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이승만이 이끌던 대동청년단 활동 이후 면장 선출
"정동영 부친, 금융조합 직책 출납회계"
정동영 부친 금융조합 근무기록 묘비에는 누락
일제통치하의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정부보관소에 있는 자료를 뒤져야 정장관의 선친 정진철의 면장, 도의원시절 또는 당시 금융조합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라도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정부 보관 자료를 국민 누구라도 열람 복사할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선친 정진철씨는 호적상 출생년도는 1924년이나 실제 출생년도는 1921년인 것으로 보여 진다.
정동영 장관은 1953년도 생이고 정장관이 정장관의 홈에서 밝힌 바처럼 정장관의 선친 정진철은 "정장관이 전주고 2학년 때인 1969년 48살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진철의 일생추적
역으로 추적을 하여보자. 1945년 8.15 해방 후인 1946년에 2대 구림면장(구림면은 1935년 행정구역개편으로 구암면과 부암면이 병합하여 생겼다)을 하였으니 당시 25세 때로 이도 정장관이 밝힌 "애기면장'으로 호칭되었다는 정장관의 말과 일치한다. 그리고 32세 때인 1953년에 제7대 구림면장을 하였고 이때 정동영 장관이 출생을 하였다.
그리고 2년여에 걸친 구림면장을 그만두고 35세 때인 1956년 6월 2대 지방의회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순창 제2선거구에서 당선이 되어 도의회 예결위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1962년 신병으로 고향인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로 돌아와 1969년에 사망을 하여 정장관의 표현처럼 '순창의 울타리'가 무너졌다. 물론 정동영장관은 1960년대 전후에 "전주로 이사(유학)하여 전주에서 초중고를 다녔다"고 한다.
정장관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다. 스스로 "아버지! 정진철! 나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했다"고 자서전 '개나리 아저씨'에서 적었다.
정장관이 밝힌 가족사를 보면 장장관은 8형제 중 5째이다, 정장관의 위로 "4분의 형님이 계셨다"는 것으로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어 정장관이 사실상의 장남이다. 정장관의 자서전 '개나리 아저씨"에 보면 이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구림면 뿐만 아니라 순창군은 그 당시 '해방구(빨치산 치하, 경찰의 통제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밤낮을 떠나 세상이 바뀌는 비극 속에 남자란 남자는 모두 학살당하고, 그래서 동네 아이들 아버지의 제삿날은 한날 한시로 똑같았다." 즉 이때 형님들이 사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남원고보(남원 고등보통학교로 추정되며 지금의 남원중학교 전신으로 보여 진다, 남원중학교에 확인하여보니 40년대 경 화재로 인하여 모든 서류가 소실되어 일제하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를 졸업한 '금융조합'직원이었던 정장관의 선친 정진철은 아마도 20대 전후에 '금융조합'에 다니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왜냐면 호적상의 나이에 3살 더하기 6-7세인 9-10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당시 보통학교 과정 6년을 마치면 15-16살이 되며 고등보통학교 과정 3-5년을 더하면 18-21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재빨리 변신을 시도 한다. 당시 지주와 친일행위를 한분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반공이라는 허울을 쓰고 해방 후에 청년을 규합하여 조직을 만들고 나중에는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단장 이승만) 단원이 되어 결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6년에 25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직선제 면장이 되었다. 친일후 출세가도를 달린 분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정진철은 남원고보 출신, 금융조합 직원, 우익단체 등 대동청년단 활동, 6. 25 전부터, 6. 25동란 중의 '해방구'하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정장관 위의 4형제는 비명에 갔지만), 당시 국부(國父)로 호칭되었던 이승만 박사의 은혜를 입어 '애기면장'에서 1956년에는 '도의원'까지 되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정진철 형제 등의 가족을 데리고 정진철의 선친인 '정참봉'(정장관의 할아버지)이 고향인 전북 임실을 떠나 순창군 무림면 울북리 통안마을에 이주한 것은 일제시대인 1910-1930년대로 추정이 된다.
정장관의 당숙모가 자랑스럽게 말한 바처럼 '정참봉'은 "잘나가는 양반가문의 잘생긴, 말 타고 다니는" 유지였다. 즉 지주 집안이었다. 그러니 '정참봉'의 둘째아들인 정진철도 그 어렵던 시절에 ;남원고보'에 유학 할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육을 조선인이 받는다는 것 조차 어려웠던 시절에 정진철은 유능한 아버지를 둔 덕택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혜택을 받은 것이다. 남원과 순창과는 거리가 멀어 통학은 힘들었을 것이고 유학을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즉 그만큼 정진철 집안은 일제통치하에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정장관의 원조상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아우이자, 안산군수를 지낸 정광좌로 소위 명문 동래정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정씨의 종산이 전북 임실에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정가와는 다른 전가씨족들의 터전인 구림면 율북리에 이주 와서 지금 종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재에 밝은 '정참봉'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제시대의 학제는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3-5년, 전문학교 3-4년으로 하였다'고 볼 때 '남원고보'는 초등학교를 마친 중학교 과정(아니면 초등, 증등, 고등과정이 혼합된)으로 3년 내지 5년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진철은 졸업 후에 '금융조합'에서 5년여를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바로 변신을 하여 우익반공단체 등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제하에 재산을 축적할 정도로 이재에 밝다는 것은 일제하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한 할 수가 없다. 일제 정책에 잘 협조하는 '정참봉' 그리고 그 아들 '정진철' 당연히 '정참봉'의 입김 하에 '남원고보'를 졸업한 정진철은 들어가기도 어렵고 당시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금융조합'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공개채용으로 채용 하였을 리 만무하고 면에서 하나둘밖에 졸업생이 없는 고보출신으로 일제시대 정책에 협조 잘하고 이재에 밝은 말 타고 다니는 '정참봉'과 정진철의 입김이면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일제 통치하의 금융조합은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체결한 이른바 '합방조약'으로써 당시 조선을 식민지화했으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의 대표적인 경제약탈의 하나로 토지조사사업을 들 수 있다. 1910-1918년까지 토지소유제도와 지세제도를 근대화한다는 미명하에 한말 이래 불법적으로 진행되어 온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하였으며, 농경지를 포함한 방대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여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회사, 혹은 일인 지주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또 이와 함께 임야조사사업을 강행하여 전 임야의 60%를 국유림으로 편입하여 땔감을 구하거나 가축을 방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율북리에 있는 '정참봉'과 정진철의 묘가 소재하는 정씨 종산 재산 형성과정도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또한 일제는 값싼 조선의 쌀과 공업원료를 수탈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먼저 일본인의 입에 맞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일본 벼 품종을 강제로 보급하였으며, 군수용 면직물과 견사(絹紗)의 원료인 면화와 누에고치의 생산을 늘리도록 강요하였다. 헌병경찰,·면사무소 직원·금융조합 직원 등을 동원하여 이미 심어놓은 작물을 뽑아버리거나 저항하는 농민을 체포·구금하는 일을 하였다.
답답하기는 국민도 마찬가지
일제하에 금융조합에서 5년여 근무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최고 학부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여 국사에 대하여 남들보다는 일가견이 잇는 정장관 입장에서 내세울만한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정치에 뜻을 두기 시작하면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금번 정동영 장관 선친에 대한 친일의혹제기에 대하여 김현미 열우당 대변인이 23일 “정장관의 부친이 친일 행각을 벌였다면 그 증거를 대라”며 “조합에서 일했다는 건, 요즘 식으로 말하면 농협 직원인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고, 혹자는 "굳이 선친 묘소에 금융조합 근무한 것을 새기는 바보가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김 대변인이 "하 답답하여"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하였겠지만 “일제하의 금융조합과 현재 농협이 같다“고 주장하면 '난 바보이고 딸랑 딸랑 입니다'를 스스로 자복하는 꼴이다.
국사를 전공한 정장관도 껄끄러워 하는 한 시기의 역사적인 일을 어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논리로 해석하여 국민들을 우롱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또한 정장관 선친은 48세의 일생을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48년이라는 일생 중 5년여는 엄청난 부분이다. 고인의 행적을 적어 기리는 비석에 5년여 금융조합행적을 적지 않는 게 옳다는 말은 '노빠'나 "유빠" "정빠" "열우당 극성 무뇌아 당원" 아니면 정장관 일가 친인척 외에는 없다. 즉 대다수 국민들은 "뭔가 꿀리는 게 있어 숨겼다"고 생각한다.
제발 나라를 위해서도 정장관의 선친이 금융조합에 근무를 한 적은 있지만 "독립군을 도왔다"든가 "독립자금을 냈다"든가 "남모르게 선행을 하였다"든가 면장시절 또는 도의원 시절 "국민을 위해 혁혁한 일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시금 일제통치하의 정부자료를 검색하여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며 정동영장관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라도 해명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첫댓글 아니 도데체 이런 방대한 자료를...대한민국 대단민국 님.
존경합니다. 어쩜 이 어마한 자료들을 ...........
ㅎㅎ 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