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치 유키노리 <武智幸德>
日本經濟新聞社 운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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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세계 무대에서 일본 축구가 경악할 만큼 급성장을 기록하는 동안 한국 축구는 잔뜩 졸아들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한국 축구의 한계는 무엇이며 그 돌파구는 어디 있는가. 10여년 동안 한국 축구를 관찰해 온 일본 축구전문기자의 칼날 분석, 독설 비판.
한국 축구에 대해 일본인 기자는 어떻게 보는가? 가능한 한 엄격하게 써 달라는 주문을 받으면서 솔직하게 말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두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이면서도 사실 상대방 나라의 축구에 오랫동안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온 일본과 한국이지만, 2002년 월드컵을 공동개최하게 된 마당에 ‘파트너’에게 마냥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원고 의뢰도 그처럼 ‘관심이 높아가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일본 축구의 성장일 것이다. 앞서 1993년 J리그가 출범한 이후 일본 축구가 급속한 성장을 거두고, 그 결과 일본과 한국 축구의 실력 차이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이런 원고 의뢰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옛날처럼 한국이 압도적으로 일본 축구에 강한 시대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면 새삼스럽게 한국에서 ‘일본인 축구기자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일 같은 것은 생각조차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월간중앙”의 원고 의뢰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 축구를 자신들과 대등한 것으로 인정한 어떤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 한국 축구에 대해 필자가 어떤 감상(感想)을 갖고 있는가를 써나가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은 점이 있다.
필자가 여기서 쓰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필자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그대로 ‘일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한다든가, ‘일본인의 대표적인 생각’이라고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특히 내가 무슨 일본인 대표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내에서도 필자는 축구를 보는 시각에서 꽤 ‘이단’(異端)이라는 것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미리 고백한다.
여기에 덧붙여 축구가 성(盛)한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여전히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이다. 줄곧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만큼 일본 프로야구에서, 가령 거인(巨人)팀이나 한신(阪神)팀 등 인기 팀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반면 축구쪽은 그렇지 않다. 가령 일본과 한국의 축구에 대해 현재와 과거를 대비시켜 가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한국 축구에 대해 “옛날에는 일본보다 강했지만 지금은 일본과 호각세인 것 같다”고 말하는 정도의 막연한 감상을 품고 있을 뿐이다.
한 예로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차범근 감독이 과거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가에 대해 일본인 대다수는 잘 알지 못했다. 1980년대에 일본 대표팀을 강하게 만들었던 모리(森孝慈) 전 대표팀 감독의 이름은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알려졌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축구에 대한 일본인의 전반적인 지식량(知識量)이 늘어난 것은 1983년 J리그가 생겨난 이후의 일이다.
또 한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일본인 중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한국 축구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필자이지만 그 지식은 결코 많지 않다는 점이다.(한국의) 축구 경기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국가대표팀의 시합들 뿐이다.
그래서 십중팔구 한국 축구에 대해 ‘눈에 확 띄는 오해’나 틀리게 말하는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과연 필자가 이 원고를 쓰는 데 적임자인가 스스로 의심스럽다. 그래도 그러한 오해나 오류까지 받아줘 ‘그래도 좋다. 일본인 중에는 이런 식으로 우리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한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961년생인 필자가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2세 때,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다. 1974년 서독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거기서 서독의 축구황제 프란츠 베켄바워, 네덜란드의 슈퍼스타 요한 크루이프의 묘기에 감동했고 이후 축구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서독의 명문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팀이 일본을 방문했다. 베켄바워와 ‘폭격기’란 별명의 게르트 뮬러가 포함된 뮌헨팀은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국립경기장에서 두차례 친선시합을 가졌다. 결과는 0대1로 일본팀의 패배였지만, 어찌됐든 월드컵에서 우승한 서독 대표팀의 정규 멤버가 여러명 포진한 명문팀에 적은 점수 차이로 진 것이었으므로 ‘일본 축구도 만만치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순진무구한 중학생의 감상(感想)이었다.
그런 순진한 환상을 단박에 깨뜨려버린 것이 바로 한국 대표팀이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 그러니까 1976년 3월 도쿄(東京)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전이었다. 텔레비전에 들러붙어 관전했던 이 시합이 필자로서는 ‘강력한 한국 축구’를 처음 접해본 계기였다.
일본 대표팀에는 가마모토(釜本邦茂·현재 참의원 의원) 선수가 있었다. 미드필드의 컨트롤타워는 모리(森孝慈·전 일본 대표팀 감독) 선수. 지금 생각해 봐도 일본도 결코 약한 팀이 아니었지만 한국은 그 이상으로 강했다.
젊은 에이스 차범근 선수는 사이토(齊藤和夫) 선수가 방어했지만 차선수 말고도 다른 선수들도 강하고 늠름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진국 선수의 멋진 플레이였다. 일본은 이날 한국의 이영무·박상인 선수에게 골을 허용해 0대2로 완패했다. 올림픽으로 나가는 문이 덜컥 닫혔고 필자는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이후 ‘한국 콤플렉스’를 계속 안게 된, 우울한 출발점이 된 시합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예선 2차전에서는 일본의 가마모토 선수가 시합 종료 직전 호쾌한 왼발 발리슛으로 득점해 두 팀은 비겼다. 가마모토의 슈팅은 어린 가슴을 뒤흔들었지만, 시합 내용은 한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도쿄에서의 1차전 때보다 더 한국의 강력함을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하게 됐다.
일본 축구가 ‘한국 콤플렉스’를 벗어나기까지
1980년대에 들어 ‘일본은 한국에 당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1986년의 아시안게임, 1988년의 서울올림픽이라는 두가지 빅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게 된 한국은 거국적으로 스포츠를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축구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내에서의 리그전보다 대표팀을 강화하는 일정을 우선시하고 집중적으로 팀을 단련시켜 나갔다. 일본에는 이겨도, 어찌된 일인지 다른 나라들에 가로막혀 그동안 올림픽이나 월드컵 본선 등에 진출하지 못했던 한국이 드디어 세계 무대를 밟게 됐다. 월드컵에도 출전하고 올림픽에도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한국이 계속 살려나가면서 일본과의 차이는 더더욱 벌어졌다고 생각된다.
(일본과 한국이 더더욱 벌어진) 분기점은 1985년 10월의 멕시코 월드컵을 앞둔 아시아 예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본은 가토(加藤久)·기무라(木村和司) 등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승부욕이나 투혼 같은 점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한국에 뒤떨어지는 듯했다. 일본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호시탐탐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전술적 안목, 찬스가 나면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집중력 등 어느 것을 보더라도 한국이 한수 위였다.
1980년에 일본보다 앞서 프로 슈퍼리그를 만들고 거기에다 국가적인 지원까지 작용해 한국의 플레이는 일본보다 ‘무게’있어 보였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팀의 플레이는 어딘지 모르게 ‘가벼운’ 것이었다.
일본이라는 문을 빠져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와 싸우고, 불가리아와 비기고 지난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와 2대3의 대접전을 연출했다. 특히 이탈리아전에서 최순호 선수가 페인트 모션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이탈리아 중앙지역으로 돌진해 쏘았던 오른발 슈팅에 필자는 정말 놀라버렸다. 아시아의 마지막 티켓을 놓고 일본과 싸웠던 한국이 월드컵 무대에서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던 데 대해 나는 솔직히 감동했다. 그러면서 ‘일본도 잘 하면 할 수 있다’고 고무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월드컵이라는 ‘아수라장’을 몸으로 경험한 한국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자신감을 갖게 됐다. 세계 무대를 밟아본 마당에 더이상 아시아 무대에 머무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상대가 일본이라면, 완전히 내려다보면서 시합에 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본이 여지없이 패퇴했던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결승에서 누르고 우승했다. 한국이 예선을 치르지 않고도 출전 기회를 얻었던 (개최국이었으므로) 서울올림픽 때도, 일본은 끝까지 간 끝에 중국에 패해 처음 큰 무대를 밟을 기회를 놓쳐 버렸다. 멕시코 월드컵,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이탈리아 월드컵이라고 하는 크나큰 축구 무대에 계속 올랐던 한국과 예선탈락만을 되풀이해야 했던 일본간에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잊을 수도 없는, 1988년 10월 도쿄에서의 한·일 정기전. 이날 경기 결과는 최순호가 얻은 1점으로 한국이 1대0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틀림없는 한국의 완패였다. 당시 한국 대표팀의 김정남 감독은 경기 전 “올림픽 예선에서 한국팀이 보였던 부진을 떨쳐버리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작 시합이 열리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팀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격렬함’을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에 깊은 회한을 갖고 있는 일본팀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고 ‘일본팀 마음대로 놀게 하였다’는 느낌을 주었다. 일본의 스모(大相撲·씨름)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을 빌린다면 실로 ‘가슴을 빌려주고 있다’(힘이 우위인 쪽이 오히려 약한 쪽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고 할 만했다. 시합이 끝난 뒤 일본의 요코야마(橫山謙三) 감독은 “한국을 쫓아가는 데 앞으로 1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코야마 감독은 1991년 7월, 나가사키(長崎)에서 벌어진 한·일 정기전을 끝으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년이면 한국을 따라잡는다”라고 ‘공약’한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무렵의 일본 대표팀에는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라모스(ラモス 瑠偉), 브라질에서 축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미우라 카즈(三浦知良) 같은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일본 축구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국팀과 마주하면 마치 ‘남의 집에서 빌려다 놓은 고양이’처럼 ‘온순’해지기 일쑤였다. 1991년 7월의 한·일 정기전에서도 일본팀은 한국의 하석주 선수에게 득점을 허용해 0대1로 패배했다. 한국과의 전력(戰歷)에서 연속 6연패였다. 일본에는 무력감이 팽배했다.
‘克韓’의 두 계기, 외국인 감독 영입과 J리그 출범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이길 수 없다.’ 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든 계기는 1992년 일본 대표팀 감독에 한스 오프트가 취임하고, 그해 가을에 열린 야마자키-나비스코컵 대회를 계기로 하여 이듬해 프로 J리그가 스타트한 것이었다.
오프트 감독이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다이내스티컵 대회가 열렸다. 그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한국을 누르고 우승했다. 비록 승부차기를 거쳐 따낸 우승이었지만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한국을 누르고 우승했다는 사실이, 일본 축구계에는 그때까지 어두침침하게 구름이 잔뜩 덮고 있던 하늘에 맑은 틈이 보이는 듯한 기분을 갖게 했다. 더욱이 같은 시기인 1992년 가을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린 아시아컵 대회에서 일본은 결승에 올라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또한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 한국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얻은 ‘아시아 챔피언’이라는 칭호는 일본 축구에 커다란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일본이 한국과의 역학관계 변천 과정에서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되는 시합을 벌인 것은 1993년 10월. 중동의 카타르 도하에서 있었던 미국 월드컵 예선이다.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은 한국에 1대0으로 쾌승(快勝)을 거둔다.
이때의 승리는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의의가 있다. 친선시합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월드컵 티켓을 걸어놓은 한일간 진검승부(眞劍勝負)에서의 승리였다. 단지 스코어 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에서도 일본은 한국을 압도했다. 그러면서 파워와 스피드를 갖춘 한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재빠른 판단력이나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말하자면 일본이 지향해야 할 축구의 ‘방향성’을 스스로 조금씩 조금씩 얻어냈다는 희열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한국팀에도 문제는 있었을 것이다. 월드컵 예선을 치르기 전에 유럽에서 가졌던 장기간의 합숙훈련과 도하의 뜨거운 기온 등이 상승작용해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선수들의 컨디션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김주성 선수의 플레이가 정교하지 못했던 것은 일본에 큰 도움이 됐고, 포워드(FW) 황선홍이 결장(缺場)했다든지 파워풀(powerful)한 고정운 선수를 포워드가 아닌 윙백(Wing-Back)으로 기용한 것 등도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좀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도의 문제라면, 한국이 시합에서 이기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전이 벌어질 때 시합을 앞두고 ‘숙적’이라든지‘인연의 대결’이라는 말이 매스컴의 틀에 박힌 문구처럼 사용돼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국 축구를 ‘라이벌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한국 쪽이 일본보다 훨씬 강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도하에서의 시합은 한가지 사실을 보여주였다. 즉, 일본과 한국은 어느 한쪽 선수들의 심신(心身) 컨디션이 나쁘거나 주력선수들이 부조화(不調和)할 경우나 베스트 멤버가 아니라면, 그것이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참으로 양쪽의 힘이 팽팽하게 길항(拮抗·서로 버티고 대항함)하는 ‘진정한 라이벌’이 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한국전 다음의 대(對)이라크전에서 비겨 월드컵 출전권을 다시 한국에 빼앗겨야 했다. 그 충격과 절망은 깊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한국 축구에 대한 콤플렉스를 적잖이 지워버릴 수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진정한 호적수가 된 일본은 이후 자기만의 축구 색깔을 농후하게 만들고, 나아가 일본과 한국의 ‘대조의 묘(妙)’라는 것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한 한국과 일본의 대조를 필자는 ‘일본은 아시아의 프랑스, 한국은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프랑스, 한국은 아시아의 독일
축구팬이라면 잘 알고 있듯 프랑스와 독일도 유럽대륙에서 국경을 접한 이웃나라이지만, 그 축구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프랑스는 1980년대에 미셸 플라티니·알란 질레스·장 티가나, 1998년에 프랑스 월드컵을 차지하게 한 지네딘 지단 등 전통적으로 미드필드(mid-field·中盤)에서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해왔다. 이른바 재능있는 미드필더들이 길고 짧은 패스를 절묘하게 주고받으면서 상대편 골지역으로 접근해 간다.
반면 독일은 미드필더보다 뛰어난 리베로(libero·포지션이 일정하게 지정되지 않고 경기장 全域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선수)나 포워드를 배출해왔다. 1970년대의 슈퍼 스타인 프란츠 베켄바워는 리베로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고, 1990년 월드컵에서 서독팀이 우승할 때 주장이었던 로타 마테우스도 유명한 미드필더이면서 나중에는 리베로로 전환했다. 또 적의 골문을 위협하는 포워드에는 위르겐 클린스만·올리버 비어호프 등 장신의 스트라이커가 있고, 적진의 양쪽 사이드를 파고 드는 윙백에는 안드레아스 브뢰메 같은 명선수가 존재한다.
독일 축구는 바로 그러한 ‘포지션의 특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구성되고 이뤄진다. 말하자면 미드필드에서 세밀한 패스를 엮어가면서 적진을 뚫고들어가기보다 길고 강력한 크로스 패스(cross-passing)를 양쪽 사이드 간에 주고받으면서(side change) 스피디한 윙백이 돌파를 시도해 적진 가운데에서 웅크리고 있는 장신의 포워드에게 정확한 센터링을 띄운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 축구의 개성 차이는 그대로 일본과 한국의 축구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일본 축구의 강점은 미드필드에 있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이탈리아에 건너가 AS로마팀에서 활약중인 나카다(中田英壽)라든가 베네치아팀의 이나미(名波浩)는 뛰어난 미드필더들이다. 그들에 이어 재능을 인정받은 오노(小野伸二·J리그의 우라와 렛츠팀)·나카무라(中村俊輔·요코하마 F 마린즈팀)·이나모토(稻本潤一·G오사카팀)도 미드필드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이다. 일본이 한국을 따라잡는 원동력이 돼 주었던 라모스도 수비수들 사이 사이를 뚫는 스루패스(thru-passing)와 (게임 전체를 리드하는) 전술적 안목을 무기로 가진 ‘미드필드의 창조주’였다.
미드필드에서의 능력이 뛰어난 덕분에 일본 축구의 공격력 역시 필연적으로 미드필드에서의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창의성)를 살린 것이 된다. 말하자면 (정교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상대 진영의 밸런스를 무너뜨린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것은 잘 이뤄지면 화려한 반면 골 문전에서의 ‘결정력’에는 어떤 아쉬움도 있다. 자칫하면 그러한 스타일의 축구는 골을 얻는 데 시간이나 노력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결함을 갖고 있다는 느낌도 갖게 한다.
한국 축구는, 일본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역점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한국팀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독일의 그것처럼) 리베로·윙백·그리고 포워드라는 느낌이다.
일본은 오프트 감독 이후 누가 대표팀 감독이 되든 최종 디펜스 라인(수비선)이 플래트(횡으로 一字型)한 형태를 취해 왔다. 그러나 한국은 스리 백(three backs· 센터-라이트-레프트 3명의 수비수) 가운데 리베로(중앙 수비수)의 위치가 항상 뒤쪽으로(자기 골쪽으로) 쑥 깊다. 그 리베로인 홍명보가 자기 진영의 최후미로부터 공을 잡고 공격으로 나오는 모습은 과거의 베켄바워나 마티아스 잠머·마테우스 등 역대 독일 팀의 리베로들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윙백인 하석주·구상범·강철 등의 이름이 줄줄 떠오르는 것도 한국팀의 특징인 스피드가 바로 이 포지션의 선수들에게서 잘 표현되고, 그만큼 인상이 깊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워드도 차범근 ·최순호·최용수·이동국 등 부러워할 만한 대형 스트라이커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선수들 모두 신체가 크고 판단력이 깊다. 거기에다 일본의 대형 포워드들은 갖고 있지 않은 유연함도 겸비해 미우라·카즈 이후 스트라이커 부족에 고민하는 일본으로서는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축구를 전개하는 스타일도 일본과는 그 취향이 다르다.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으면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톱선수에게 공급한다. 포스트 플레이로 뿌려진 공을 미드필드의 선수가 재빨리 사이드로 전개한다. 경기장의 양쪽 사이드에는 발빠른 선수가 포진돼 있고 이들은 사이드 라인을 따라 적진을 돌파하여 센터링을 올린다. 아기자기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들어가는 일본의 곡선적인 공격에 비교하면 훨씬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거기에서 일본에는 없는 강력함을 느끼는 반면 단조로움에 빠져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느낌도 있다. 포워드를 뒷받침하면서 공격에 변화를 만들어가는 기교파 선수를(미드 필드에) 두면, 팀 전체의 플레이가 더더욱 두터워지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필자는 지난해 J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른 황선홍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서 ‘이 선수가 일본인이었다면’하고 몇번이나 생각해 보았다. 일본이 자랑하는 미드필더와 한국이 자랑하는 포워드가 손을 잡으면 정말 좋은 팀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 미드필더에 의한 곡선 축구 한국, 윙백과 포워드의 직선 축구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런 축구 개성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왜 일본은 미드필더 쪽에 재능이 있고 한국은 포워드나 리베로 쪽에 재능이 있는 것일까? 일본의 경우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일본의 축구 지도자들은 각기 자신이 지도하는 팀에 훌륭한 소질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그 선수를 등번호 10번, 말하자면 공격적인 미드필더로 키우려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 포워드로 발탁되는 선수들은 소질이 그 다음 레벨에 속하는 이들이다. 일본에서는 신장이 185cm를 넘는, 좋은 체격과 운동능력을 갖춘 재목(材木)이 대부분 프로야구 쪽으로 흘러가는 실정이다. 한국처럼 유연성과 강인함을 겸비한 대형 포워드가 좀처럼 나오기 어렵다.
한국은 어떨까? 이런 점에서 추측해 본다면 한국에서는 축구에 뛰어난 소질을 가진 어린이가 있다면 그를 미드필더보다 포워드로 키우려는 지도자가 많은 것 같다. 뛰어난 공격수, 골잡이를 키워내려는 지도자가 많아지고 또 실제로 그 포지션에 ‘인재’들이 포진하면 그런 포워드를 막아내기 위해 디펜스 쪽에도 강한 선수가 길러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디펜스가 일본의 디펜스에 비교해 아주 거칠고 강력한 방어태세를 무기로 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축구에 소질있는 어린이를 포워드로 키우려 할까? 내 나름대로의 상상이지만 중학교나 고교, 그리고 대학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직업적인 축구 코치들이 자신들의 우수함을 증명하고 ‘살아남기’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코치나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길이 눈 앞에 닥친 시합이나 대회에서 이기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축구 선수 하나가 완성되는 시기를 20세 전후로 본다. 그때까지는 공에 대한 감각을 기르거나 판단력을 갈고 닦는 데 많은 훈련시간을 투자한다. 중학교나 고교의 선수권대회 등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선수를 어떻게 대성(大成)시킬 것인가도 지도자의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의 중·고교와 대학의 코치는 학교의 교원(敎員)이 본업이다. 따라서 어떤 대회나 경기의 성적부진을 이유로 (축구코치에서) 해임되는 일이 없다. 한국과 같은 프로(직업적인 코치)의 엄격함에 직면할 일이 없는 까닭에 한국의 지도자들에 비해 여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에 비해 한국은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항상 자신의 우수성을 계속 증명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상급학교에 진학해 축구를 계속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축구로 이름난 학교의 축구부는 소수정예의 ‘잘 하는 선수들’로 운영돼 일본처럼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축구부에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사정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다.
또 일본의 경우 선수를 길러내는 과정이 학교뿐만 아니라 J리그 각 프로구단 산하의 (유소년·청소년)클럽도 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런 여러 가지 길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길을 고를 수 있다. 또 가령 어느 한 곳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다른 데서 ‘패자부활’의 가능성을 남겨 놓고 있다. 현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팀의 포워드 구보(久保) 선수는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혀 무명의 선수였다. 그러나 스카우트 담당자의 눈에 띄어 히로시마팀에 들어갔고, 지금은 일본 대표선수로 선발될 정도의 선수가 됐다.
그러나 그런 ‘패자부활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선수들의 생존경쟁이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나 선수가 ‘승리지상주의’로 내닫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축구선수의 우수성이라는 것은 결국 승리에 직결되는 능력, 말하자면 골을 잘 터뜨리고(포워드) 한편으로는 잘 막아내는(디펜스) 능력에 집약된다. 한국 선수들의 강한 승부욕, 하나하나의 플레이에서의 집념은 그러한 환경이 길러내는 것 같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강하고 미드필더가 약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와 함께 한국 축구가 직선적인 것은 정비되지 못한 그라운드에도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일본에서는 J리그 발족 후 톱 클래스 선수들의 훈련환경이 대폭 개선됐다. 녹색 잔디가 깨끗하게 정비되어 패스를 주고받을 때 불규칙한 바운드가 생기는 일은 없다. 경기장의 잔디상태도 세계 톱 클래스다. 한국은 어떤가?
그라운드의 정비상태가 나쁘면 다이렉트 패스를 할 경우 미스킥(miss-kicking)이 나올 확률이 아무래도 높아진다. 세밀한 패스를 주고받기 어렵다. 패스를 주고받다 미스패스가 나와 상대방에게 공을 빼앗기고 자멸을 초래하기 쉽다. 이를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공을 띄워 주고받으면서 강하고 긴 패스로 공격하는 게 리스크가 적다. 그러한 발상이 한국 축구로 하여금 더더욱 종(縱)패스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정비되지 않은 연습환경이 한국 축구에서 ‘결정적인 세밀함’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지면 끝장’ 풍토가 한국 축구의 문제
외국인 지도자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방식에서도 일본과 한국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국은 좋게 말해 프라이드가 높을 것이다. 월드컵에 4차례나 연속 출전한 나라이기 때문에 역시 자신들의 축구 방식에 어떤 자신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오픈마인드(open-minded)다. 당장 J리그를 봐도 외국인 감독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도 J리그 1부 감독 16명 가운데 일본인은 겨우 6명에 불과하다. 대표팀 감독도 마찬가지다. 오프트 감독 이후 브라질 출신의 로베르토 펠컨이 대표팀을 맡았고 지금은 프랑스 출신 필립 트루셰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러시아 출신 비쇼베츠 감독을 불러들인 적이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일본이 보여온 ‘외국인 감독 숭배’현상을 보면 그것이 가히 ‘병적’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외국인 지도자에 대해 울타리가 높기만 해서도 곤란할 것이다. 한국이 월드컵의 상시 참가국이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본선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한 실정을 감안한다면 이제 어느 정도 외부의 눈이나 손을 빌리는 것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외국인 감독이 들여온 이론이나 투혼이 일본 축구의 약진에 공헌한 부분은 적지 않다.
일본에서 지금 최고의 선수로 꼽는 이는 이탈리아의 AS로마팀에 소속돼 있는 나카다 선수다. 나카다의 플레이를 보면 일본 선수들이 교본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적잖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 선수들에게도 나카다는 훌륭한 모범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육체적 강인함이다. 육체적 강인함으로 말하자면 일본 선수들보다 역시 한국 선수들이 강하다. 경쟁의 토대가 되는 육체적 강인함은 한국 선수들에게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카다처럼) 전술적 안목이나 판단력을 키우는 쪽에 노력을 기울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본래 그런 스타일의 선수를 키우는 토양은 일본보다 한국 쪽에 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스타일의 선수를 기르기 위해서는 한국의 축구계 전체가 ‘좋은 선수’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 축구가 보존해온 장점을 버리라는 얘기가 아니다. 육체적 강인함이나 승리에의 집념, 거친 투혼 같은 한국 축구의 장점은 이어가면서 재빠른 판단력이나 공격에 액센트와 리듬을 둔 유연성을 선수 개개인이 몸에 붙여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을 위해서는 유년층 선수들에 대한 지도방식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플레이를 할 것인지 코치가 미리 해답을 준다거나 코치의 주문과 다른 플레이를 한 선수를 질책하는 일 없이, 선수 스스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해답을 내기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선수의 자주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본 축구에서도 아직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나카다라는 선수는 ‘신념의 덩어리’‘자기주장의 덩어리’같은 사람으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주변에서 그런 성격의 인간을 받아들이는 도량(度量)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좋은 선수’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라
그렇다면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특징점인 파워축구의 효과를 한껏 활용하여 상대의 팔을 비트는 일이 가능하다. 한국의 반복되는 터프한 공격에 상대방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런 속에서는 웬만큼 거친 플레이도 별로 결함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상대가 세계 열강이라면, 한국이 자랑할만한 파워는 더이상 메리트로 작용하지 않는다. 한국 정도의 파워나 스피드는 세계의 축구 열강 정도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네덜란드 팀에 아무리 힘의 축구로 승부를 내자고 도전한다 해도 이길 수 없다. ‘힘과 힘’에 의한 승부라면 상대쪽이 그야말로 ‘원조’(本家本元)격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국 팀은 월드컵 본선에서 자신들의 장점을 제대로 표출해 보이지도 못한 채 경기를 끝내기 십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한국과 정반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일본이다. 일본 축구는 파워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강한 팀과 ‘힘과 힘’의 승부 같은 것을 해볼 생각이 없다. 오히려 상대의 힘을 잘 이용하면서 조직력이나 기술에서의 승부에 몰두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아시아에서는 통하지만 세계에서는 잘 안 통한다. 아시아에서는 조직력에 바탕한 패스 축구로 충분히 승리하지만 월드컵에 나가면 그렇게 안되는 것이다. 경기 중 이 국면 저 국면의 1대1 상황에서 육체적인 허약함이 어떻게든 드러나, 그토록 자신있다고 여기는 패스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결국 상대의 힘에 압도당해 버리는 것이다. 처음 출전한 프랑스 월드컵에서 일본이 아르헨티나나 크로아티아를 맞아 선전했으면서도 결국 모두 0대1로 패배한 것도 결국 선수 개개인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그런 현실을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일본에 한국의 강인함이, 한국에 일본의 공부(工夫·일본에서는 궁리하고 연구한다는 뜻)가 있다면 어느 나라든 월드컵 본선에서의 1승 목표가 멀지 않을 텐데.’
일본에 건너온 한국 선수들이 J리그에서 보물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들에게는 일본 선수에게 없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1대1에서의(육체적, 정신적) 강인함이다. 고정운도 그러했지만 한국 선수들은 1대1 상황이 되면 과감히 상대 수비수를 제껴내려고 한다. 같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는 수비수를 제껴내려 하기보다 앞으로 패스하려는 쪽으로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축구가 서로 보완해야 할 관계라고 하겠다. 서로 대조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채워넣어야 할 부족한 부분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 한국 축구는 더더욱 온갖 방면에서의 교류를 모색하고 서로의 장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나가는 관계가 돼야 할지 모른다.
J리그·K리그, 다각적 교류 모색할 때
K리그(한국의 프로축구리그)의 선수가 일본의 J리그에 진출해 플레이할 수 있게 됐는데 그런 선수가 일본에서 가지고가는 정보에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귀를 기울였으면 하고 생각한다.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 차원에서의 왕래도 더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양국간 리그를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생각해 볼 점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비행기만 타면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현재 J리그와 K리그는 서로 아무 관계 없이 행해지고 있지만 미국 프로야구의 메이저 리그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간에 교류 시합을 갖듯 서로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리그가 진행되는 시즌 도중에 J와 K가 몇차례든 시합을 갖는 것도 흥미로운 발상이다. 아니면 정규시즌이 끝난 뒤 상위 몇몇팀이 플레이오프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것도 좋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양국간 ‘리그 차원의 교류’가 결여된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한국 축구에 대해 이런저런 주문을 했는데 정직하게 말해 일본 축구도 문제점이 적지 않다. 경제 여건의 악화로(각 구단을 운영하는) 그룹 경영은 괴롭다. 축구장에 관객이 입장하는 것은 여전히 대표팀 시합 위주다. 일그러진 인기다. 축구에 재능을 가진 선수가 배출되는 데도 어떤 주기(周期)가 있어서, 좋은 선수가 탁탁 배출돼 황금시대를 구가할 때가 있으면 반대로 ‘불황기’도 반드시 온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일본 축구는 황금시대를 만난 듯한 기분이 있지만, 그것이 뒤집히는 일은 언제든지 닥쳐올 것이다.
그런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필자는 한국이 일본 축구의 채찍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축구가 낙심했을 때 한국 축구가 원기왕성하게 잘 나간다면 일본에서도 ‘힘내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분기(奮起)하는 분위기가 용솟음칠 것이다. 한국 축구가 원기를 잃으면 일본 축구에서 ‘힘내자’는 기운이 그만큼 떨어질 것이고, 거꾸로 한국도 그럴 것이다.
유럽과 남미의 축구 강국들이 높은 수준의 축구 실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도 독일이나 네덜란드·프랑스·잉글랜드·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인근에 ‘자극적인 관계’의 나라가 존재하는 덕분일 것이다. 고립돼 강해질 수 있는 나라 따위는 없다. 일본도, 한국도 서로 자극하면서 더더욱 축구의 수준을 높이는 쪽으로 발을 맞춰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어쨌든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날 것을 목표로….
글 좋군요 ...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 특히 한국이 종패스를 고집하게 된 이유를 추측하는 글 (경기장,운동장 의 상태) 에서는 정말 손바닥을 딱! 하고 칠 정도 였습니다 ... 다른 나라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정말 ... 저도 그 글을 보고서야 그렇게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는 ^_^;
첫댓글 2000년에쓴거니까 지금 하고 다른게 많음...
너무 길다. ㅡ.,ㅜ
글 좋군요 ...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 특히 한국이 종패스를 고집하게 된 이유를 추측하는 글 (경기장,운동장 의 상태) 에서는 정말 손바닥을 딱! 하고 칠 정도 였습니다 ... 다른 나라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정말 ... 저도 그 글을 보고서야 그렇게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는 ^_^;
잘읽었습니다 ~ 음.. 오래된거긴 한데 괜찮네요
일본기자가 쓴거 치고 괜찮은 글이네여 근데 넘 길어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