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강
작금의 한국교회는 루비콘강을 넘기 직전이다. 그 이유를 세 가지 들어본다.
첫째, 하나님의 정체성이 무너져간다. 하나님의 정체헝 가운데 하나가 복의 근원이다.
그래서 복을 주는 분이지 복을 비는 즉 축복해주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목회자를 포함해 대대다수 크리스천이 하나님에게 축복해달라고(복을 빌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처음 축복과 복이 한 절에 나오는 곳이 창세기 12장 3절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라고 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해주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성경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70-90번 정도 나오고 복이라는 단어가 900-1100번 정도 나오는데(버전마다 조금씩 다르게 번역했기 때문에),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복 받도록 빌어주는 것은 축복으로, 하나님이 주는 것은 복으로 썼다.
우리말 성경의 백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축복과 복이다. 즉 우리말 성경은 읽는 그대로 하나님이 복 주는 분임을 알 수 있으나, 영어 성경은 “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로 써서 하나님이 복 주는 분임을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히브리어 ‘바라크’도 마찬가지다. 말은 의식이다 아니 조지 오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이 공식을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에 대입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보다 상위의 신이 있다는 말이 된다. 꽤 이름이 알려진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써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다. 변하는 말을 수용해서 써야 할 말이 있고 일깨워서 바로 잡아야 할 말이 있는데 축복과 복의 경우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되는 말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대로 옳게 쓰도록 일깨워주어야 하는 말이다. 물론 아직은 축복과 복처럼 혼동해서 쓰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나 목사를 먹사로 기독교를 개독교라도 해도 수용할 것인가?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온전)한 사람이라고 했고[약 3:2], 심판 날에는 부주의한 말(무익한 말, 터무니없는 말)에 대해 해명하고 그에 따라 유죄, 무죄를 선언한다고 했다.[마 12:36-37]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말에도 박식해 축복과 복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기도의 종결어미다. 기도의 사전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성도 간의 대화”라고하나 실제로는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간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간구의 마지막 표현을 응답받기에 어렵게 아니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기도는 “...비나이다.”로 마무리한다. 그런데 막상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목회자를 비롯해 많은 크리스천이 다음과 같이 무려 아홉 가지로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다.
“기도합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옵나이다.” “기도했사옵나이다.” “기도하였사옵나이다.”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드렸사옵나이다.”“기도드립니다.” “기도드리옵나이다.”사사시대 때 왕(하나님)이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살았다고 했는데[삿 21:25], 작금의 한국교회가 명목상의 하나님만 있어서 빚어지는 현상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아홉 개의 표현가운데 뒤의 두 개를 제외한 일곱 개의 표현이 왜 틀린 기도인지 요점만 기술한다.
먼저, “...기도합니다.”는 운동합니다. 공부합니다. 세수합니다.“처럼 말하는 주체가 무슨 동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대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어서 말하는 주체가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 보고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이 표현은 객관적인 사실을 알릴 때 국한해서 써야 한다. ” 오늘 예배 때는 000가 기도합니다.“처럼.
다음, 과거형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은 어법에 어긋난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말이 끝날 때까지는 현재형으로 마무리해야 어법에 맞는 표현이다. 과거형 표현은 기도를 마치고 잠시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 누가 묻거나 또는 자기가 조금 전에 한 행위를 누군가에게 말할 때 “오늘 예배 때 제가 기도했습니다.”처럼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영어 기도는 모두 “pray in Jesus name"처럼 현재형으로 끝맺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도 역시 현재형으로 끝난다. 그리고 말에는 느낌(뉘앙스)라는 게 있다.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부탁해놓고 마지막에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맺으면 협박하는 느낌이 든다. 하나님을 협박할 리는 없겠지만 전술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말에 박식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말의 느낌까지 다 알고 있다.
셋째, 목사 호칭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목사라는 호칭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온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았다.[엡 4:11]” 그런데 여기서 목사라는 단어는 지금과 같은 목사 직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한 오역이 분명하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 가운데 현대어성경, 킹제임스성경, 회복역성경, 공동번역성경, 한자어성경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로 번역했다. 아는 대로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썼는데 사도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엡 4:11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서신에도 목사라는 말이 없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지금의 목사 역할을 하는 직분이 없었다는 말이다.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수리아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와 교사라는 호칭만 있었고 목사라는 호칭은 없었다.[행 13:1]
의도한 오역의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엡 4:11에서 목사로 번역한 헬라어가 포이맨이고 성경에 모두 스무 번 나오는데, 이 단어를 엡 4:11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모두 목자로 번역했다. 그런데 목자로 번역한 열아홉 곳에 목사라는 단어를 대입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 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며 치라고 했다.[요 21:15-17] 즉 목사가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이다.
셋째,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했고[요 10:14] 다윗도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했다.[시23:1] 따라서 교인을 양에 비유한다면 목사가 아니라 목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넷째, 헬라어 문법적인 구조로 볼 때 “목사와 교사”는 한 부류의 직분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영어성경 Easy to Read Version 버전이 이 주장을 수용해 이렇게 번역했다. “some people to have the work of caring for and teaching God's people."
하나님이 목자 예수님이 목자라도 나는 목사다? 열왕기서를 보면 국정을 집행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느냐 묻지 않았느냐가 선한 왕과 악한 왕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자. “하나님, 목자라는 호칭이성경적인가요? 목사라는 호칭이 성경적인가요?”不問可知다.[마 23:8]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회자의 호칭에서부터”라고하면 緣木求魚일까?
루비콘강을 완전히 건너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프로필:
전, MBC 아나운서 국장, 동국대 신방과 겸임교수
SBS스포츠, CTS, JCBN, FEBC, C채널, GNTV에서 스포츠 캐스터, MC, 앵커, 진행자, 출연 등으로 방송.
현재, 11년째 “그림이 그려지는 복된 말씀”(구어체 성경)편찬 중.
극동방송 시청자 위원
참고 성경과 책:
공동번역성서, 신구약전서[1937년발행], 스트롱코드성경[히브리어, 헬라어사전], 우리말비전성경, 조선어성경, 킹제임스성경, 톰슨주석성경, 표준새번역, 현대어성경, 현대어성경, 회복역성경, 히브리어, 헬라어 직역성경:허성갑 번역, 이학재 번역, 이영제 번역
영어성경 6권:GNB, KING JAMES, NIV, NLT YLT, New Testament(Easy to Read Version)
참고서적:성경사전, 성경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