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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幽堂)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제 말로서만이 아니라, 철저히 <'남'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며, '옴'도 아니고
'감'도 아닌>(不生不滅 不來不去), 그런 땅을 확실히 밟고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생멸 있음'과 '생멸 없음', '왕래 있음'과 '왕래 없음' 등이 서로 전혀
모순되는 일이 없는 경지>를 밝혀야 하는 겁니다.
― 지금은 어떤 '경지'에 있는고?― 여러분, 이 옛 노선사(老禪師)의 독백과도 같은
물음에도 결코 허둥거리는 일이 없는, 그런 '마음 자리'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망령된 '의식'의 헤아림으로 더듬을 자리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청정(淸淨)해서, 전혀 갈고 닦기를 기다리지 않는,
즉 전혀 조작이나 대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천진한 '본래의 마음 자리'인 겁니다.
그렇다면 천지간이 텅 트여서, 오직 순일한 허공성뿐인데,
'별'은 무엇이며, '광속'(光速)이니, '광년'(光年)이니 하는 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통틀어서 '지금'이니 '나'니 '봄'(見)이니 하는 것 등으로부터 '별'이나 '거리', '운동',
'속도', '빠름'과 '느림' 등의 모든 '현상'과 '이름'들이 모두가 실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오직 망상으로 지어져서, 망상으로 엮어 나가는 데 쓰이는 허망한
연장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20세기 초엽 과학자들의 머리를 그렇게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이른바
'광속도 불변(光速不變)의 수수께끼'는 또 어떻게 된 걸까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을 낳게 되는,
이 '광속불변의 도리'는 그 당시까지는 결코 의심받았던 일이 없는, 이른바 '속도의
변환법칙'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린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령 여기에 시속 20㎞의 속도로 항진(航進)하는 배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그 배의 갑판 위를, 배의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시속 4㎞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때, 바다 표면을 기준으로 한 그 사람의 실제 속도는
(20+4)㎞가 되고, 또 이번엔 배의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걷는다면,
그 때의 이 사람의 실제 속도는 (20-4)㎞가 되는, 이것이 바로 '속도의 변환법칙'인 겁니다.
그런데 '빛'의 속도는 어느 방향으로 측정해도 항상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예요.
즉 광원(光源)을 향해서 '빛'의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거스르면서 측정하건,
'빛'과 같은 방향으로 측정하건, 또 직각의 방향으로 측정하건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게 초속 30만㎞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마이클슨-몰리(Michelson-Morley)의 실험은 매우 정교하고 용의주도하게 진행된
실험이기 때문에, 그 실험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 '광속불변의 수수께끼'는 그 때까지 '자연'이 '인간'에게 비밀로 숨겨 놓았던
'자연법칙'의 한 자락을 살짝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ⅰ) 속도의 변환법칙(速度의 變換法則)
ⅱ) 광속도 불변의 원리(光速度不變의 原理)
우리들은 이 <두 가지 '이치'>를 모두 믿어야 할 처집니다.
둘 다 의심할 여지없이 옳으니까요. 그런데 이 두 '이치'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립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니, 이 둘을 동시에 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문제지요.
과연 어느 편이 진짜 '자연의 기본법칙'인가?···
그런데 여기서 자칫 놓치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관측의
현장에서 우리들 인간을 결코 제외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만약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끝내 그것은
반쪽만의 탐구에 그치고 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들은, 인류가 유사 이래로
줄곧 되풀이해 온 치명적인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문제의 발단은 모두 우리 인간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본래 '하나'인 이 자연계야 늘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마구
토막토막 갈라놓고는 여기에 다시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면서
복잡한 '개념의 그물'을 엮어내는 바람에 문제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겁니다. 그래서 '나'를 알면 '세계'를 안다고 했던 거예요.
사람들은 그 동안 줄곧 '마음'과 '경계'를 전혀 독립적인 별개의 존재로 인정해 왔습니다.
즉 이 '안'에 있는 '마음'이 저 '밖'에 있는 '경계'를 관찰하고 있다는 거죠.
사실은 이 전혀 잘못된 생각이 우리 인간들을 '범부'(凡夫)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된 겁니다.
이 '범 자'(凡)를 보세요. 이것은 '궤 자'( ) 속에 '점'(·)을 하나 찍은 형상이잖아요?
즉 궤짝 속에 쳐 박힌 신세라는 거지요.
어찌 보면, 범부들로 하여금 이 '편향된 고정관념의 궤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공부'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즉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범부'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이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제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여전히 궤짝 속에서의 일이라는 걸 좀처럼 깨닫지 못하죠.
따라서 비단 「'마음'과 '경계'는 별개의 존재다」라는 '고집'은 물론이고,
「'마음'과 '경계'는 각기 '제 성품'이 없어서,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하는 '지견'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지견'이라도 마음에 붙여두기만 하면, 그것은 곧 이 '궤짝'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요컨대 '불법'(佛法)에 관한 '지견'이건, '마귀법'(魔鬼法)에 관한 '지견'이건, 온갖
'지견'은 다 나쁜 겁니다. ··· 결국 이 '마음'이 없으면 '경계'가 있을 수 없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이 있을 수가 없는데도 완강히 이 둘을 별개의 존재로 고집하면서
살아오기를 수천만 년을 그렇게 살아 온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부터 우선 이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心境不二) 도리의
참뜻을 철저히 사무치고 난 연후에 모두(冒頭)에 제시한, <초속 30만㎞의 '광속'>과
<정지상태>가 둘이 아니라는, 이 밤송이처럼 삼키기 어려운 명제와 맞붙어 보도록 합시다.
'지구'라는 매우 특별한 환경의 '별'에 단단히 속박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은 '지금'이라는
이 시제용어가 우주 전체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간해서는 납득하기 힘들어 합니다.
본래 '가'(邊)도 없고 '가운데'(中)도 없는 이 '허공계'에, 멋대로 자기 중심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지금'이니 '여기'니 하면서 지극히 자의적인 재단(裁斷)을 일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짓인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문제에 관여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해서 '어렵다'거나 '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자기의 주관'을 깊숙이 개입시킴으로써
문제를 치우친 방향으로, ― 주어진 사실 관계야 어떻든 간에 ― 즉 문제를 자기의 뜻에
합당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실'은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어서, 결코 '어렵다'거나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겁니다. 만약 거기에 <'의식'의 자기 중심적인 참견>이 없다면 모든 건
<지금 있는 그대로> 그저 '참'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가(邊)도 없고 가운데(中)도 없는 '허공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늘 이 사실을
망각한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이니, '여기'니, '이것'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용어인가 하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말들이 전혀 <주관적 용어>라는 사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누구라도 세계지도를 그리라고 하면 으레 '자기 나라'를 세계의 한 복판에 그려놓는 것을
보거든요. 우리들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불과 5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있다가
코페르니쿠스 덕분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지금까지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긍지를 갖고 살아온 이 '지구'가 어느 날 갑자기 보잘것없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시의 일부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이 겪었던
좌절감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즉 '자기 존재'를 지탱해 주고, '자기의 믿음'을
지탱해 주던 심리적 중심축이 허물어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심지(心志)라는 게 참 하잘 것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집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 '남이 없고'(無生) '성품 없고'(無性) '머무름 없는'(無住) '법계 허공계'
(法界 虛空界)를 요량(料量)하는 데 있어서, 그와 같은 '여기'니, '지금'이니 하는
'주관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우선 알아야 합니다.
텅 트인 '허공'이 어떤 획(劃)인들 받아들이겠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현재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모든 체험과, 그 체험에 관한 일체의 기술은
이것이 전혀 자기 중심적인 망상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기한 두 개의 서로 상충되는 자연법칙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즉,···
ⅰ) 속도의 변환법칙(速度의 變換法則)
ⅱ) 광속도 불변의 원리(光速度不變의 原理)
「이 둘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짜 자연의 기본법칙인가?」 하는 유(類)의 접근방식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겁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일체의 설명이 붙을 여지가 없겠지만, 비록 그렇더라도 구차한
대로 이것을 정리해 본다면, ··· '이 곳'과 '저 곳'을 가늠할 만한 충분한 크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고, 또 '이 곳'과 '저 곳' 사이를 이동한, 충분히 관찰 가능한 '물건'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이른바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꾸려 가는 이 세상의 '유한한 공간'에서는
앞서의 ⅰ)의 법칙, 즉 <속도의 변환법칙>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그러나 30만㎞/sec라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빛'을 사용해서 '광년'(光年)이라는 천문학적
척도로 이 광활한 '허공'을 측정하는 마당에서는 사정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간>에서는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측정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고, 또 측정에 사용된 '빛'은 <'남'(生)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습'도 없는>,
마치 환(幻)과 같은 존재이고 보면, 양자이론에서의 「대체 '무엇'이 움직였는가」 할 때,
― "움직인 것이 있다"도 아니고, "움직인 것이 없다"도 아닌, ― 참으로 <묘한 존재요,
묘한 작용>(妙有 妙用)이니, 따라서 거기엔 이미 어떤 형태의 언어나 개념도 붙을
여지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저기' 50광년 떨어져 있는 곳의 '별'과, '여기'서 '지금' 그 '별'을 보고 있는
'나'라는 것은 '빈 말'만 있고, 실체는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여기'와 '저기' 사이의 '공간적 전개', 즉 '거리'라는 것도 다만 '의식'만으로 지어낸
환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저기'에 있는 '별'을 떠나서 '여기' 있는 '나'의 망막에 와 닿은 그 '빛'(光子)
이라는 것도, 그 '유·무'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존재이고 보면, ···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움직인 걸까요? '움직인 것'도 없다면 '속도'는 또 뭐겠어요?
이 모든 현상이 오직 정식(情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업(業)의 그림자일 뿐,
실상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생멸하고 왕래한 자취가 없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일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보통 '속도' '시간' '거리'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시합니다.
v = t/s ··· ( v는 속도, t는 시간, s는 거리)
이 수식을 <'빛'을 사용해서 '허공'을 측정하는 마당>에 적용하면,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간'도 '거리'도 모두 '성품이 없어서'(無性) 몰록 '한 성품'(一性)으로 돌아가므로,
따라서 분모와 분자가 한결같이 '한 성품'이면 속도, 즉 <'빛'의 속도는 보편정수(普遍定數)>
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ⅱ)의 법칙인 <광속도 불변의 원리>인 겁니다.
여기서 ⅰ)의 법칙과 ⅱ)의 법칙을 각각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로 배대(配對)해
보면 이치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즉 '측정의 마당'이 '무한 허공'으로 전개되면,
즉 '이법계'에서 보면 '시간 공간적'인 모든 차별법은 모습이 다하고, 오직 '하나의 이체(理體)'
뿐이라, 도무지 변하고 옮기고 하는 자취가 끊어져서 '옮김이 없는 도리'(不遷之理)가 확연하고,
또한 모든 차별법의 개별적 성품과 모습이 또렷또렷한 '사법계'에서 보면, '여기' '저기'와
'가고' '옴', '먼저'와 '나중', '빠르고' '느림' 등이 '인연'을 따르면서 분명하게 굴려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법계'와 '사법계'는 서로 '체와 용'(體用)이 되어 상즉(相卽)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체'에 즉한 '용'이요, '용'에 즉한 '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고요함'이 그대로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그대로 '고요함'인 거예요.
이렇게 해서 '움직임'과 '고요함'은 '체'(體)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
'용'(用)에서 보면 서로 다른 모습이 역력한 겁니다.
즉 저 '바다'는 전체로서 보면 항상 늘고 줄고 하는 일이 없이 늘 그대로 여여(如如)한데,
다만 바람이 불면 인연을 따르면서 그 겉모양이 움직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과 '물결'은 본래 '하나의 물'일 뿐이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연 따라 나(生)는 것은 다만 그 외양이 나는 듯이 보일 뿐, 실제로는 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움직이는 모습'을 취해서 따로이 '물결'이라고 이름짓고는,
다음 순간엔 순전히 정식(情識)의 분별만으로 그 '움직임'의 모습에 상대되는 '고요함'의
모습을 지어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항상 이렇게 서로 상대되는 인자(因子)들끼리 껴잡고 상생(相生)
하면서 나타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상생'이라는 말은 그 말의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서로가 서로를 낸다(生)'는 뜻이 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법도 결코 다른 법을 내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정치판에서는
'상생정치'(相生政治)라고 하면 '서로 함께 사는 정치'쯤으로 이해하는 게 보통이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상생'은 그런 게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즉 붓다의 말씀처럼 「'이것'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고, '이것' 없음으로써
'이것'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이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양자이론에서 '닐스 보어'가 제창한 '상보성의 원리'(相補性原理)도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움직임'이 있을 때에는 '고요함'에 의지해서 '움직임'은 있게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고요함'도 역시 '움직임'에 의지해서 '고요함'으로 인지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둘은 다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순전히 '망식'(妄識)만으로 허망하게 지어진
허상인 겁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이렇게 각각으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無性),
그래서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둘'을 막무가내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방편으로 <'둘'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실은 알고 보면 이 '둘'이 모두
망상으로 지어진 허깨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둘'이랄 것도 없고, '하나'랄 것도 없는 게
진실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내내 토끼의 왼쪽 뿔과 오른쪽 뿔이 서로 같은 건가, 다른 건가 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꼴이니, 그러고 보면, 인간의 그 끔찍한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마치 허공에
꽂힌 말뚝에 넝마를 걸어놓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어요.
뭘 다시 걷어내고 말고 할 게 있겠어요?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
결국 '무명'이 그대로 '도'인 겁니다.
이 대목이 곧 '실상의 해탈'을 이룰 수 있는 요체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온통 '고요함'
뿐이라면, '고요함'이라는 말이 왜 생기겠어요? '움직이는 모습'을 취했기 때문에
'고요한 모습'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선현들도 말하기를,
「<'움직임'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여기에서 유추해서 '있음'과 '없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형상(形相) 있는 것들>은
이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정식(情識)으로 지어진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모든 있는 바 '형상'은 이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온갖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겁니다.
때문에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결국 '모습 없음'(無相)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아무튼 이 경지에 이르면 항상 저절로 '같음' 가운데의 '다름'이요, '다름' 가운데의 '같음'
이어서, 모든 차별법이 서로 뒤섞이면서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은, 이른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현전(現前)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법계'(理法界)에서 보면 '빛의 속도'는 항상 변하지 않아서 적멸한데,
동시에 이것을 '사법계'(事法界)에서 보면 30만㎞/sec라는 엄청난 속도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 <티끌 하나 움직이는 징후조차 없는 '적멸함'>이
바로 그대로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엄청난 속도감'>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사실 '광속도 불변의 원리'라는 이 거창한 말은, 간단히 말해서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사실은 조금도 움직이는 게 없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초속 30만㎞라는 이른바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실로 놀라운
선언에 다름이 아닌 겁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가장 빠른 것'과 '가장 느린 것'이
'하나의 이체(理體)'를 여의지 않아서, 이 양변의 극과 극이 서로 통해 있다는 뜻인 동시에,
'빠르고 느림', '먼저와 나중', '가고 옴' 등의 모든 현상이 전혀 사람들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려 있다는 걸 나타내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세존께서 도솔천(兜率天)을 여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태어나셨으며,
모태(母胎)에서 나오시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을 제도해 마치셨도다.』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들(拈)고 원오근(圓悟勤)이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대상'(大象; 궁극의 상)은 본래 모습이 없어서
'지극한 허공성'(至虛)에 만유를 갈무리 한다.
맨 꼴찌가 그대로 맨 선두요
왕궁과 도솔(兜率), 중생 제도(度生)와 탄생(出胎)이
시종일관 처음부터 왕래가 없으니
자취를 쓸어내고 뿌리를 뽑아버려야
'불 속의 연꽃'이 곳곳에서 피어나리라.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첫댓글 좀 어렵네요.
과학도 출신이라는 방배동 거사의 글인데, 소생 같은 그 방면의 문외한은 이의를 제기할 지식이 부족합니다.
하여튼 과학과 불법의 엑기스를 한방에 썰한 왕구라임은 틀림이 없겠지요? 소생은 한방 얻어맞았습니다.
우주의 탄생, 법칙, 물리적 법칙과 상수, 순환 모든 것의 기원은 빛과 에너지라는 점이 참으로 신비합니다.
그렇다면 태초의 에너지는 누구 작품인지? 형이하학적인 소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