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장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부활과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1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부활과 생명'입니다.
주님이 '내가 너희를 부활 시킨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바로 요11:25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시는 점을 특별히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 자체가 생명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부활이 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였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살리는 부활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부활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계속 먹어야 영생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과 생명은 한 세트인 겁니다. 이걸 제대로 파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 꿀같이 단 것은 중생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지식과 정보가 양식이며 힘입니다.
돈이 힘이고, 명품이 힘이며, 좋은 자동차가 힘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아니죠.
그러나 하늘로부터 난 사람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 힘이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성이 그 안에서 '부활과 생명'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떼들에게 구원과 더불어 계속 먹는 양식 곧 생명의 꼴이 됩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로 옮기는 구원이 되시고,
또 그 부활로 살려놓으시고 계속해서 생명의 꼴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우리들이 다시 사는 것이며
그리고 다시 산 자들이 그분의 생명을 받아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적인 신자는 언제나 ‘마지막 때 다시 살리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요11:21절과 같이 언제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타령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옛날 육적인 신자 곧 어린 신자였을 때에 저도 그랬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주님 오늘 제 곁에 계시면서 제 운전을 도와주셔야 됩니다.
사고 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또 제가 졸 때 깨워주셔야 됩니다”이렇게 했지요.
이런 것이 육적인 신자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주님이 안 보이니까 답답하고 힘이 들면 “오늘 같은 날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 손을 한번 잡아주면 좋겠다”하고 나옵니다. 이건 육적인 신앙의 기도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지막에 다시 살 것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요11:25)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 다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합니다. 겨우 주님을 병이나
고치는 분 정도로만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 계셨더라면”하므로
주님이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는 것 같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은 만유이시므로 주님은 어디에든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어린 신자였을 때에 교회에 집중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교회를 멀리 떠나면 주님에 대한 관심이 좀 멀어졌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신자란 증거입니다.
제가 청년 때 다니던 교회를 떠나서 서울에 머물고 있으니까
조금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신앙이 헐렁해지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제재를 덜 받는 것 같아서 편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당시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눈은 교회의 구역장이요.
권사들이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28:20)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 관점에 그분이 안 계시는 것 같을 뿐, 그분은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상태는 사실 죽었는가 살았는가로 분별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도 혼이 떠났다 혼이 들어 왔다에 좌지우지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아오면서 “하나님이 결재하시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는 사람에게 ‘죽어요 죽어’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결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절대로 못 죽습니다.
설령 20층에 떨어진 사람도 하나님이 결재 안하면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재하면 멀쩡하게 걸어가다가 툭 자빠지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잖아요? 물에 빠질 팔자라서 절대 물가에
못가도록 붙들어 놓았더니 나중에는 벽에 물 수(水)자 써놓고 거기에 코를
처박고 죽었답니다. 하나님이 결재하시면 모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들 보면 그 시간까지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시켜,
전부 다 카운터를 하신 다음에 딱 맞는 시간에 결재하시는 걸 봅니다.
이 육신의 죽음은 사실은 별 것 아닙니다. “주께서 오라하시면 내 고향 찾아 가리”
하고 죽을 준비를 늘 하고 있어야죠. 전에는 남은 미련이 많아서 죽는다는 것이 참 싫었죠.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은 것 같고 자녀들도 너무 어리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주께서 오라하시면 내 고향 찾아 가리’입니다.
바울은 ‘내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나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빌1:20-24)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든지 좋다 나는 이 지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므로 그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나고 또 자신을 그 십자가에 내어
주므로 그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는 경건의 훈련을 반복하게 되면 죽음이 두렵잖습니다.
그러면 겉사람은 낡아지고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것이며 잠시 받는 환난 속에서
영원한 영광의 중함을 알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주목하게 됩니다(고후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