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싯다르타의 일생이 다가오다
그랬다. 철마다 정성스레 가꾼 보리며, 쌀을 머리에 이고 재 너머 부처님 집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의 소재는 부처님의 생애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띄엄띄엄 스토리였다. 그런데, 어쩌다 절에 다녀오신 아버지 손에 들려있는 책에는 그림도 있고 시인지, 노래인지, 이야기인지 모르는 굵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읽어주는 그 책에는 부처님이 살아있었다. 전생으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장편 서사시 같은 이야기였다. 이른바 <팔상록>이라고, 여덟 가지 특별한 사건에 따라 엮은 부처님의 생애스토리이다. 이교담과 백용성 스님이 쓴 같은 이름의 두 책을 조금 더 늘리고 맛을 가미해 안진호 스님이 펴낸 것이다. 아! 신영균, 박노식, 황정순 씨들이 출연한 영화 ‘석가모니’도 있었다. 그것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처님의 생애를 아는 통로였다. 사찰에서 불교교양대학을 운영해도 부처님의 생애는 맛보기로 조금 들려주는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자료가 많지 않았고 관심도 적었으므로.
그러다가 초기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어자료와 영어자료 그리고 빠알리어를 중심으로 한 자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이도 일본자료와 빠알리어 자료를 중심으로 연대기별로 구성한 부처님의 생애를 십년 째 가르치고 있지만 부족한 느낌이다. 근래에는 영국 BBC방송의 다큐멘터리 ‘붓다’가 공중파 방송과 유튜브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해서 아주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불교텔레비전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다룬 TV드라마 ‘붓다’를 방영한다는 소식이었다. 인도 드라마라고 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무려 55부작 드라마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 우리나라 인기드라마도 55부작을 하려면 큰 모험이 필요한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보기로 했다. 초파일 행사를 마친 피곤한 눈을 비비며 본 2559년 부처님오신날 저녁에 티비를 통해 흘러나오는 드라마는 그야말로 감동의 드라마였다.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한꺼번에 두 편의 드라마를 방영하고 원찰에서 진행하는 연등축제에 참여하느라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재방송까지 방영해서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생애를 톱아보게 되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등불을 밝히고 나서 사찰에서 보거나 집에서 본 불자들의 반응은 환호성 그 자체였다. 입이 떡 벌어지면서 어떻게 저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디테일하게 그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싯다르타 태자와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 또는 부인이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들 등 실로 단순한 등장인물만 기억하다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등장하자 복잡해하면서 이렇게 묻는 이도 있었다. “헷갈려요, 스님! 부처님 주변 인물들이 저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어쩌다가 그런 것이 아니고 저렇게도 치밀한 준비를 해서 부처님을 힘들게 한 것이어요?”
그렇다. 단선적인 너무나 단순한 스토리만을 학습해온 한국시청자들에게 불교텔레비전이 선사한 드라마 붓다는 너무나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시작했다. B.K.Modhi가 제작하고 우리말 번역은 진우기가 한 55부작 드라마 붓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왜냐면 그 부처님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일생이 다가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생애를 제대로 아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부처님처럼 되는 아주 중요한 문이다. 이 충격과 신선함이 어디까지 지속되는지 살펴볼 작정이다. 현대불교 애독자와 불교텔레비전 시청자와 함께.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존재를 향한 사랑의 마음 전해져
인도 영화 특징 살린 드라마
자비의 싯다르타 행보 기대
늘 뭔가 헛헛했다. “우리나라는 얼음판의 얼음 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거기까지가 한계입니다.” 그렇게만 여기다가 김연아라는 걸출한 선수가 나옴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그런 소리는 이제 쑥 들어갔다. 비슷한 느낌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를 제패하는 예수의 삶과 그 주변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볼 때마다 어찌 이리도 아름답게 그리는지 궁금하고 부러웠다. 부처님 이야기도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그릴 수 없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 섞인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 드라마 붓다를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기쁨을 맛보았다.
불교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방영된 붓다의 삶은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영화를 넘어서 드라마라고 하는 장르라서 매 회마다 가져야 하는 긴장미를 적정하게 편성한 재미가 있었다. 아니 매회 한 편의 영화였다. 그동안 보아왔던 인도영화의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도영화는 세 얼간이, 조다 악바르, 봄베이, 용감한 자가 신부를 얻는다, 우리가 만났을 때 등 이십여 편을 넘지 않는다. 그것은 할리우드영화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소개해 온 극장가의 흐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 인도영화는 대개 슬기로움을 강조하고, 슬기로움은 존재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불교와 힌두교 등 인도의 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거기에다가 경쾌한 노래와 춤들을 삽입하여 쉽게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여배우의 눈빛과 몸매가 관람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드라마 붓다에서도 인도영화의 특징들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자세하게 가르치는 입장에서 살펴보아도 흥미진진한 데바닷타와 싯다르타를 둘러싼 갈등 소재를 잘 다루었다. 특히 데바닷타의 어머니 망갈라와 싯다르타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 파자파티의 갈등구조는 드라마의 전형이다. 아! 숫도다나와 망갈라가 연인사이였다는 사실,마하마야가 죽고 나서 왕비가 된 줄 알았는데 마야의 부탁으로 미리 제2비가 되었다는 것 등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드라마를 흥미롭게 보게 한다.
게다가 마가다, 바이살리 등 16국에 둘러싸여있는 작은 나라의 왕으로서, 크샤트리아로서 당연하게 왕위를 이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을 최고의 희망으로 삼는 숫도다나왕과 그의 동생인 드로다난의 물고 물리는 이야기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심지어는 드로다난과 망갈라의 아들인 데바닷타가 왕위를 물려받으려면 숫도다나의 아들이 태어나서는 곤란하므로 임신한 마하마야왕비의 음식에 독을 넣기까지 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물론, 위기의 순간에 발각되어 살패하였지만…망갈라의 독백이 화면에 지나간다. “싯다르타에게 수행자의 물병을 쥐어주지 못한다면 내 이름이 망갈라가 아니다. ” 싯다르타가 수행자가 되면 결과적으로 왕위가 데바닷타에게 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도 싯다르타는 꾸준히 존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간다. 어린 나이 때부터 좋지 않은 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숫도다나의 욕심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나 화살에 맞고 신음하는 백조를 치료해서 목숨을 살리는 모습은 가슴을 울린다. 싯다르타는 쏘아서 죽인 사람이 주인이라는 데바닷타에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한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말 가운데 세상의 주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그의 불교공부에서 나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싯다르타의 존재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면서 드라마의 흥미를 이어갈 지도 관전 포인트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감동의 소재이지만 숫도다나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며, 데바닷다나 망갈라의 입장에서는 싯다르타의 위크포인트(약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철저하고 처절한 의심과 질문
한국의 스님들은 아침마다 부처님을 예경하면서 행선축원(行禪祝願)을 한다. 축원의 내용 가운데 한 구절이 붓다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참선정진(參禪精進)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단독로(疑團獨露)이다. 의심이 덩어리가 되어 드러나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왜 이런 축원을 하는 것일까? 의심은 무엇이고, 덩어리는 무엇일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괴로움이 그득하지만 해결했을 때는 전쟁하다가 사로잡혀서 밧줄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 것 같은 시원하고 후련한 해방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의심이 지극하면 문제를 풀려고 하는 노력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논리적이고 대강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듯 도저히 풀어낼 것 같지 않은 문제가 다가오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대했을 때는 생각나지만 밥 먹거나 잠자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잊어버리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지만 골똘히 생각하고 그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클 때는 무슨 일을 해도 그 문제만 또렷하게 다가서서 앞으로 가면 앞으로 따라오고, 뒤로 가면 뒤로 그리고 잠자거나 앉거나 눕거나 심지어 꿈을 꾸어도 그 문제는 나타난다. 그렇게 마치 작은 실마리가 뭉쳐져서 실타래가 되듯이 의심도 덩어리처럼 되는 것을 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깨우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의심자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이 덩어리가 되어 드러나게 되면 해결은 어느덧 와있게 된다. 아난다가 결집에 참여하려고 수행하다가 되었음을 확인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 머리를 베개에 대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나는 초기불교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생각한다. 착실하게 한 계단씩 밟아나가는 점수(漸修)의 방법을 쓰지만 깨달음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99.999%는 100%가 아니다.100%는 이뤄지는 순간에 이룬다.
드라마 붓다의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이 의심이란 놈이 영락없이 잡힌 짐승이나, 도둑이나, 적처럼 아니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애인처럼 척하니 다가서고 있다. 아니 항상 그와 함께 하고 있다. 8~10회를 통해서도 싯다르타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역시 의심이다. 그리고 그것의 표현은 질문이다. 드라마 붓다의 시청자들은 그의 의심이 어느 곳에 머무는 가를 살피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한국의 불자들은 의심과 질문이 습관화되어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싯다르타의 의심과 질문을 잘 새겼으면 한다. 싯다르타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선택할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향락궁이라는 여인들과의 정염을 마음껏 누리는 유흥가에 가도록 한다. 그 전에도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는 데바닷타는 비아냥거리며 말한다. 또,또,또 질문이지. 추가질문이요~오. 데바닷타가 경전에서는 계속 못된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경전의 기록자들의 시각일 수도 있으나 싯다르타만큼 철저하고 처절한 의심과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금강경, 화엄경을 위주로 교학을 공부하면서 참선정진을 하는 참선행자나, 염불정진을 하는 정토행자나, 주력(呪力)정진을 하는 밀교행자 그리고 초기불교를 공부한 사마타행자 등이 있다. 기본을 모두 알고 특징적인 정진을 따로 하면 좋은데 하나만 알다보니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조금은 혼돈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해소하고 바른 신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의심이 덩어리 되게 사유하고, 생긴 의심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 물어서 해결하고, 물어서 안 것은 또한 골똘히 사유해서 확인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불교를 골라서 살피는 재미
힌두교와 불교의 문화 혼재
주인공 이름도 의미 담겨 있어
초대형 불교드라마인 드라마붓다가 초반 분위기를 힘차게 끌어올리며 시청자들이 안방에서 피서를 확실하게 하게 하고 있다. 12회 13회에서는 싯다르타의 혼인과 관련한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다. 당신의 사랑은 서론이 너무 길어요 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싯다르타는 사랑의 의미나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관해서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역시 무수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구해가면서.
인도는 현재 힌두교도들이 많다. 그리고 당시에도 브라흐만교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일정 부분은 불교와 흐름이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지금도 힌두교도들이 불교가 인도에 많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불교는 힌두교에 포함된 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도 힌두교의 신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으니 그럴밖에. 드라마 붓다에도 부처님의 일생을 다루지만 어디까지가 힌두교이고 어디부터 불교인지 모를 정도로 섞여있다. 싯다르타가 아직 출가하기 전이고 깨달음을 얻어서 전법하는 때보다는 훨씬 이전의 일이기에 그렇기는 할 것이다. 아무튼 불교를 제대로 골라서 살피는 재미도 있다.
싯다르타가 가진 근원적인 민감한 감수성에 기인한 질문의 습관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주위 사람들을 힘깨나 들었을 것이다. 질문, 질문, 질문 이어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일이 주업인 교사(수)들도 힘들어하는 일이다.
서구의 철학사조가 변화의 흐름을 이어온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나 돈황의 자료들을 살피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인간의 언어로 구성된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른 바 소쉬르, 스트로스, 라깡,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구조주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붓다에 등장하는 이름을 살펴보자. 주인공 싯다르타, 경쟁자 데바닷타,아버지 숫도다나, 어머니 마하마야 등의 등장인물들이 외국어니까 알 수 없는 주문 같아 보인다. 그런데 주로 인도의 고어인 빠알리(Pali)어와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되어있다. 글자를 보면 그 뜻을 알듯이 이름을 보면 그의 생김이나 성격을 알 수 있다.
싯다르타(Siddhartha)는 드라마에서 명명식을 하면서 잠시 보여준대로 뭐든지 다 이룬다(成就)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쟁자인 데바닷타의 데바(deva)는 하늘, 다따(datta)는 주어진, ‘어리석은’의 뜻을 가져 하늘 같은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둘에게 사랑을 받는 야소다라는 명예(yaso)를 지닌 사람(dhara)이라는 뜻이다. 애칭인 고파(gopa)는 소치는 사람에서 뜻이 만들어져 지키는 사람 즉 수호천사 같은 뜻이 된다. 그래서 그에게 혼인하는 남자는 왕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숫도(suddha) 깨끗한, 다나(dana) 밥, 보시의 뜻이 합쳐져 정반왕(淨飯王)이라고 한역한다. 깨끗한 보시라는 뜻도 있다. 어머니 마하마야(mahamaya)는 최초의 하늘인 야마천, 주술사라는 뜻을 가져 나의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라는 뜻을 담고 있다.
대개 인도 빠알리어의 ‘a’가 뒤에 붙으면 ~하는 존재(사람)이며 주로 남자이다. ‘i’는 여성이다.
싯다르타의 성인 고타마(gotama)와 고타미(gotami)가 그렇다. 중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남도신도인 우바새(upasaka),여자신도인 우바이(upasika)가 그렇다. 앞에 ‘a’가 들어가면 부정의 뜻, 긴 ‘a’가 들어가면 긍정의 뜻 끝에 들어가면 여성형 사람의 뜻이 된다. 사촌 동생 또는 이복동생이라는 난다(nanda)는 기쁨, 환희라는 뜻 외에 잘생겼다는 뜻이 있다. 최후의 비서실장 격인 아난다(aananda)는 기쁨을 가진 자, 기쁨의 주체 그리고 아주 잘생긴 사람이라는 뜻으로 옮겨진다. ‘a’가 들어서 부정하는 듯하지만 장모음이라 이중부정으로 강한 긍정이 되는 것이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힌두교·밀교 의식 발견 ‘눈길’
드라마 붓다에는 당시의 정치와 의식 및 축제 등 인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어서 얼핏 보면 매우 복잡하다. 어디에 시선을 두고 보아야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아예 고개를 돌릴 수도 있으나 조금만 이해하면 재미있게 드라마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당시의 나라를 살펴보자. 숫도다나가 임금인 카필라는 드라마에서 샤카족 연합의 수장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부족국가이다. 우리나라의 가야, 신라의 모습 비슷하다. 말라족과 콜리야족도 부족국가이다. 가까이 큰 나라로는 빔비사라왕과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로 기억되는 마가다라는 큰 나라가 있었다.
마가다는 싯다르타가 수행해서 깨달음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빔비사라는 드라마에서 연상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동년배라는 설이다.
코살라는 코살라가 세운 나라로서 그의 아들 프라세나짓(Prasenajit)이 드라마의 긴장구도를 확실하게 이끌고 있다. 그의 아들 위두다바(Vidudabha)는 부처님이 인지하는 가운데 샤카족 정확히는 카필라국을 멸망시켰다. 베살리라는 도시로 기억되는 릿차비족의 공화정치도 발달했다.
카필라는 코살라에 병합되고,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쿠테타로 물리치고 왕이 된 아자타삿투에게 카시와 코살라는 병합된다. 뒤에 알렉산더의 부대에게 인도가 크게 어려움을 겪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메난드로스와 당시의 고승 나가세나(Nagasena)의 대화를 기록한 〈밀린다왕의 질문(Milindapanha)〉은 대화문학의 걸작이며 불교의 기본교리서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 대화를 통해 메난드로스는 불교를 인정했다.
이런 정치상황을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싯다르타의 어렸을 때부터의 신념인 사랑(悲,karuna)을 실천하는 전략이라고 하면 그를 모욕하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분위기의 일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전쟁을 하지 않도록 작용하는 그의 능력은 정말 뛰어나다. 그의 정신은 뒤에 깨달음을 얻어 펼친 가르침 가운데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는 〈법구경(Dhammapada)〉등에 잘 적용된다. 싸움으로서 해결되지 않고 용서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쉬는 것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그의 견해는 탁월하다.
드라마 곳곳에 주술적인 의식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그것은 힌두교(당시 브라흐만)의 의식이다. 세계 어느곳에서나 태양과 빛을 상징해서 어둠과 악마(마귀)를 물리치는 성능으로 작용하는 붉은 색은 드라마 붓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이마에 붉은 점을 찍고 전장에 나가기 전에 칼에도 붉은 주사를 찍어서 잡귀를 물리치고 무사함과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이 등장한다.
물론, 주술과 남자의 바람을 잘 이해하지만 여자의 어려움도 이야기 한다. 파자파티왕비가 이날까지 여자는 매일 눈물로 보낸다고 하자 숫도다나왕은 싯다르타와 함께 가니 염려 말라고 위로한다. 야소다라의 사랑은 눈물겹다. 오로지 싯다르타만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여러 가지 주술을 하는 것이 나온다. 부마경선대회라는 결투에서 승리하라고 신들에게 공양 올리고 등불과 꽃을 올리며 기원하는 순간부터 경선의 결과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눈물겹게 극복한 싯다르타의 승리로 나올 때까지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야말로 여인의 지극한 사랑 그리고 마음이 제일 큰 기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재미 가운데 하나인 악역으로 나오는 망갈라의 저주의 주술은 코코넛을 깨는 것으로 나온다.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재가제자가 되어 호법왕으로 나오는 프라세나짓이 아슈와멕 주술을 진행해서 전쟁으로 이끌고 승리를 기원하는 것도 저주 주술에 해당한다. 이러한 주술들은 힌두교에서 계속하고 있고, 일부는 불교의 후기 형태인 밀교(密敎)의 의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몇 가지 기제들을 이해하면 더욱 더 복잡하게 전개되어 흥미를 유발하는 드라마붓다를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다양한 갈등 보는 재미 풍성
픽션(허구, 상상)에서의 극적인 재미를 극대화 하는 요소가 몇 가지 있다. 그들은 권력다툼, 싸움(전쟁), 사랑, 액션 등이 될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드라마 특히 사극에서는 이런 요소가 빠짐없이 들어간다. 인도의 종교사극인 드라마 붓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권력과 나라간 전쟁을 살펴보도록 하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이지만 대를 잇는 제2계열의 숙명을 피해보고자 하는 숫도다나왕의 동생 드로다난왕의 노력은 눈물 나다. 아들인 데바닷타가 혹시나 왕으로 오를 수 있을까 해서 그보다 더 적극적이고 교묘한 아내 망갈라와 함께 싯다르타가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거나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죽기를 바란다.
아니면 왕비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은 야소다라와 데바닷타를 짝 지으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민다. 심지어는 적과의 겨룸에서도 아군이자 주군이 될 싯다르타를 해하도록 하는 명령을 아들에게 내린다. 뜻밖에 데바닷타는 싯다르타의 머리에 쓴 모자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는 묘기진수를 보인다. 그의 속마음이 복잡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영웅이 될 것이냐 반역자가 될 것이냐의 고민 속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마부 찬나와 병사들이 데바닷타왕자를 연호하자 샤캬왕국 만세를 외치는 쇼맨쉽도 적당히 드러내고 있다.
경전을 통해서 보면 나중에는 부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왕이 될 코살라의 프라세나짓왕은 위험천만한 인물이다. 마하코살라의 아들로서 기대감을 충족시켜서 일찌감치 대관식을 거쳐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야욕인 전륜성왕이 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저주주술을 행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거의 다 이긴 전쟁에서 싯다르타의 활약에 의해 번번이 깨지는 아픔을 맛본다. 드라마에서는 싯다르타의 바람에 의해 그의 군대가 지닌 모든 무기를 샤카연합국에 반납해서 무기를 녹여 평화비를 세우게 한다. 그리고 절대로 침략의 야욕을 다시는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깨고 다시 침략한다. 물론, 드로다난의 계략인줄 모르는 마부 찬나가 프라세나짓의 패배의 상징인 말을 싯다르타의 마차에 매어 끌게 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산다는 복선에 의한 것이다.
숫도다나 대왕의 누이이자 싯다르타의 부인이 될 야소다라의 어머니인 마음 착한 아미타왕비의 남편인 단다파니왕의 이중성격도 드라마의 전개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 그는 전사후보생 데바닷타의 좋은 이야기만을 듣고 싯다르타의 나쁜 이야기를 섞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어정쩡한 위상에 관해 궁리를 하다가 데바닷타를 지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아래 그가 승리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석가족 연합의 명운과 야소다라의 미래가 걸려있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그마한 이익을 취하다 오히려 큰 손해를 겪을 일을 저지른다. 더구나 그것을 사랑하는 딸인 야소다라에게 들키기까지 한다.
숫도다나왕은 아들 싯다르타를 전륜성왕으로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경전을 미리 읽은 우리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지만 세세한 과정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매우 복잡한 계략들이 등장해서 마음을 졸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싯다르타가 훌륭한 전사로서 대륙을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수도 있지만 출가 수행해야 이룰 수 있는 성자도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한 아시타의 말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무던 애를 쓴다.
아버지로서는 눈물 나는 노력이지만 좋은 통치자로서는 문제가 있는 계략들이 그의 힘 있는 머리에서 나온다. 혹시나 좋지 않은 것들을 봄으로써 세상에 관한 미련을 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위해 싯다르타가 좋지 않은 것은 겪지 않도록 한다. 아예 신도시정책을 마련해버린다. 선박왕 오나시스는 말하기를 기회는 파도처럼 온다고 했다. 이런 전쟁들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영웅들에게도 기회는 파도처럼 온다. 드라마붓다에서는 물론 싯다르타가 파도같은 기회를 소유하는 주인공이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괴로움의 진리를 인지하다
싯다르타, 고통의 현장 다니며
점점 커지는 ‘의심 덩어리’
총55부의 이야기 가운데 이제 초반부가 지나 20~22회에 들어서면서 극의 전개는 더욱 활기를 띄고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들이 많이 전개되고 있다. 〈붓다차리타〉 등 부처님의 전기를 다룬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들에 의하면 부처님의 일생에 획을 긋는 몇 가지 사건이 있다.
그것들을 우리는 흔히 팔상(八相)이라고 하고 그것을 부처님이 되심을 중심으로 기억하기에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도 한다. 보통사람들이 부처님의 생애를 접하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들이 꽤 있다. 그 가운데 꿈 이야기와 농경제(農耕祭)이야기가 초반을 장식한다. 하지만 꿈 이야기는 그저 꿈이라 하면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세상에 내려올 뜻이라고 이해하면 다른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데 농경제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다. 싯다르타가 대중들의 시끌벅적한 곳에서 벗어나 사유를 깊게 하였고 모르는 사이에 선정삼매체험을 깊이 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어떻게 동영상화 할까를 궁금해 했는데 그냥 지나가버렸다.
농경제에서 이미 아시타선인이 예언한 수도자로서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인 선정삼매체험이 있었다면 중국선사들의 화두참구의 첫 번째인 커다란 의심덩어리(疑團)는 평생을 계속하는 숙제풀이일 것이다. 알다시피 의심이 들지 않고 그냥 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정확한 이해에도 걸림돌이며, 더욱 큰 진리를 체험하기는 어려운 자질이다. 그래서 중국의 선사들은 몽둥이질을 하거나 갑자기 고함을 크게 질러 도대체 왜 그러는지를 뇌리에 명토박아놓는다. 싯다르타가 뭇삶(衆生)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 아니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차마 볼 수없는 고통의 현장을 겪으면서 그의 뇌리에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의 진리를 인지하게 된다.
아마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첫 번째인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는 이 때 이미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이 아닐까 한다.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고 있는 민초들의 체험 삶의 현장은 드라마에서는 계속되는 의문으로 마음이 피곤한 싯다르타에게 기분전환의 기회와 아내 야소다라가 숫도다나 대왕에게 청하여 얻은 혼인여행휴가 같은 민심살피기의 결과였다. 그런데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은 지나다 병든 환자나,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 그리고 상여에 메어진 시체를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개는 그 장면을 읽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도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정도 가지고 무슨 충격을 받아 세상을 싫어하기까지 하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가난하고 수탈 받아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이나, 자신이 삶의 슬픈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숫도다나가 만든 신도시 정책 때문에 고통 받게 된 하천민들과 장애인 등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더 괴롭게 느꼈을 개연성이 분명해보여서 느낌이 확 다가왔다. 자신의 성에 차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되어버린 기녀 칸치니를 데바닷타가 죽인 것을 알고는 상심이 매우 컸다. 더구나 그것이 야소다라와의 관련임을 알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드라마에서처럼 혼인을 하기까지 까마득히 몰랐던 생모 마야왕비의 죽음 사실을 알게 되어 커다란 충격파가 몰려오듯이 더욱 흥미진진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한국 시청자들이 복을 받았다. 붓다의 일생과 주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고민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떻게 부처님을 닮아가는 지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아는 계기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부디 바라기는 드라마 붓다를 보는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 생애를 기록한 전기, 여러 가지를 함께 묶은 불교성전을 한 권씩 가지고 때때로 읽으며 살아가기를!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신분과 직업 알면 재미 두배
드라마붓다가 점점 더 극적인 재미를 높여가고 있다. 청년기에 결혼하고 아이 라훌(라)을 낳으며 집안은 안정되어가는 반면에 국제정치의 상황이 복잡하게 맞물려 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국내정치의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싯다르타의 태자 자리와 야소다라라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까지 제 차지로 하고 싶어 안달인 데바닷타와 그의 아버지, 또 멋모르는 싯다르타의 장인이자 야소다라의 아버지 등이 돌고 돌아가는 갈등구조의 톱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웃 코살라의 새 왕인 프라세나짓의 야욕이 빚는 결과로서 당사자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흥미진진한 게임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인도의 오랜 전통이며 지금까지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신분 제도상 늘 제2인자들이지만 정치를 주름잡는 크샤트리아들이다. 이는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3국,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부터의 상황 등이 그렇다. 나라의 대표권은 천왕이나 국왕이 가지고, 실질적인 정치나 행정권은 무사들이 갖는 제도형태이다.
인도인과 드라마 붓다에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그들의 계급제도를 알아야 한다. 유일신교처럼 창조주인 브라흐만을 믿는 신앙에서 생겨난 것인데 크게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넷으로 나뉜다.
브라흐만 계급은 사제 계급으로 브라흐만의 입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들에게 제사 지내고 예언과 주술행위, 희생제 등을 통해 그들의 신성성을 유지해 나가면서도 현실적인 권력제도의 벽은넘지 못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크샤트리아계급은 왕족, 무사계급으로 브라흐만의 배꼽에서 태어났다. 바이샤는 농공상인으로 브라흐만의 무릎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수드라는 천민 노예계급으로 브라흐만의 발바닥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수드라는 더 여러 높낮이로 갈라져서 보통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간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에 자신들의 발자국이나 냄새가 남으면 안 된다고 새 깃털로 문대며 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웃지 못할 계급제도가 얼마나 굳세게 지켜졌는지 근래에도 암베드카르(B. R. Ambedkar, 1891~1956)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신분제도 개혁을 외치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끌고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여전히 그 계급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서 여러 가지 특별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재미를 돋운다. 시녀 로시카는 이쁘고, 슬기롭고, 상냥하다. 주인공 싯다르타와 야소다라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존재로서 사랑을 받는다. 마부 찬나는 그야말로 마부가 아니라 싯다르타의 수족과 같은 사람으로 나온다. 카스트제도 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데 드라마로는 참 재미있게 극본을 썼고 연기도 잘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나 최하층 천민계급인 이발사 우빨리가 불교 경전이나 역사적으로는 가장 극적인 인물일 것이다. 왕자들과 함께 출가하면서 오히려 왕자들의 배려를 받아 먼저 계를 받게 함으로써 법랍이 높아 사형이 되게 하는 장면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중에 계율 잘 지키기로 으뜸인 제자가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최고의 국제미녀 암바빨리가 싯다르타와 야소다라의 혼인에 나타나 무용공연을 하고 선물 대신에 단독 대화를 원하는 것으로 나와 시선을 빼앗는다. 싯다르타는 그러마고 흔쾌히 대답하여 시청자는 물론 야소다라를 한순간 당혹하게 만든다.
물론, 사랑하는 야소다라와 일심동체이니 그녀의 의사를 따르겠다는 말로 책임도 피하고 사랑도 나타내는 것으로 그렸지만 말이다. 아! 불자들의 관심사인 싯다르타의 출가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것은 데바닷타의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된다.
리뷰 - 법현 스님
위대한 깨달음의 길이 시작되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드라마 붓다의 시청자들도 어서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청년 싯다르타가 고뇌 어린 삶의 체험과 민초들의 험난한 인생을 목도하고 어느 한 사람이나, 신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근본고통이라는 것을 느낀다. 따라서 드라마붓다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는 시점에 와 있어서 일반인들은 신기로울 것이고 불교인들은 재미있다 못해 자못 흥분해서 떨리는 마음이기까지 하다.
재가자들을 제외한 출가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나와서 산다. 가정을 떠나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라고 한다. 그런데 비구(니:bikkhu,bikkhhuni)를 설명하는 표현들이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집 있는 곳에서 집을 나와 집 없는 곳으로 떠난 이’라는 말이 있다. ‘얻어먹는 이(乞士)’라는 말도 있다.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아침마다 탁발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이 있다. ‘윤회(samsara)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라는 말도 있다. ‘윤회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므로 열심히 수행정진해서 결국에는 윤회를 떠나고 윤회를 끝내는 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것이 비구라는 말이 가진 가장 뜻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출가하는 것이 ‘가출’이 아니라 윤회를 끝내는 모범을 보여서 다른 이들도 윤회를 벗어나게 한다는 뜻에서 ‘위대한 포기’, ‘위대한 출가’라고 하기도 한다. 출가 전 그의 인품에 반해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빔비사라왕은 드라마붓다에서 독백하며 눈물을 흘린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가난할 수 없이 매우 가난하다.” 그런 것이다. 출가는 바로 그런 것이다. 다만, 치열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출가하고서도 권력과 명예를 위해 노력하거나 재산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가까워지려는 이들은 오히려 출가하지 않고 공덕을 쌓는 재가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하는 이는 위대한 척 걸음을 걷지만 그(그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부모, 자식이나 부부 또는 애인인 경우에는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기 일쑤이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출가를 막고 위대한 국왕이 되게 하고픈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왕이나, 어어니 마하파지파티왕비 그보다 더 마음 아팠을 태자비 야소다라, 멋도 모르고 고아가 되어버린 라훌라 등의 마음의 움직임이 경전에도 나오고 드라마붓다에는 정말 실감나게 묘사된다.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여성이 그 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부처님이 여성들의 출가를 허용한 것은 세계종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물론, 시자 아난다가 세 번이나 어기지 못할 질문을 부처님께 해대자 마지못한 듯 허락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출가자들이 청년이나 독신만 이었던 것이 아니라 유소년, 청년 ,장년, 노년까지 있었기에 당연히 혼인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남편이 출가해버려서 갑자기 홀로된 여인들이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생겨나고 그들의 생계와 안전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회문제도 해결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계발해서 붓다(아라한)이 되게 하고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숫따 니빠따의 ‘어느 장작이나 불을 붙는다’는 말씀은 성의 차별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그런데 성인이 아니라 유소년소녀라면 그들의 부모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아들 싯다르타의 출가를 온갖 방법으로 막으려 했지만 막지 못했던 아버지 숫도다나의 아픔은 거꾸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이었다. 게다가 친족들을 구하러 온 붓다가 자신을 대신해 왕위를 이어야 하는 다른 아들 난다뿐만 아니라 손자 라훌라마저도 출가하게 되자 그것을 기억한 숫도다나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아들에게 간청한다. 미성년자는 부모의 허락을 받은 뒤에나 출가하게 해달라고. 이것은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관계와 연기를 알아야
삼각관계가 전쟁과 쿠데타로
중생제도의 시작에 흥미 배가
드라마붓다에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대단히 재미있고 긴장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많다.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관계와 연기를 알아야 한다.
드라마붓다에는 셋이 물고 물리는 관계가 꽤나 많이 나온다. 이른바 삼각관계이다.
대표적인 것은 끝까지 괴롭히는 관계이지만 번번이 싯다르타의 승리로 나타나거나 아예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싯다르타-야소다라-데바닷따의 관계이리라. 그들은 어려서부터 경쟁과 사랑의 나눔을 합리적으로 하지 못하는 관계였다. 경쟁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으니 잘해서 왕권을 쥐는 것으로 노력했으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출가하였던 마하남(마하나마)에게 빼앗기는 데바닷따는 출가하여서도 여러 가지 못된 짓을 하여 산채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는 성불하게 되리라는 경전의 스토리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으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삼각관계도 있어서 흥미롭다. 유명한 국제미녀이자 창녀인 암바빨리와 빔비사라왕과는 연인 사이였고 암바빨리는 싯다르타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삿투가 그녀를 좋아하기에 그녀가 낳은 지와까(Jivaka)를 위해서 그와 혼인해 왕위를 물려주면 어떨까 하는 꿈을 꿔본다. 하지만 아들 지와까는 붓다를 존경해서 왕위보다는 출가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리고 승단의 주치의로서 활동하기를 원한다. 이 꿈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주치의를 하므로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그러나 야소다라를 사랑하는 싯다르타는 암바빨리의 이성으로 다가오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도로서의 마음만 받았으며, 사랑에 감동한 암바빨리가 나중에 그녀의 망고숲을 승단(상가)에 기증하였다. 이는 대림정사(암라수원)가 되었다. 그녀와 빔비사라가 낳은 아이가 콘단냐라는 설도 있고, 그녀가 낳은 아이가 유명한 의사인 지와까라는 설도 있다. 아무래도 콘단냐는 아닐 것 같다.
드라마에서 긴장을 유지하다가 왕위를 차지하지 못할 만큼 흐트러진 삶을 사는 아들 데바닷따에게 실망하고,온갖 나쁜 짓을 한 자신에게도 따뜻한 사랑과 고마움을 표하는 싯다르따에게로 마음이 돌아선 망갈라와 숫도다나 및 드로다난과의 관계는 흐릿한 삼각관계이다.
처음에 숫도다나는 망갈라와 좋아하는 관계였다가 마하마야와 혼인한 것으로 그려진다.
아주 특이한 삼각관계는 남자끼리의 관계이다. 그야말로 물고 물리는 전쟁까지를 사이에 둔 관계여서 흥미를 북돋는다. 그들은 싯다르타와 프라세나짓과 빔비사라이다. 물론, 싯다르타의 인격에 반한 빔비사라의 적극적인 협조로 최소한 빔비사라가 실권을 쥐고 살아있을 동안은 언제나 싯다르타와 빔비사라가 한 편이었다. 프라세나짓의 공격을 함께 막아내고 돕는 관계로 그린다.
삼각관계는 아니지만 관계를 통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 정권의 평화적 이양이 아닌 쿠테타이다. 경전에는 쿠테타 이야기가 몇 있다. 샤카족의 나라에서는 숫도다나대왕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하고,이복동생인 난다도 출가하고,싯다르타의 아들 라훌라도 출가한다. 그렇게도 싯다르타의 태자자리를 탐내던 데바닷타도 속내는 붓다의 성스러운 지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출가하였다. 샤카족의 왕권은 결국 마하남에게 넘어가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승단은 그렇게 번성해갔으나 세속국가와 정치는 쉽지 않은 모양이 되어갔고 결국 다른 원인이 있기는 했으나 멸망의 길로 치달려 가게 되었다. 그런데 코살라는 마하코살라의 아들인 파세나디(프라세나짓)이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드라마붓다에서는 화를 돋아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붓다의 일생, 싯다르타,법현스님,btn 불교텔레비전,현대불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