊王, 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 綏東將軍 百濟王”
(2년, 양나라 고조[무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2년조>
이 기록은 백제 왕실이 3년상(약 27개월)을 치르는 도중(빈전 기간)에 중국 남조(양나라)와의 외교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서거한 후, 성왕은 백제 사신을 양나라에 파견하여 부왕의 상(喪)을 알렸다.
양나라는 이를 접수한 뒤 524년(성왕 2년) 성왕에게 수동장군 백제왕이라는 관작을 내리는 조서를 보내어 정식으로 새 왕의 지위를 승인(책봉)했다
무령왕은 523년 5월 승하하여 27개월 뒤인 525년 8월에 비로소 무령왕릉(대묘)에 안장되었다.
즉, 양나라의 책봉(524년)은 무령왕의 시신이 빈전에 안치되어 있던 3년상 기간 중에 완료된 것이다.
빈전(殯殿) 기간과의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중국으로부터 정식 관작과 추증, 조문 메시지를 받아 국가적·외교적 예우를 완성한 뒤, 비로소 이듬해(525년 8월)에 왕을 장지(대묘)로 모시는 정식 하관 및 매장 의식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 사후 고구려가 패수(浿水) 지역을 침입하는 등 정세가 어수선했으나, 성왕은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양나라로부터 정식 책봉을 받아 대내외에 정통성을 확립했다.
결국 《삼국사기》 성왕 2년의 책봉 기록은 백제가 2년에 걸친 긴 빈전 기간을 가지며 중국 남조와의 시차를 극복하고 조문 사절 및 책봉 조서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외교적 장례 절차를 밟았음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 자료이다.
백제는 당시 일본(왜)과 매우 깊은 정치·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백제 왕족들이 왜에 파견되거나 왕래하는 일이 빈번했다.
백제 왕의 서거는 왜 왕실에도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왜에서 조문 사절단(애도 사절)을 보내오고 백제의 정세 변화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수적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무령왕의 서거와 관련하여 백제 원전(백제본기)을 인용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내부 기록이나 중국 사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왜(일본)와의 장례 관련 교류 정황을 《일본서기》와 실제 출토된 고고학 유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 계체천황(繼體天皇) 17년(서기 523년) 기록에는 당시 백제에서 왜국으로 전해진《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하여 무령왕의 서거 소식을 전하고 있다.
“夏五月 丙戌朔 壬辰 百濟國王 崩.”
(여름 5월 병술 초하루 임진일(5월 7일)에 백제 국왕이 서거하였다.)
“百濟本記 云 癸卯年 五月 崩豫.”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계묘년(523년) 5월에 붕어하셨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무령왕릉 지석(誌石)에 적힌 "계묘년(523년) 5월 7일 백제 사마왕(무령왕)이 붕어하셨다"라는 문구와 날짜(계묘년 5월 7일 임진일)가 하루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한다.
백제가 무령왕 서거 직후 외교 노선을 통해 왜국에 부고(訃告)를 신속히 전달했으며, 왜국 역시 이를 공식 사서에 기록해 둘 만큼 무령왕의 사망을 중대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 기록 외에도, 무령왕의 장례와 왜의 밀접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물증이 바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목관(관재)이다.
일본 특산종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신 목관은 한반도나 중국산 소나무가 아닌, 일본 열도(남부 규슈·본토)에서만 자라는 최고급 나무인 '금송(金松, 가우야마키)'으로 만들어졌다.
왜 왕실이 백제 무령왕의 국장(國葬)을 위해 최고급 금송 원목을 백제로 보내왔거나, 백제가 왜국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왕실 전용 장례용 목재로 수입해 모셔 두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백제본기 인용)를 통해 무령왕의 서거 일자가 신속히 전달되고 기록되어, 왜국 차원에서도 백제 왕의 국장을 주요 외교 사건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무령왕의 관으로 사용된 '금송'은 약 27개월간 치러진 빈전 및 장례 과정에서 백제와 왜 사이에 왕실 수준의 깊은 장례 외교물자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직접 증명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