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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배기 딸, 두살배기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원규
예전에 아빠가 이원규가 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라는 책을 감명있게 본 적이 있어.
이후 이원규라는 분이 쓴 책을 검색해 본 적이 있거든.
그가 쓴 대하소설 9권짜리가 있었는데,
그 책은 품절이 되어 구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읽지 못했고,
그가 인물 평전을 쓴 것이 있더라구.
약산 김원봉이라는 사람과 김산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야.
김산은 아빠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라는 책을 통해서 접해본 인물이라서,
약산 김원봉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기로 했어.
약산 김원봉이라는 사람도
"독립전쟁이 사라진다"라는 책에서도 소개가 되었던 인물인데,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읽게 되었단다.
약산 김원봉.
가끔씩 그 시대의 인물이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속에서 들어본 인물인데,
정확히 그가 어떤 일을 한 지는 잘 생각이 안나는구나.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이름으로 조회를 해보니,
이원규가 쓴 책 말고,
아빠가 좋아하는 또다른 작가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이라는 책도 있더구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책도 한번 읽어보고 싶구나.
이원규가 쓴 약산 김원봉 평전.
너무 재미있게 잘 봤단다.
중간중간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거룩한 행동과 그들의 굳은 의지.
그리고 뜨거운 희생이 아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눈물도 핑 돌게 만들기도 했단다.
약산 김원봉.
그리고 그가 이끈 의열단과 조선의용군.
그들은 일제시대 내내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오늘날 역사는 그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고 있단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왜 그랬을까?
그 이야기는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단다.
그럼 아빠가 이 책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줄께.
1. 성장시기
약산 김원봉은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났어.
할아버지는 역관이었고, 아버지는 부농이었대.
밀양이라는 이 동네는 옛날부터 의인들이 많은 곳이라는구나.
요즘에는 송전탑 문제로 많이 뉴스에 출현하는 동네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사명대사가 이곳 출신인데,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표충사라는 절이 밀양에 있대.
그런 의인들이 많은 밀양땅이라서 그런지,
일제시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았대.
김원봉의 스승 김대지, 고모부 황상규를 비롯하여
김원봉의 친구선후배들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희생되셨대.
...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동화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동화학교를 다니던 중 한일합방이 일어나서 폐교되었다는구나.
이모할머니가 서울에 계셔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기로 하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이모할머니가 일본에 도움을 받아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돈으로 공부하지 않겠다면서,
다시 밀양으로 내려와 표충사에 가서 2년동안 현각스님으로부터 배움을 받았어.
이후 중앙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중에 스승 나경석이란 분이 있었는데,
나경석의 여동생 나혜석이 유명한 신여성이고,
나중에 김원봉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어.
중앙학교에서 공부하던 김원봉은 중국으로 건너가 덕화학당이라는 독일인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했어.
이때 경비가 없었는데, 친구 한봉인이 모든 경비를 대주기도 했어.
여름방학때 서울에 왔는데,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는 바람에 덕화학당도 문을 닫고,
김원봉도 그냥 국내에 머물렀단다.
그러다가 다시 중국 남경땅에 있는 금릉대학에 합격하여 영문학을 공부했어.
김두진, 이명건과 함께 금릉대학에 갔는데,
가기 전에 고모부인 황상규가 김두진에는 물과 같으라고 약수,
김원봉에게는 산과 같으라고 약산,
이명건에게는 별과 같으라고 여성이라는 호를 지어졌대.
금릉대학 시절, 그들은 3.1 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주 지역으로 이동했어.
만주에서 김두진, 이명건은 비폭력시위에 동참하기 위해서 귀국을 했고,
김원봉은 무력투쟁을 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했어.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의 형인 이시영이 교장으로 있었고,
김경천, 이범석 등 당대 유명한 독립투사들이 스승으로 있었어.
그리고 밀양의 고향 친구들이 여기서 배우고 있었대.
윤세유, 한봉인 등 고향 친구들과 재회했어.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만두고 길림에서 의열단을 만들었어.
의열단의 초기 멤버는 그의 고향친구 이종암, 윤세유 등을 포함하여 13명이었고,
단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의백은 김원봉이 맡게 되었어.
2. 의열단 활동
의열단은 인원수가 적은만큼 게릴라작전을 폈어.
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삭신은행의 폭탄투하가 목표였어.
사전에 폭탄을 보내고,
이종안, 윤세유 등 8명이 국내로 잡입했어...
하지만, 거사 하루전 중국집 비밀 회동시 발각이 되어 실패했고,
3명을 제외하고 모두 검거되었어.
첫단추부터 실패했던거지...
하지만, 그 이후에는 하나둘 의열단의 의거가 성공을 했어.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이 성공하여 경찰서장이 그자리에서 죽었어.
박재혁은 잡혀서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그는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의열단의 뜨거운 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최수봉이라는 사람은 밀양사람으로 1차 거사때 윤세유에게 이야기를 듣고,
국내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김원봉의 동화학교 동무이었어.
이 사람은 밀양경찰서 폭파사건을 성공시켰어.
이렇게 의열단의 거사가 성공하자 임시정부에서도 손을 내밀었어.
안창호가 직접 방문하여 임시정부에 동참하자고 제의했지만,
김약산은 그 전에 임시정부의 계파싸움에 실망한 상태라서 동참을 거부했어.
김약산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의열단 활동을 했고, 의열단에 가입하려는 사람도 점점 늘었어.
그 중에 장지락이란 사람도 있는데,
그는 신흥무관학교 후배야...
장지락...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람인데,, 누구였더락...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정체를 지은이가 금방 알려주었어.
장지락,, 그는 '김산'이라는 가명이 더욱 유명하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말이야.
암튼, 의열단의 거사는 계속되었어.
황포탄 의거는 아깝게 실패했지만,
김상옥의 국내 잡입 후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은 성공했어.
그는 종로경찰서를 폭파시키고, 십여명의 경찰을 죽이고,
마지막 총알로 자결하셨어.
정말, 의열단의 의거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도는구나.
....
김약산은 의열단이 지향하는 뜻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상해에 머무르고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한테 부탁하여
조선혁명선언을 받았어.
그리고 그것을 의열단 선언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단다.
...
의열단 활동은 김지섭이 일본에 잠입하여 니주바시교 폭파사건을 주도하기도 했어.
하지만, 의열단은 늘 군자금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어.
군자금 확보를 위해 많은 의열단원들이 국내로 잠입했는데,
연이은 실패와 발각되어 체포되었단다.
이때 부단장이었던 이종암도 체포되었어.
그리고 의열단이 공공작전 파괴 및 암살만 하면 안되고,
독립을 위해서라고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군대조직으로 선회했어.
일단 독립적인 군대를 만들기 어려워서,
여운형의 도움으로 김원봉을 비롯하여 많은 의열단원이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
...
그사이 의열단의 마지막 의거가 있었어.
중국인으로 변장한 나석주는 서울에 잠입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수 명의 일본인을 사살했대.
자신은 자살은 했다는구나.
3. 조선의용대
김약산이 군대를 만들려고 할 때,
중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어.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되어 내분이 있었거든.
그 상황에서 의열단은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맨 처음 무창의 봉기군에 합류하기로 했다가
계속된 진압군에 쫓겨 도망가게 되고,
국민당 포로가 되기도 했었어.
김원봉은 포로 상태에 있다가 다시 도망을 가서,
상해에서 다른 의열단원들과 만나게 되었단다.
그는 다른 단원들과 함께 북경으로 갔고,
그곳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교하기도 했단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사건으로 신간회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 회원들이
중국으로 왔어.
그전부터 알고 있던 김두전의 사촌동생 박문호의 누이인 박차정도 근우회원으로 중국에 왔는데,
김약산은 박차정과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했어.
그렇다고 김약산이 독립운동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야.
그느 황포군관학교때 친하게 지낸 등걸이라는 중국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
그리고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이번에는 직접 남경에다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어.
그리고 중국내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어 단합하려고 했어.
하지만, 우익세력들은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어.
그의 그런 활동때문에 김구가 방문하여 만나기도 했지만,
김구가 이끄는 애국한인단은 김학봉이 이끈 독립단체 단일화에는 동참하지 않았어.
암튼, 애국한인단을 제외한 나머지 단체들이 모여서 민족혁명당을 만들었어.
조선에 있던 윤세유와 국문학자 김두봉 선생도 잇달아 합류했어.
하지만, 결성뒤에서 민족혁명당 내에서도 계속된 사상 대립이 있었어.
결국 조소앙이 이끌었던 한국독립당계가 탈당을 하고,
사회주의자 최창익도 탈당을 했어.
....
하지만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해방동맹, 혁명자 동맹을 다시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성연맹을 만들었어.
...
일본은 침략의 손아귀를 점점 펼쳐서 중국까지 침입했어.
위기를 느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연합을 했어.
이를 국공합작이라고 했는데,
워낙 전부터 서로를 원수로 알았기 때문에, 그 연합은 오래가지 않았허.
김약산은 조선인 조선군대 창설계획을 중국 국민당에게 이야기하고,
정식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어.
그리고 국민당 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어.
처음에는 심리전과 선전부대로 활약을 했단다.
그가 조선의용대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지에 갔을 때
아내 박차정이 동행했는데,
그때 박차정이 총상을 입고 말았어.
이 총상의 후유증으로 박차정은 몇 년 뒤 죽고 말았단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이후 소문을 듣고
조선의용대에 입대하겠다는 이들이 많아서 그 수는 점점 늘어났어.
4. 해방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정세는 급변했어.
그러면서 김약산도 민족혁명당 전당대회를 통해 임정에 참여하고,
후에 광복군에 편입하고,
김약산은 광복군의 부사령에 취임했어.
하지만, 화북지대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에 동참하지 않겠다면서,
이탈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화북조선독립연맹 소속군이 되었어.
어찌 보면 김약산의 오랜 동료들의 이탈이라서,
김약산은 가슴아팠지만, 그들도 그들대로 김약산은 김약산대로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을 했던거야.
아내 박차정이 죽고 난 후에,
비서였던 최동선과 재혼을 했어.
1945년 대내외 정세로 보아 일본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어.
이에 광복군의 국내잠입을 준비했어.
하지만, 그들은 손도 쓰기 전에 핵폭탄을 두개 얻어 맞은 일본은 항복 선언을 하고,
그날로 조선은 해방되었어.
하지만, 조국의 앞날은 밝은 미래만은 아니었어.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진주하면서,
국내 정세는 점점 분열의 길을 걸었어.
임시정부 요원들이 푸대접으로 귀국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
그리고 화북지대에서 활동했던 김약산의 동료들이 대거 있던
조선의용군은 배가 없어서 육지로 국내로 들어왔는데,
중국에서 오려면 북한을 거쳐 와야 되잖아.
그들은 중국으로 오면서 평양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
남과 북은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어.
남과 북의 분단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암살당하거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되기 일쑤였단다.
여운형, 김구가 죽고 김약산도 체포되기도 했었어.
의열단을 이끌어 국내에서 영웅대접을 받았던 것이 불과 얼마전인데 말이야.
그는 더이상 남한에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월북하여 평양으로 향했어.
그곳에는 김두봉 등 예전에 자신의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평양에서는 그을 환대하며 중요 요직을 맡았어.
국가검열상에 취임하고 노동상으로도 일을 했어.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반대파 숙청에서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단다.
1958년 61세의 김약산은 숙청되어 그 이후 기록은 남아있지 않대.
아직까지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지은이 이원규는 그의 최후를 소설적인 기법을 빌려와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것으로 결론내렸어.
그리고 나중에 김약산의 죽음이 밣혀지면
죽음 부분은 다시 고쳐 쓰겠다고 했어.
.....
이로써, 일제시대 내내 가장 치열하고 뜨겁게 항일운동을 했던
의열단과 그를 이끌었던 약산 김원봉.
하지만, 해방 후 남북 화합을 의해 노력하다가
남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북으로 넘어가서 그쪽에서는 정치싸움에 희생되고 만거야.
그러다 보니 남한의 역사책에도,
북한의 역사책에도
그의 활약은 제대로 나와 있지 않게 된 것이란다.
역사란 것은 늘 사실만 적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역사가 편찬될 당시 정부의 사상, 정치적 성향.
그리고 편찬에 참여한 역사가의 사관, 즉 주관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단다.
이상.
끝.
책제목 : 약산 김원봉
지은이 : 이원규
펴낸곳 : 실천문학사
페이지 : 624 page
펴낸날 : 2005년 08월 10일
책정가 : 15,000원
읽은날 : 2013.11.21~2013.11.27
글쓴날 : 2013.12.0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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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고보니 김원봉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듯해요~비슷한 폭력투쟁의성격이지만 김구와 단 두명의 소속인원뿐이었던 한인애국단이 함께하지않았는지 궁금했는데~
요 책에 잘 나와있네요~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 원봉두봉세봉이 근현대사에서 주요인물들이라고 듣고만 있었는데 자세히알게되니 재밌네여~
그런데, 이런 역사를 찾아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네. 역사교과서에는 안나와 있다고 하더니...
그리고, 최근 교학서 역사 교과서 사태를 보니 더 참담해지기도 하고..
애들 역사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런지... 선배 부모로써 조언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