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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朝鮮)의 성씨(姓氏)를 찾아
[조선(朝鮮)의 혈통(血統), 씨족(氏族)을 찾아]
2023년 05월 23일
○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가깝게는 반만년(半萬年)이요, 멀게는 1만 년(萬 年)을 상회(上廻)하는 오랜 역사(歷史)를 간직한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가장 거대(巨大)한 제국(帝國)을 형성(形成)했던 국가(國家)였다』는 것은, 고전(古典) 속의 기록(記錄)으로 이를 능(能)히 고증(考證)할 수 있으며, 증거(證據)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많은 제왕(帝王)과 및 인물(人物), 제국가(諸國家)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고, 그에 따르는 성씨(姓氏)들 또한 무수(無數)히 존재(存在)하다가 흩어지고 없어지고를 반복(反復)했을 것으로 판단(判斷)이 된다.
성씨(姓氏)는, 그 성(姓)의 출생지(出生地)인 본관(本貫)이라고 하는데, 성(姓)과 본관(本貫)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에 있다. 곧 이는 혈연관계(血緣關係)를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물론(勿論)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성(賜姓) 등으로 인하여 혈연(血緣)이 아닌 성씨(姓氏)도 등장(登場)하지만 이는 소수(小數)에 불과(不過)할 뿐이다.
이러한 성씨(姓氏) 중에서도 희귀(稀貴)하고, 오늘날에는 없어져 찾아보기 힘든 성씨(姓氏)들이 많이 있다. 『또한 반도(半島)라는 한정(限定)된, 수만(數萬) 년 변함없는 땅의 지세(地勢)와 자연환경(自然環境) 속에서 왜 이러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사건(事件)들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흔적(痕迹)조차 찾을 길이 없는 성씨(姓氏)들이 많이 있었다』 고 하였는데, 이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 ‘반도(半島)’라는 한정(限定)【이는 ‘수억(數億) 또는 수천(數千), 수백(數百) 만년(萬年)’ 전(前)부터 조물주(造物主)로부터 한정된 땅이다.】된 땅에서 이렇게 수많은 성씨(姓氏)들이 많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들이며, 또한 이렇게 수많은 성씨(姓氏)들의 후손(後孫)과 후예(後裔)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대륙(大陸)의 땅으로 이동(移動)시키면 얼마든지 가능(可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 즉 ‘사실(史實)’이 될 수 있다. 전회(前回)에도 게재(揭載)되었던 것들을 보충(補充), 보완(補完)한 것이다.
1. 해동역사(海東繹史) 제31권 / 官氏志 2 氏族
○ [풍속통(風俗通)] :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여 그의 자손이 조선을 식읍(食邑)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씨(氏)’로 삼았다. [청일통지(淸一統志)] : 기자가 조선에 도읍하였는데, 분야(分野)로는 기성(箕星)의 분야에 해당되었으므로 이를 ‘씨(氏)’와 국명(國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1) 선우씨(鮮于氏)[성원(姓苑)] : 기자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지방을 식읍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선우(鮮于)’를 씨(氏)로 삼았다.
(2) 한씨(韓氏)[三國志 및 魏略] : 기준(箕準)이 한(韓) 땅에 살면서 한왕(韓王)이라고 스스로를 호칭하였으므로, 기준의 자식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를 인하여 ‘한씨(韓氏)’ 성을 썼다.
(3)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마한(馬韓)의 후기에 잔손(孱孫) 3인이 있었는데, ‘친(親)과 양(諒)과 평(平)’이다. 친(親)은 신라(新羅) 탈해왕조(脫解王朝)에 벼슬살이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옛 나라를 인하여 한씨(韓氏)로 성씨를 삼았으니, 이것이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 양(諒)은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그대로 ‘선우씨(鮮于氏)’를 이었다. 평(平)은 평강(平康)으로 돌아가 기씨(奇氏)가 되었는데, 지금 ‘양덕(陽德)의 기씨’는 모두 그 후예이다.” 하였다.
(4) 고씨(高氏)[후주서] : 주몽(朱蒙)은 흘두골성(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칭하면서 이어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 ➨ 살펴보건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주(注)에 이르기를, “주몽이 처음 탄생하자, 온 나라가 그를 높였으므로 고씨로 성을 삼았다.” 하였고, 권문해(權文海)의 운옥(韻玉)에는 이르기를, “주몽은 본디 성이 해씨(解氏)인데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로 햇빛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여 드디어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하였다.
(5) 고화(高和) [진서(晉書)] : 고구려(高句麗)의 지서(支庶)인데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므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6) 후연(後燕)의 고운(高雲)은 본디 고구려(高句麗)의 지속(支屬)으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가 되어 성씨가 모용씨(慕容氏)가 되었으며, 그 뒤에 연왕(燕王)의 자리에 즉위하여서는 고씨 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에 통호(通好)하였다. [자치통감]
(7) 후위(後魏)의 우진씨(羽眞氏)는 본디 고구려의 고씨(高氏)로, 우진씨로 고친 것이다. [속문헌통고]
(8) 고려(高麗)의 우씨(羽氏)는 성씨를 고쳐 고씨(高氏)가 되었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 살펴보건대, 우씨(羽氏)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유리왕(琉璃王) 24년에 왕이 기산(箕山)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이인(異人)을 얻었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깃털이 있었으므로 ‘우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9) 요(遼)의 장호(張浩)는 본디 성이 ‘고씨(高氏)’로, 동명왕(東明王)의 후예인데, 증조인 고패(高覇)가 요나라에 벼슬살이하면서 ‘장씨(張氏)’로 성을 바꾸었다. [금사]
(10) 을지씨(乙支氏) : 동이(東夷)의 복성(複姓)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다. [급취편(急就篇) 성씨(姓氏) 주]
(11) 천씨(泉氏)[신당서] : 개소문(蓋蘇文)은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천씨(泉氏)인데,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 급취편 주에, “천씨(泉氏) : 고구려 개소문의 성이 천씨로, 그의 아들은 천남생(泉男生)이고, 천남생의 아들은 천헌성(泉獻誠)이다.” 하였다.
(12) 연씨(淵氏) : 개소문의 본성(本姓)은 연씨(淵氏)로, 인물고조(人物考條)에 상세히 나온다.
(13) 사선씨(沙先氏) [만성통보(萬姓統譜)]: 당나라 무덕(武德) 연간에 사선영문(沙先英問)이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있었는데, 본디 고구려의 종족이었다.
(14) 곽리씨(霍里氏)[만성통보(萬姓統譜)] : 조선(朝鮮) 사람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있다.
(15) 비씨(卑氏) [자치통감]는, 비리국(卑離國)의 후예로, 공손연(公孫淵)의 대장군(大將軍) 비연(卑衍)이 있다. ➨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마한(馬韓)의 50국 가운데 비리국(卑離國)이 있다.
(16) 척왕씨(拓王氏)의 본디 성은 왕씨(王氏)로, 낙랑(樂浪) 사람이다. 원조(遠祖)인 왕비(王羆)가 후위(後魏)의 복파장군 진무후(伏波將軍鎭武侯)가 되었는데, 척왕씨로 성씨를 하사하였다.
(17) 을불씨(乙弗氏) : 살펴보건대, 만성통보(萬姓統譜)를 보면, “을불씨(乙弗氏)에는 고구려의 왕인 을불리(乙弗利)가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왕의 성은 고씨(高氏)로,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성씨가 바뀐 적이 없었으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다.”고 한 것과, 통감에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가 자주 요동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능적지(凌迪知)는 오랑캐들에게 복성(複姓)인 을불씨(乙弗氏)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왕의 성씨가 을불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18) 여씨(餘氏)[북사(北史)] : 백제 왕의 성씨는 여씨(餘氏)이다.
(19) 부여씨(夫餘氏)[後周書] : 백제는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으로, 왕의 성씨는 부여씨(夫餘氏)이다. ➨[만성통보]에, “부여씨(夫餘氏) : 백제국왕 부여관(夫餘寬)이 부여장(夫餘璋)을 낳았는데, 대방군왕(帶方郡王)이라 불렀고, 이가 부여의자(夫餘義慈)를 낳았는데, 당나라에서 대방군왕(帶方郡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였으며, 이가 부여융(夫餘隆)을 낳았는데, 웅주도독대방군왕(熊州都督帶方郡王)이 되었고, 이가 부여문선(夫餘文宣)을 낳았는데, 사선경 좌위대장군 낙랑군공(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이 되었다.” 하였다.
(20) 부유씨(鳧臾氏)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 백제의 부여씨(夫餘氏)가 음이 변하여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이다. [속통고(續通考)]에, “부여씨가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은, 이는 대개 잘못 와전되어서 고쳐진 것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백제의 선조는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혹 여씨(餘氏)라고도 칭하고 혹 부여씨라고도 칭하며, 또 와전되어서 부유씨로도 되어 있는데, 사실은 똑같은 것이다.
(21) 백제국 안에는 대성(大姓)이 8 종족(種族)이 있는데,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구씨(𦭻氏)”이다. [수서(隋書)]
만성통보(萬姓統譜) : 백제의 8성(姓)은, 첫 번째는 진씨(眞氏)이고, 두 번째는 사씨(沙氏)이고, 세 번째는 여씨(刕氏) -음은 여(黎)이다.- 이고, 네 번째는 해씨(解氏)이고, 다섯 번째는 목씨(木氏)이고, 여섯 번째는 연씨(燕氏)이고, 일곱 번째는 국씨(國氏)이고, 여덟 번째는 백씨(苩氏)이다.
➨ 살펴보건대, 협씨(劦氏)는 《북사(北史)》에는 역(力)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협(協)이라 하였고, 《만성통보》를 지은 능적지(凌迪知)는 조(刁)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여(黎)라 하였다. 그리고 《통지》에는, 백제전(百濟傳)에서는 여씨(刕氏)는 음이 여(黎)라 하고, 또다시 씨족략(氏族略)에서는 음이 협(俠)이라 하여, 한 책에서 두 가지 음으로 표기하였다. 그런즉 협제(夾漈) 역시 소루하게 한 것이다.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도(刀) 자 세 개를 쓴 여(刕) 자는 있으나 조(刁) 자 세 개를 쓴 여() 자는 없는데, 도(刀) 자 세 개를 쓴 글자는 음이 여(黎)이니, 그렇다면 아마도 잘못하여 조(刁) 자 세 개를 쓴 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구씨(𦭻氏)는, 《수서》에서는 초두변[艹]에 구(臼) 자를 써서 구씨(𦭻氏)로 하였고, 능적지(凌迪知)는 《만성통보》에서 초두변에 백(白) 자를 써서 백씨(苩氏)로 하였는데, 구(𦭻) 자의 음은 구(舊)이고, 백(苩) 자의 음은 백(白)이다. 《운회(韻會)》에는 “백제에는 백씨(苩氏)가 있으니, 초두변 아래에 백(白) 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통지》에도 역시 음이 백(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북사》에는 또 묘씨(苗氏)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백(苩) 자가 와전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원년에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 백제에 백씨(苩氏) 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2) 난씨(難氏)는 백제 사람이다. 《급취편 성씨 주》
(23) 흑치씨(黑齒氏)는 백제 서부인(西部人)으로, 당나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있다. 《통지 씨족략》
(24) 사타(沙吒)는 오랑캐의 복성(複姓)으로, 백제의 별장(別將) 사타 상여(沙吒相呂)가 있다. 《자치통감 주》
(25) 대씨(大氏) :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발해(渤海)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급취편 성씨 주》 ➨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풍속통(風俗通)》에 ‘대씨 성은 대정씨(大庭氏)의 후예로, 대관(大款)이 전욱수(顓頊帥)가 되었다.’ 하였다.” 하였다.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대련(大連)이 거상(居喪)을 잘하였는데, 동이(東夷)의 후예이다.”고 하였는바, 대개 동이에 대씨 성이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자치통감 주》
(26) 신라 왕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귀인(貴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백성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신당서》 / 신라의 대족(大族)은 김씨와 박씨이다. 《오대사》
(27) 고려의 사인(士人)들은 문벌(門閥)을 중하게 여기며, 유씨(柳氏), 최씨(崔氏), 김씨(金氏), 이씨(李氏) 4성을 귀족(貴族)으로 꼽는다. 《송사》
(28) 김씨는 고려 사람 김행성(金行成)이 있고, 박씨는 고려 사람 박인량(朴寅亮)이 있다. 《급취편 성씨 주》
(29) 육합(六合)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대부분 박(樸)과 같이 부르는데, 실은 음이 표(瓢)로, 고려의 성씨이다.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 살펴보건대, 박(朴)의 음은 표(瓢)로, 이것은 중국의 음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방언(方言)이다. 대개 신라의 시조(始祖)가 알[卵]에서 나와 박(朴)으로 성씨를 삼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시조가 나온 알이 표주박[瓢]과 비슷하였는데, 방언에 표주박을 박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또 박(朴) 자와 박(樸) 자는 중국 사람들 역시 통용하였으니, 《전당시(全唐詩)》의 고비웅(顧非熊)이 쓴 ‘송박처사귀신라시(送樸處士歸新羅詩)’라는 시에서 박씨(朴氏)를 박씨(樸氏)라고 하였다.
(30) 유(妞)의 음은 유(紐)로, 성씨인데 고려에 있다. 《자휘(字彙)》
(31) 북(北)은 고려의 성씨이다. 《만성통보》 ➨ 살펴보건대, 《정자통(正字通)》에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였다.
(32)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삼한(三韓) 가운데 진한(辰韓)의 역나씨(役拏氏)는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미천하다.” 하였다. 《금사》
(33) 홍씨(洪氏)의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재자(才子) 8명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홍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귀하게 되어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하여 당성(唐城)이라 하였다. 《원사(元史)》 ➨ 살펴보건대, 당성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모두 그의 후예이다.
(34)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5년(1365, 공민왕 14)에 차황후(次皇后)인 고려의 기씨(奇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 기씨를 고쳐서 숙량합씨(肅良合氏)로 삼았다. 《원사(元史)》
(35) 철령 이씨(鐵嶺李氏)는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 때부터 벌열(閥閱)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朝鮮)에서 나왔으며, 양평(襄平)으로 이사한 것은 이영시(李英始)부터였다. 《왕어양집(王漁洋集)》
➨ 살펴보건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으로 성주(星州)에 소씨(㸴氏)가 있는데, 음은 ‘소(小)’이고 뜻은 없다. 소(㸴) 자는 돌석[石] 자 아래에 소우[牛] 자를 쓰기 때문에 음이 소(小)이며, 소의 언음(諺音)은 ‘쇼’로, 세속에서는 우(牛)를 ‘쇼’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36) 그러나 《성원(姓苑)》을 보면, 석우씨(石牛氏)가 있으니, 바로 복성(複姓)이다. 소씨는 본디 석우씨인데, 석(石) 자와 우(牛) 자가 합하여져 소씨가 된 것인가?
(37) 또 《금사》의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석말한(石末漢)의 성은 소(蕭)라고 하였는데, 고려 때 석말천구(石抹天衢)가 있었는바, 말(末) 자가 잘못 우(牛) 자로 되고, 이 두 글자가 합해져서 소(㸴) 자로 된 것을 인해서 음이 소(蕭)로 된 것인가? 소(蕭) 자 역시 언음(諺音)은 ‘쇼’이다.
(38) 또 궉씨(鴌氏) 성이 있는데, 음은 권(權)과 억(億)의 반절(半切)로 -언음(彦音)은 ‘’이다.-,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순창(淳昌)에 궉씨가 있다.”고 하였고, 《앙엽기(盎葉記)》에는 이르기를, “선산에 궉씨촌((鴌氏村)이 있다.”고 하였다. 궉(鴌) 자에 대해서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창제한 글자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살펴보건대, 《증정편해(證正篇海)》를 보면, ‘鴌’의 음은 봉(鳳)이라고 하였고, 《오음정운(五音正韻)》를 보면, ‘鴌’ 자는 고문(古文)의 봉(鳳) 자라고 하였다. 그러니 궉씨(鴌氏)는 글자의 음과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이와같이 평이하게 잘못 권(權)과 억(億)의 반절로 한 것이다.
➨ 또 살펴보건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를 보면, 광주(廣州)에 왹씨(𨶠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자칭 음은 와(臥)와 억(億)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언음(彦音)은 ‘왹’이다.- 왹(𨶠) 자는 《증정편해》를 보면 어(魚)와 열(列)의 반절로, 그 음이 얼(孽)로 되어 있고, 《자휘보(字彙補)》에는 “문왹(門𨶠)이다.”고 하였다.
(39) 또 연안(延安)에 헝씨(遤氏)가 있는데, 음은 훤(喧)과 응(應)의 반절이며 -언음은 ‘헝’이다.-, 자서(字書)에는 이런 글자가 없다.
(40) 또 《강화지(江華誌)》에는 할씨(㔛氏) 성이 실려 있는데, 자서(字書)에 ‘할(劼)’ 자가 있고, 《집운(集韻)》에는 음이 힐(詰)이라고 하였고, 《설문(說文)》에는 삼간다[愼]는 뜻이라고 하였고, 《서경(書經)》 주고(酒誥)에는, “너는 은나라의 어진 신하들에게 힘써 삼가도록 해야 하니[汝劼毖殷獻臣]”라 하였으니 ‘할(㔛)’ 자는 혹 할(劼) 자가 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41) 또 흥양(興陽)의 목자(牧子) 가운데 뼘씨(乀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그리고 천씨(千氏), 돈씨(頓氏), 승씨(承氏), 야씨(夜氏), 편씨(片氏), 골씨(骨氏), 공씨(公氏), 옹씨(邕氏), 방씨(邦氏), 일씨(一氏), 먀씨(乜氏) -음은 미(彌)와 야(也)의 반절로, 언음(諺音)은 ‘먀’이다.- 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이다.
●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제1권 / 호적 대장에 보이는 기이한 성씨〔帳籍奇姓〕: 庚戌春,增修《輿地志》,取考漢城府所藏八道帳籍。: 漢城靈、高陽嘗、衿川將、江華骨、楊州稷、原州素、公州軟、定山工、瑞山價、善山友、南原果、安東盤、玉川飯、嘉山雪、居昌唱、星州使、德原號、東萊板、陳州凍、東州竿、江陵間、三陟深、扞城矛、中原玆、丹陽虛、少陵沙、尙州群、羅州肖、水原雀非、仁川炭䡟、廣州業守、開城追乃、忠州每輸、全州篤仕鬱、密陽午菜、延安憚吞於、海州好判采豎慈、慶州穗多氷蘆、大丘要奈、金海水學,皆奇姓也。
경술년(1790, 정조14) 봄에 《여지지(輿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를 증보하여 편수하면서 한성부가 소장하고 있던 팔도의 호적 대장을 가져다 살펴보았다.
(42) 한성(漢城)의 영(靈)
(43) 고양(高陽)의 상(嘗)
(44) 금천(衿川)의 장(將)
(45) 강화(江華)의 골(骨)
(46) 양주(楊州)의 직(稷)
(47) 원주(原州)의 소(素)
(48) 공주(公州)의 연(軟)
(49) 정산(定山)의 공(工)
(50) 서산(瑞山)의 가(價)
(51) 선산(善山)의 우(友)
(52) 남원(南原)의 과(果)
(53) 안동(安東)의 반(盤)
(54) 옥천(玉川)의 반(飯)
(55) 가산(嘉山)의 설(雪)
(56) 거창(居昌)의 창(唱)
(57) 성주(星州)의 사(使)
(58) 덕원(德原)의 호(號)
(59) 동래(東萊)의 판(板)
(60) 진주(陳州)의 동(凍)
(61) 동주(東州)의 간(竿)
(62) 강릉(江陵)의 간(間)
(63) 삼척(三陟)의 심(深)
(64) 간성(杆城)의 모(矛)
(65) 중원(中原)의 자(玆)
(66) 단양(丹陽)의 허(虛)
(67) 소릉(少陵)의 사(沙)
(68) 상주(尙州)의 군(群)
(69) 나주(羅州)의 초(肖)
(70) 수원(水原)의 작비(雀非)
(71) 인천(仁川)의 탄비(炭䡟)
(72) 광주(廣州)의 업수(業守)
(73) 개성(開城)의 추내(追乃)
(74) 충주(忠州)의 매수(每輸)
(75) 전주(全州)의 독사울(篤仕鬱)
(76) 밀양(密陽)의 오채(午菜)
(77) 연안(延安)의 탄탄오(憚吞於)
(78) 해주(海州)의 호판채수자(好判采豎慈)
(79) 경주(慶州)의 수다빙로(穗多氷蘆)
(80) 대구(大丘)의 요내(要奈)
(81) 김해(金海)의 수학(水學) ➨ 이 모두 기이한 성씨다.
● 1,789년(正祖13년), 漢城府 499 姓氏의 시원(始源)과 소멸(消滅) [靑莊館全書로 본 東國의 漢城府 성씨(姓氏) : 성씨(姓氏)를 모두 찾아본다는 뜻에서 “2022년 04월 16일” 게재(揭載) 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 땅, 약(約) ‘7,800만’ 국민(國民)들은 다양(多樣)한 성씨(姓氏)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事實)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생각해 보면 이제 겨우 110년(年) 전(前)의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韓國人)들은 너무 쉽게 지우려 하고, 이 땅에는, 토착왜노(土着倭奴)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인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들이 의외(意外)로 많다는 것에 당혹(當惑)스럽다.】 즉 국권피탈(國權被奪) 사건(事件)이 벌어지던 그때의 한반도(韓半島) 인구(人口)는, 대략(大略) “1,100만 인(人)”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고 있는데, 그 이전(以前) 1,789년 정조대왕(正祖大王) 때의 인구(人口)는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當時)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는? “겨우 19만 명【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는, 43,929 호(戶) / 189,153 인(人)】을 초과(超過)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인구(人口)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 ‘일천(一千)년 전(前)’의 ‘8세기(世紀)’ 신라(新羅) 서울(京)이었던 ‘경주(慶州)=계림(鷄林)’은, 약(約) “18만 호(戶)”에, “일백만(一百萬)”인(人) 이상(以上)이 사는 대도회(大都會)였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에 비춰보면, 20세기(世紀) 1,910년 당시(當時)의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는, ‘일천만(一千萬) 인(人) 이상(以上)’이 되어야 함이 상식적(常識的)이다.】
※ ‘조선(朝鮮)의 인구현황(人口現況)’【朝鮮總督府 編著】에서 당시의 호수(戶數)와 인구(人口)를 비교(比較)해 보면 매우 흥미(興味)로운 사실이 발견(發見)된다.
명치(明治)33년[1900] 全國 : 1,397,630 호(戶) / 5,608,151 인
漢城府 : 42,454 호(戶) / 196,898
☞명치(明治)39년[1906] 내무부조사(全國) : 1,384,493 호(戶) / 5,793,976 인
☞명치(明治)40년[1907] 내무부조사(全國) : 2,333,087 호(戶) / 9,781,671 인
명치(明治)42년[1909] 全國 : 2,787,891 호(戶) / 10,390,856 인
명치(明治)43년[1910] 全國 : 2,894,777 호(戶)
➨➨➨ 위의 예(例)에서 ‘1,906년도와 1907년도’의 호수(戶數)와 인구(人口)를 보면 : 『‘1년 사이’에 “1백만(百萬) 호(戶)와 4백만인(人)”이라는 폭발적(爆發的)인 인구(人口)가 증가(增加)되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언가 큰 사태(事態) 또는 외부적(外部的)인 엄청난 사태(事態)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이전(以前)의 조선사회(朝鮮社會)는, “양반(兩班)·중인(中人)·상민【常民:農工商】·천민【賤民:白丁·奴婢·倡優·僧侶】”등의 ‘네’ 등급(等級)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위에서 말하는 조사(調査)에서, 천민【賤民:白丁·奴婢·倡優·僧侶】은 제외(除外)되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그런데 1,789년【정조(正祖) 13년】당시(當時)에 한성부(漢城府) 호적(戶籍)을 정리(整理), 검사(檢査)했던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말에 따르면,
➊ 〈한성부(漢城府) 내에서만 호적(戶籍) 4백 7성,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79성, 도곡총설(陶谷叢說)에 13성 등, 무려(無慮) “499 성(姓)”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조(正祖) 13년【AD 1,789년】 :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는, 43,929 호(戶) / 189,153 인(人)이었다.」고 하였다.
이 말에 따르면 당시(當時)의 호수(戶數) ‘43,929’호(戶)인바, 성씨(姓氏)가 ‘499’성(姓) 이라고 하였으니, 곧 몇 집 건너 하나씩은 성씨(姓氏)가 다 달랐다는 것이니, 이건 보통(普通) 놀라운 사건(事件)이 아니다.
「한성부(漢城府)는, 한성부(漢城府)되, 어디에 있었던 ‘한성부(漢城府)’였느냐?」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되는 것이다.
➋ 21세기(世紀) 오늘날의 ‘반도(半島)’의 ‘총(總) 성씨(姓氏)’는, 모두 “298성(姓)”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력(西曆) 1,789년 한성부(漢城府)는, 겨우 20만 이하(以下)의 인구(人口)였다」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오늘과 비교(比較)해보면 : 한성부(漢城府) 인구증가(人口增加)는 ‘100배(倍) 이상(以上)’ 되었음에도, 성씨(姓氏)는 오히려 200성(姓) 가까이가 없어졌다.[소멸(消滅)되었다]〉는 것은, ‘이해(理解) 불가(不可)’한 현상(現狀)이다.
➌ 이를 토대(土臺)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 것은, 「특히 구한말(舊韓末), 많은 백성(百姓)들이 자신(自身)들의 본래(本來) 성씨(姓氏)를 버리고, “김(金)·이(李)·박(朴)·최(崔)”등의 성(姓)으로 갈아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특히 ‘김(金)·이(李)·박(朴)·최(崔)’등의 4성(姓) 같은 경우는, 2015년 “2,500만 명” 가량이라고 하니, 아마도 “수많은 백성(百姓)들이 ‘김(金)·이(李)·박(朴)·최(崔)’ 등의 성씨(姓氏)로 갈아탔을 것이다.”라는 추론(推論)이 가능(可能)하다.
이건 ‘당시(當時)의 세도가문(勢道家門)과도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유추(類推)할 수 있다.
➤ 그러나 이 또한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를 보면,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마찬가지다.
➤ ➍ 또 하나는, 당시(當時)의「동국(東國)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동국(東國)의 한성부(漢城府)에 겨우 ‘이십(二十)만 인(人)’ 이하(以下)가 살고 있는데, ‘성씨(姓氏)가 500개에 가깝다’는 말은, 왜곡(歪曲), 조작(造作)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이다.
즉 ‘반도(半島)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당시(當時) ‘수백(數百)만 명(名)’의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던 또 다른 “한성부(漢城府)”를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합리적(合理的)이며, 이성적(理性的)인 의심(疑心)이다.
○ ‘정조(正祖) 13년(年)’이면 ‘서력(西曆) 1,789 년(年)’이다. 이때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보(修補)하면서, ‘한성부(漢城府) 호적(戶籍)’을 검사(檢査)하여 자운(字韻) 편차의 순서(順序)에 따라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21세기(世紀) 오늘날의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면, 이해불가(理解不可)한 내용(內容)들이 너무 많아,“동국(東國)”이란 옛 왕조(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곧 “반도(半島)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아래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동국(東國) 한성부(漢城府) 성씨(姓氏)”편을 보자. 즉(卽)
○ 靑莊館全書(盎葉記八) 東國諸姓 : 《今上十三年己酉.修輿地.撿漢城府帳籍諸姓.余以韻編次.而貫鄕.繁不能記. : 금상(今上 정조(正祖)) 13년【1,789년】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보했는데, 한성부(漢城府) 호적의 여러 성(姓)을 검사하여 내가 자운(字韻) 편차의 순서에 따라 기록했으나, 관향(貫鄕)은 번잡하여 다 쓰지 못했다.》
(01) 동운(東韻) 12성 / 홍(洪)ㆍ풍(馮)ㆍ공(公)ㆍ궁(宮)ㆍ공(空)ㆍ퉁(𤳈) 자서(字書)에 𤳈자가 없다. 속음으로 ‘퉁’으로 부른다. ㆍ공(工)ㆍ궁(弓)ㆍ동(童)ㆍ동(東)ㆍ충(充)ㆍ통(通)
(02) 동운(冬韻) 6성 / 용(龍)ㆍ종(鍾)ㆍ동(佟)ㆍ종(宗)ㆍ옹(邕)ㆍ동(冬)
(03) 강운(江韻) 3성 / 방(邦)ㆍ총(寵)ㆍ강(江)
(04) 지운(支韻) 13성 / 지(池)ㆍ피(皮)ㆍ기(奇)ㆍ추(追)ㆍ기(箕)ㆍ지(知)ㆍ사(司)ㆍ시(施)ㆍ이(伊)ㆍ자(慈)ㆍ자(玆)ㆍ비(丕)ㆍ사(篩)
(05) 미운(微韻) 2성 / 위(韋)ㆍ비(非)
(06) 어운(魚韻) 8성 / 서(徐)ㆍ여(余)ㆍ어(魚)ㆍ제(諸)ㆍ여(餘)ㆍ여(廬)ㆍ어(於)ㆍ허(虛)
(07) 우운(虞韻) 14성 / 오(吳)ㆍ노(盧)ㆍ유(兪)ㆍ주(朱)ㆍ호(胡)ㆍ도(都)ㆍ소(蘇)ㆍ부(夫)ㆍ노(蘆)ㆍ우(虞)ㆍ우(于)ㆍ호(湖)ㆍ오(烏)ㆍ수(輸)
(08) 제운(齊韻) 4성 / 제(齊)ㆍ규(奎)ㆍ비(鞞)ㆍ서(西)ㆍ
(09) 가운(佳韻) 1성 / 시(柴)
(10) 회운(灰韻) 6성 / 최(崔)ㆍ배(裵)ㆍ매(梅)ㆍ괴(槐)ㆍ내(來)ㆍ뇌(雷)
(11) 진운(眞韻) 12성 / 진(陳)ㆍ신(申)ㆍ진(秦)ㆍ신(辛)ㆍ빈(賓)ㆍ순(荀)ㆍ빈(彬)ㆍ신(莘)ㆍ인(仁)ㆍ은(銀)ㆍ진(眞)ㆍ춘(春)
(12) 문운(文韻) 5성 / 문(文)ㆍ은(殷)ㆍ운(雲)ㆍ군(群)ㆍ운(芸)
(13) 원운(元韻) 9성 / 손(孫)ㆍ원(元)ㆍ문(門)ㆍ온(溫)ㆍ탄(呑)ㆍ논(論)ㆍ원(袁)ㆍ은(恩)ㆍ돈(敦)
(14) 한운(寒韻) 8성 / 한(韓)ㆍ반(潘)ㆍ안(安)ㆍ간(干)ㆍ간(竿)ㆍ반(盤)ㆍ단(檀)ㆍ단(單)
(15) 산운(刪韻) 2성 / 반(班)ㆍ간(間)
(16) 선운(先韻) 21성 / 전(全)ㆍ권(權)ㆍ현(玄)ㆍ전(田)ㆍ천(千)ㆍ선(宣)ㆍ견(甄)ㆍ변(邊)ㆍ전(錢)ㆍ선(先)ㆍ천(遷)ㆍ연(延)ㆍ연(連)ㆍ연(燕)ㆍ견(堅)ㆍ전(專)ㆍ천(天)ㆍ천(芊)ㆍ연(年)ㆍ선(鮮)ㆍ연(蓮)
(17) 소운(蕭韻) 2성 / 요(姚)ㆍ요(要)
(18) 효운(肴韻) 1성 / 포(包)
(19) 호운(豪韻) 4성 / 조(曹)ㆍ고(高)ㆍ모(毛)ㆍ도(陶)
(20) 가운(歌韻) 5성 / 하(河)ㆍ나(羅)ㆍ다(多)ㆍ아(阿)ㆍ화(禾)
(21) 마운(麻韻) 4성 / 차(車)ㆍ화(花)ㆍ마(麻)ㆍ사(沙)
(22) 양운(陽韻) 26성 / 장(張)ㆍ황(黃)ㆍ강(姜)ㆍ방(方)ㆍ양(梁)ㆍ양(楊)ㆍ창(倉)ㆍ창(昌)ㆍ왕(王)ㆍ강(康)ㆍ강(强)ㆍ당(唐)ㆍ장(章)ㆍ방(房)ㆍ양(陽)ㆍ상(嘗)ㆍ상(相)ㆍ장(莊)ㆍ양(良)ㆍ강(羌)ㆍ장(長)ㆍ양(襄)ㆍ상(商)ㆍ창(菖)ㆍ황(皇)ㆍ창(蒼)
(23) 경운(庚韻) 9성 / 명(明)ㆍ성(成)ㆍ정(程)ㆍ평(平)ㆍ팽(彭)ㆍ정(貞)ㆍ경(庚)ㆍ형(荊)ㆍ경(京)
(24) 청운(靑韻) 6성 / 영(靈)ㆍ정(丁)ㆍ형(邢)ㆍ정(廷)ㆍ청(靑)ㆍ성(星)
(25) 증운(蒸韻) 10성 / 승(承)ㆍ승(勝)ㆍ승(僧)ㆍ승(昇)ㆍ증(曾)ㆍ응(應)ㆍ빙(氷)ㆍ승(升)ㆍ홍(弘)ㆍ능(能)
(26) 우운(尤韻) 8성 / 유(劉)ㆍ주(周)ㆍ추(秋)ㆍ모(牟)ㆍ구(仇)ㆍ구(丘)ㆍ유(由)ㆍ모(矛)
(27) 침운(侵韻) 9성 / 김(金)ㆍ임(任)ㆍ임(林)ㆍ음(陰)ㆍ금(琴)ㆍ심(尋)ㆍ금(禁)ㆍ심(深)ㆍ임(壬)
(28) 담운(覃韻) 1성 / 감(甘)
(29) 염운(鹽韻) 4성 / 염(廉)ㆍ엄(嚴)ㆍ염(閻)ㆍ점(占)
(30) 함운(咸韻) 3성 / 남(南)ㆍ범(凡)ㆍ함(咸)
(31) 동운(董韻) 2성 / 동(董)ㆍ공(孔)
(32) 종운(腫韻) 1성 / 봉(奉)
(33) 지운(紙韻) 6성 / 이(李)ㆍ사(史)ㆍ수(水)ㆍ기(起)ㆍ사(使)ㆍ사(仕)
(34) 어운(語韻) 2성 / 허(許)ㆍ여(呂)
(35) 우운(麌韻) 8성 / 우(禹)ㆍ노(魯)ㆍ호(扈)ㆍ두(杜)ㆍ유(庾)ㆍ오(午)ㆍ수(豎)ㆍ무(武)
(36) 제운(薺韻) 3성 / 계(啓)ㆍ미(米)ㆍ예(禮)
(37) 회운(賄韻) 4성 / 내(乃)ㆍ채(采)ㆍ매(母)ㆍ해(海)
(38) 진운(軫韻) 2성 / 민(閔)ㆍ윤(尹)
(39) 완운(阮韻) 1성 / 반(飯)
(40) 한운(旱韻) 1성 / 탄(憚)
(41) 산운(潸韻) 2성 / 간(簡)ㆍ판(板)
(42) 선운(銑韻) 4성 / 편(扁)ㆍ선(善)ㆍ연(軟)ㆍ건(件)
(43) 조운(篠韻) 2성 / 조(趙)ㆍ표(表)
(44) 호운(皓韻) 2성 / 호(好)ㆍ노(老)
(45) 가운(架韻) 1성 / 과(果)
(46) 마운(馬韻) 4성 / 마(馬)ㆍ사(舍)ㆍ먀(也) 속음이 ‘먀’이다. ㆍ하(夏)
(47) 양운(養韻) 4성 / 장(蔣)ㆍ앙(仰)ㆍ낭(浪)ㆍ광(廣)
(48) 경운(梗韻) 4성 / 경(景)ㆍ정(井)ㆍ병(秉)ㆍ영(永)
(49) 유운(有韻) 3성 / 유(柳)ㆍ수(守)ㆍ부(阜)
(50) 침운(寢韻) 1성 / 심(沈)
(51) 담운(琰韻) 1성 / 엄(奄)
(52) 염운(豏韻) 2성 / 범(范)ㆍ범(範)
(53) 송운(送韻) 4성 / 공(貢)ㆍ봉(鳳)ㆍ옹(瓮)ㆍ동(凍)
(54) 송운(宋韻) 1성 / 송(宋)
(55) 치운(寘韻) 7성 / 지(智)ㆍ계(季)ㆍ이(異)ㆍ사(泗)ㆍ자(自)ㆍ수(穗)ㆍ수(遂)
(56) 미운(未韻) 1성 / 위(魏)
(57) 어운(御韻) 2성 / 며(旀) 자서에 旀 자가 없다. 속음이 ‘며’이다. ㆍ초(楚)
(58) 우운(遇韻) 6성 / 구(具)ㆍ노(路)ㆍ우(遇)ㆍ소(素)ㆍ고(庫)ㆍ도(度)
(59) 제운(霽韻) 5성 / 예(芮)ㆍ계(桂)ㆍ계(契)ㆍ위(衛)ㆍ예(裔)
(60) 태운(泰韻) 5성 / 태(太)ㆍ애(艾)ㆍ채(蔡)ㆍ태(泰)ㆍ내(奈)
(61) 괘운(卦韻) 1성 / 개(介)
(62) 대운(隊韻) 1성 / 채(菜)
(63) 진운(震韻) 8성 / 인(印)ㆍ진(晉)ㆍ순(舜)ㆍ신(愼)ㆍ진(震)ㆍ순(順)ㆍ준(俊)ㆍ신(信)
(64) 원운(願韻) 3성 / 돈(頓)ㆍ만(萬)ㆍ헌(憲)
(65) 한운(翰韻) 4성 / 단(段)ㆍ판(判)ㆍ탄(炭)ㆍ한(漢)
(66) 산운(霰韻) 2성 / 변(卞)ㆍ편(片)
(67) 소운(嘯韻) 3성 / 소(邵)ㆍ소(召)ㆍ초(肖)
(68) 호운(號韻) 1성 / 호(號)
(69) 개운(箇韻) 1성 / 좌(佐)
(70) 마운(禡韻) 4성 / 가(賈)ㆍ야(夜)ㆍ화(化)ㆍ가(價)
(71) 양운(漾韻) 5성 / 상(尙)ㆍ장(將)ㆍ창(唱)ㆍ왕(旺)ㆍ장(壯)
(72) 경운(敬韻) 4성 / 정(鄭)ㆍ경(慶)ㆍ맹(孟)ㆍ정(正)
(73) 유운(宥韻) 3성 / 후(后)ㆍ당(當)ㆍ구(句)
(74) 염운(艶韻) 1성 / 염(念)
(75) 옥운(屋韻) 8성 / 육(陸)ㆍ목(睦)ㆍ복(卜)ㆍ국(鞠)ㆍ복(伏)ㆍ복(復)ㆍ목(木)ㆍ독(獨)
(76) 옥운(沃韻) 3성 / 옥(玉)ㆍ촉(燭)ㆍ독(篤)
(77) 각운(覺韻) 4성 / 박(朴)ㆍ탁(卓)ㆍ탁(濯)ㆍ학(學)
(78) 질운(質韻) 2성 / 길(吉)ㆍ필(弼)
(79) 물운(物韻) 1성 / 울(鬱)
(80) 월운(月韻) 3성 / 왈(曰)ㆍ골(骨)ㆍ발(發)
(81) 갈운(曷韻) 1성 / 갈(葛)
(82) 설운(屑韻) 5성 / 설(薛)ㆍ결(決)ㆍ설(偰)ㆍ설(雪)ㆍ철(哲)
(83) 약운(藥韻) 4성 / 곽(郭)ㆍ곽(霍ㆍ작(雀)ㆍ학(鶴)
(84) 맥운(陌韻) 4성 / 백(白)ㆍ석(石)ㆍ석(昔)ㆍ석(釋)
(85) 석운(錫韻) 2성 / 궉(鴌) 봉(鳳)의 고자, 속음으로 ‘궉’이다. ㆍ적(狄)
(86) 직운(職韻) 4성 / 국(國)ㆍ묵(墨)ㆍ직(直)ㆍ직(稷)
(87) 즙운(緝韻) 1성 / 즙(緝)
(88) 엽운(葉韻) 2성 / 섭(葉)ㆍ업(業)
(89) 복성(複姓) 7성 / 동방(東方)·사공(司空)·서문(西門)·선우(鮮于)·황보(皇甫)·남궁(南宮)·독고(獨孤)
지금 호적과 비교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더 실은 것을 별도로 아래와 같이 기록하니, 성씨가 옛날과 지금에 있어 유무가 부동함을 알 수 있다.
(90) 동운(東韻) 2성 / 옹(翁)ㆍ몽(蒙)
(91) 지운(支韻) 1성 / 시(時)
(92) 우운(虞韻) 3성 / 주(珠)ㆍ구(瞿)ㆍ오(吾)
(93) 제운(齊韻) 2성 / 혜(嵇)ㆍ제(堤)
(94) 회운(灰韻) 1성 / 태(苔)
(95) 원운(元韻) 2성 / 번(藩)ㆍ원(原)
(96) 한운(寒韻) 2성 / 환(桓)ㆍ단(端)
(97) 선운(先韻) 2성 / 원(員)ㆍ건(騫)
(98) 소운(蕭韻) 1성 / 표(標)
(99) 가운(歌韻) 3성 / 나(那)ㆍ하(何)ㆍ화(和)
(100)마운(麻韻) 2성 / 화(華)ㆍ과(瓜)
(101)양운(陽韻) 6성 / 장(㽵)ㆍ양(揚)ㆍ장(萇)ㆍ양(涼)ㆍ방(芳)ㆍ상(桑)
(102)경운(庚韻) 3성 / 영(榮)ㆍ경(卿)ㆍ경(庚)
(103)청운(靑韻) 1성 / 형(刑)
(104)증운(蒸韻) 2성 / 등(登)ㆍ승(乘)
(105)우운(尤韻) 1성 / 우(尤)
(106)침운(侵韻) 1성 / 침(侵)
(107)우운(麌韻) 3성 / 보(甫)ㆍ부(斧)ㆍ오(伍)
(108)호운(皓韻) 1성 / 초(草)
(109)경운(梗韻) 1성 / 경(梗)
(110)유운(有韻) 1성 / 부(部)
(111)송운(宋韻) 1성 / 종(種)
(112)치운(寘韻) 1성 / 위(位)
(113)우운(遇韻) 3성 / 부(傅)ㆍ고(固)ㆍ부(附)
(114)소운(嘯韻) 1성 / 요(尿)
(115)경운(徑韻) 1성 / 영(甯)
(116)유운(宥韻) 1성 / 우(祐)
(117)함운(陷韻) 1성 / 범(汎)
(118)옥운(屋韻) 3성 / 육(六)ㆍ욱(郁)ㆍ곡(谷)
(119)옥운(沃韻) 2성 / 곡(曲)ㆍ녹(綠)
(120)질운(質韻) 3성 / 필(畢)ㆍ율(律)ㆍ실(實)
(121)물운(物韻) 1성 / 물(物)
(122)월운(月韻) 1성 / 갈(碣)
(123)설운(屑韻) 1성 / 별(別)
(124)약운(藥韻) 2성 / 택(澤)ㆍ탁(拓)
(125)맥운(陌韻) 6성 / 석(席)ㆍ백(柏)ㆍ택(宅)ㆍ익(益)ㆍ책(冊)ㆍ혁(赫)
(126)석운(錫韻) 1성 / 적(翟)
(127)직운(職韻) 4성 / 익(翌)ㆍ칙(則)ㆍ역(力)ㆍ극(克)
(128)즙운(緝韻) 1성 / 입(入)
(129)복성(複姓) 2성 / 사마(司馬)ㆍ영호(令狐)
‘도곡총설(陶谷叢說)’ 이의현(李宜顯)이 지었다. 에는 2백 98성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호적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여기에 초(抄)한다.
(130)동운(東韻) 1성 / 풍(酆)
(131)동운(冬韻) 1성 / 공(龔)
(132)강운(江韻) 1성 / 쌍(雙)
(133)지운(支韻) 2성 / 사(思)ㆍ미(彌)
(134)회운(灰韻) 2성 / 태(台)ㆍ재(才)
(135)가운(歌韻) 1성 / 아(牙)
(136)지운(紙韻) 1성 / 궤(几)
(137)유운(有韻) 1성 / 수(壽)
(138)엽운(葉韻) 1성 / 섭(聶)
(139)복성(複姓) 2성 / 부여(扶餘)ㆍ석말(石抹)
- 이상(以上) 호적(戶籍) 4백 7성, 동국여지승람 79성, 도곡총설 13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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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莊館全書 57 盎葉記 四 / 新羅ㆍ高句麗ㆍ百濟ㆍ高麗의 기이한 성(姓)
(01) 숙씨(叔氏)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신라 애장왕(哀莊王)의 어머니 숙씨(叔氏)는 내물왕(奈勿王) 13세손 김숙명(金叔明)의 딸인데 동성(同姓)임을 혐의쩍게 여겨 아버지의 이름 ‘숙(叔)’자를 따서 씨(氏)로 삼았다.” 하였다.
(02) 정씨(貞氏) 《동국통감》에 “신라(新羅) 애장왕비(哀莊王妃)는 정씨(貞氏)다.” 하였다.
(03) 대실씨(大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에 비류부장(沸流部長) 추발소(鄒勃素)에게 성(姓) 대실씨(大室氏)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4) 송씨(松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비(瑠璃王妃)는 다물후(多勿侯) 송 양(松讓)의 딸이다.” 하였다.
(5) 극씨(克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朱蒙)이 마의 재사(麻衣再思)에게 성(姓) 극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6) 중실씨(仲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납의 무골(衲衣武骨)에게 성 중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7) 소실씨(少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조의 묵거(藻衣黙居)에게 성(姓) 소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8) 낙씨(絡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대신무왕(大神武王) 5년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항복하자 봉하여 왕(王)을 삼아 연부(椽部)에 두고, 그의 등에 낙(絡)자가 있으므로 성을 낙씨(絡氏)라 내려주었다.” 하였다.
(09) 예씨(禮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시조(始祖)가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하였다.
(10) 을지씨(乙支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 문덕(乙支文德)이 있었다.” 하였다.
(11) 천씨(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을 시해(弑害)했다.” 하였다.
(12) 화씨(禾氏)와
(13) 치씨(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에 두 여희(女姬)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였다.” 하였다.
(14) 북씨(北氏)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북(北)은 고려(高麗)의 성(姓)이다.” 하였고, 《정자통(正字通)》에 또한 인용되었다.
(15) 사선씨(似先氏) 《만성통보》에 “사선씨는 본래 고려의 유종(遺種)인데 당(唐) 나라 무덕(武德) 중엽에 사선 영문(似先英問)으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삼았다.” 하였다.
(16) 부여씨(扶餘氏) 《동국통감》에 “부여씨는 백제(百濟)의 성(姓)인데 계통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氏)를 삼았다.” 하였고, 《만성통보》에 “백제의 부여씨는 음(音)이 변전되어 부유(鳧臾)로 되었다.” 하였다.
(17) 흑치씨(黑齒氏) 《만성통보》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이다.” 하였다.
(18) 사씨(沙氏)
(19) 연씨(燕氏)
(20) 협씨(劦氏)
(21) 진씨(眞氏)
(22) 해씨(解氏)
(23) 골씨(骨氏)
(24) 목씨(木氏)
(25) 구씨(𦭻氏)
《북사(北史)》에 “백제(百濟)의 대성(大姓)이 8족(族)이 있으니, 사(沙)ㆍ연(燕)ㆍ협(劦)ㆍ진(眞)ㆍ해(解)ㆍ골(骨)ㆍ목(木)ㆍ구(𦭻)이다.” 하였다. 《만성통보》에 “상곡(上谷)에 백제(百濟)의 8성 중에 그 하나는 진(眞)인데, 한(漢) 나라의 진우(眞祐)는 태위장사(太尉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으며, 진현토(眞玄菟)는 산(筭)을 잘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협(劦)은 《북사(北史)》에 “힘력자[力] 셋을 붙여 협(劦)을 만들었는데 음(音)은 협(協)이다.” 하였고, 《만성통보》에는 “칼도자[刀] 셋을 합해 여(刕)자를 만들었는데 음(音)은 여(黎)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세 개의 도(刀)자로 이루어진 여(刕)자가 있고 세 개의 조(刁)로 된 여(刕)는 없으니, 세 개의 도(刀)로 된 것이 음이 여(黎)라면 아마도 세 개의 조(刁)로 된 것은 와전인 듯하다.그리고 구(𦭻)는 음(音)이 구(臼)인데 《북사(北史)》에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만들었다.” 하였으며, 《만성통보》에는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𦭻를 만들었는데 𦭻의 음은 구(舊)고, 백(苩)의 음은 백(白)이다.” 하였다. 《운회(韻會)》에 “백제에 백씨(苩氏)가 있다.” 하였으니, 의당 초두[艸] 아래에 백(白)을 붙인 글자를 따라야 한다.
(26) 문씨(門氏) 《씨족서(氏族書)》에 “문사명(門思明)은 인천(仁川) 사람으로 정종(靖宗) 때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다.” 하였다.
(27) 아씨(牙氏) 《씨족서》에 “아응시(牙應時)는 명종(明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28) 빈씨(賓氏) 《씨족서》에 “빈우광(賓于光)은 수성(壽城)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또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하였다.
(29) 풍씨(酆氏) 《씨족서》에 “풍순지(酆順之)는 정종(靖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였다.” 하였다.
(30) 이씨(異氏) 《씨족서》에 “이응보(異應甫)는 현종(顯宗) 때에 좌복야(左僕射)였다.” 하였다.
(31) 승씨(僧氏) 《씨족서》에 “승우본(僧牛本)은 고종(高宗) 때에 도령령사(都領令史)였다.” 하였다.
(32) 태씨(太氏) 《씨족서》에 “태집성(太集成)은 고종(高宗) 때에 사공(司空)에 수직(守職)하였다.” 하였다.
(33) 간씨(簡氏) 《씨족서》에 “간유지(簡有之)는 충렬왕(忠烈王)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34) 추씨(秋氏) 《씨족서》에 “추적(秋適)은 충렬왕 때에 좌사간(左司諫)이었다.” 하였다.
(35) 범씨(凡氏) 《씨족서》에 “범영부(凡永富)는 신우(辛禑) 때에 문화안집사(文化安集使)였다.” 하였다.
(36) 지씨(智氏) 《씨족서》에 “지채문(智蔡文)은 봉주(鳳州)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에 우복야(右僕射)였다.” 하였다.
(37) 야씨(夜氏) 《씨족서》에 “야선단(夜先旦)은 충렬왕 때에 좌부승지(左副承旨)였다.” 하였다.
(38) 흔씨(昕氏) 《씨족서》에 “흔 적신(昕迪臣)은 풍천(豐川) 사람으로 고려 호장(高麗戶長)에 보승별장(保勝別將)이었는데 5세손(世孫) 섬(暹)이 충목왕(忠穆王)의 휘(諱)를 피하여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권씨(權氏)가 되었으며, 벼슬은 검교예빈랑(檢校禮賓郞)이었다.” 하였다. 상고하대 섬(暹)은 바로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5세조(祖)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羅勾濟麗奇姓 : 叔氏。東國通鑑。新羅哀莊王母叔氏。奈勿王十三世孫。金叔明之女也。嫌▦同姓。以父名叔爲氏。貞氏。東國通鑑。新羅哀莊王妃貞氏。 大室氏。東國通鑑。高勾麗大武神王十五年。賜沸流部長鄒㪍素姓大室氏。 松氏。東國通鑑。高勾麗瑠璃王妃。多勿矦松讓女。 克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麻衣再思姓克氏。 仲室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衲衣武骨姓仲室氏。 少室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藻衣默居姓少室氏。 絡氏。東國通鑑。高勾麗大神武王五年。扶餘王帶素從弟投降。封爲王。置掾部。以其背有絡文。賜姓爲絡氏。 禮氏。東國通鑑。高勾麗始祖在扶餘。娶禮氏。生類利。 乙支氏。東國通鑑。高勾麗嬰陽王時。有乙支文德。 泉氏。東國通鑑。高勾麗泉葢蘓文弑榮留王。 禾氏,雉氏。東國通鑑。高勾麗瑠璃王。有二姬。曰禾姬,雉姬。 北氏。萬姓統譜。北高麗姓也。正字通。亦引之。○中國人。以高勾麗。爲高麗。 似先氏。萬姓統譜。似先氏。本高麗遺種。唐武德中。似先英問。爲右驍衛大將軍。 扶餘氏。東國通鑑。扶餘氏。百濟姓。以系與高勾麗同出扶餘。故爲氏。萬姓統譜。百濟之扶餘。音轉爲鳧臾氏。 黑齒氏。萬姓統譜。黑齒常之。百濟西部人。 沙氏,燕氏,劦氏,眞氏,解氏,骨氏,木氏,𦭻氏。北史。百濟大姓八族。沙燕劦眞解骨木𦭻。萬姓統譜。上谷百濟八姓。其一曰。眞漢,眞祐。太尉長史。眞欽太医令。眞玄菟善筭。○案劦北史。以三力作劦。音協。萬姓統譜。以三刁作刕。音黎。未知孰是。然考字書。有三刀之刕。無三刁之刕。三刀者。音黎。則恐譌爲三刁。𦭻音。北史。艹下臼。作𦭻。萬姓統譜。以艹下臼。作𦭻。萏音舊。苩音白。韻會曰。百濟有苩氏。則當從艹下白。 門氏。氏族書。門思明。仁川人。靖宗時。御史中丞。 牙氏。氏族書。牙應時。明宗時中郞將。 賓氏。氏族書。賓于光。壽城人。魁科。又中制科。翰林學士。筆法名世。 酆氏。氏族書。酆順之。靖宗時。監察御使。 異氏。氏族書。異應甫。顯宗時。左僕射。 僧氏。氏族書。僧牛本。高宗時。都領令史。 太氏。氏族書。太集成。高宗時守司空。 簡氏。氏族書。簡有之。忠烈王時中郞將。 秋氏。氏族書。秋適。忠烈王時左司諫。 凡氏。氏族書。凡永富。辛禑時文化安集使。 智氏。氏族書。智蔡文。鳳州人。顯宗時右僕射。 夜氏。氏族書。夜先旦。忠烈王時。左副承旨。 昕氏。氏族書。昕廸臣。醴川人。高麗戶長。保勝別將。至五世孫暹。避忠穆王諱。從母姓。爲權氏。官檢校禮賓郞。○ 案暹卽權睡軒五福。五世祖也。
○ 靑莊館全書 55 盎葉記 二 / 뉴(妞)ㆍ왁(𨶠)ㆍ훵(遤)ㆍ할(㔛)ㆍ뼘(乀) : 우리나라의 기이한 성 중에 가장 기이한 것들을 지금 적기로 한다.
(1) 《자휘(字彙)》에, “妞의 음은 뉴(紐)로 사람의 성(姓)인데, 고려(高麗)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상고해 보면《자휘》에 비록 妞자의 성(姓)이 실려 있지만,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2) 광주(廣州)에 ‘𨶠’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음이 와억절(臥憶切) 언문의 음은 ‘왁’이다. 이라고 자칭한다. 그러나 《자휘》에, “𨶇의 음은 오(塢)로 작은 문이다.” 하였을 뿐 𨶠자는 없으니, 본래 오(𨶇)자 성이었던 것이 𨶠자로 잘못된 것이나 아닌지.
(3) 연안(延安)에 “遤”자의 성이 있는데, 그 음은 훤응절(暄應切) 언문의 음은 ‘훵’이다. 이나 자서(字書)에는 없다.
(4)《강화지(江華志)》에, “㔛”자의 성이 실려 있다. 상고하건대 자서에는 劼자가 있는데, 음은 할(轄)이고《설문(說文)》에는 삼간다는 뜻으로 되어 있고, 《상서(商書)》 주고(酒誥)에는, 여할비은헌신(汝劼毖殷獻臣)【너는 은(殷)의 좋은 신하들을 힘써 삼가라는 뜻】이라는 구절이 있으니, ‘㔛’자는 혹 ‘할(劼)’자를 ‘세로 쓴 것’이 아닌지.
(5) 흥양(興陽)의 목동(牧童)에 “乀”자의 성이 있는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이후암(李厚菴) 만운(萬運) 이 지금《문헌비고(文獻備考)》를 증수하면서 나에게 기이한 성(姓)을 물어왔기에 이것으로 답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역) | 1981》
妞𨶠遤㔛乀 : 我國奇姓中最奇者。今錄之。字彙。妞音紐。姓也。高麗有之。案字彙。雖載妞姓。而未聞爲何貫。廣州有𨶠姓人。自稱音卧億切。諺音왁。 字彙。𨶠音塢。小門而無𨶠字。無乃本𨶠姓。而譌爲𨶠歟。延安有遤姓。音喧應切。諺音훵。字書。無之。江華志。載㔛姓。案字書。有劼字。音轄。說文。愼也。書酒誥。汝劼毖殷獻臣。㔛字或劼字之縱結歟。興陽牧子。有乀姓。貫密陽。音뼘。李厚菴 萬運。 方增修文獻備考。訪余以奇姓。以此應之。
○ 위의 기록(記錄)에서 살펴보듯,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수많은 성씨(姓氏)들은 어디로, 왜 사라졌는가? 물론(勿論) 세월(歲月)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인간(人間)무리들에 있어 숙명적(宿命的)이랄 수 있으나, 세월(歲月)이 흐르면 흐를수록 없어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특히 인간(人間)의 혈통(血統)에 대한 것들을 보면, 위에서 말하는 바에, 수긍(首肯)하기 어려운 실정(實情)이다. 〈“수백(數百) 개(個)의 성씨(姓氏)가 ‘일백(一百) 여년(餘年)’만에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는, 곧 이 땅(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형편(形便)과 비교(比較)를 해보면, 똑같은 봉건왕조(封建王朝) 및 유학(儒學)인 공맹학(孔孟學)을 중심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고려(考慮)하면, 과연(果然) 이러한 특이(特異)한 현상(現狀)이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가? 매우 회의적(懷疑的)이다. 또,
한반도(韓半島)인들의 혈통(血統)에 대한 집념(執念)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가? 심사숙고(深思熟考)를 거듭해 보아야 할 것 같다.
○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접해보면 “황당(荒唐)”할 뿐이다. 특히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인들의 성씨(姓氏) 중에서 ‘김(金)·이(李)·박(朴)’이 45%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결과론(結果論)이지만 : 근래(近來)의 국제결혼(國際結婚)과 외국인(外國人)들의 귀화(歸化)로 인한 ‘귀화(歸化) 성씨(姓氏)’를 제외(除外)하면 : 대략(大略) 250 ∼ 280개 성씨(姓氏)일 것으로 파악(把握)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20∼30개” 정도(程度) 성씨(姓氏)가 인구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 200개가 넘는 성씨(姓氏)들은 소수(小數)의 국민(國民)들로 살아가고 있다. 이건 팩트[Fact]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列擧)한 많은 ‘성씨(姓氏)’ 중에서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시절(時節)의 기세등등(氣勢騰騰)했던 제왕(帝王), 제후(諸侯), 토호(土豪), 대신(大臣) 등의 많은 귀족(貴族)들의 혈통(血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한반도(韓半島) 땅에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 있어야 할 성씨(姓氏)들임에도 불구하고, 기세등등(氣勢騰騰)했던 제왕(帝王), 제후(諸侯), 토호(土豪), 대신(大臣) 등 귀족(貴族)들의 많은 성씨(姓氏)가 아예 사라졌거나, 없거나, 소수(小數)가 있다는 것 자체(自體)가 상식적(常識的)이지 않다.
이는, 한국사(韓國史)가 아닌 ‘조선사(朝鮮史)’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思考), 발상전환(發想轉換)이 필요(必要)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씨(姓氏) 들은, 흔적(痕迹)조차 찾을 길이 없으며, 수많은 성씨(姓氏) 들의 후손(後孫)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모두 소멸(消滅)되어 사라져버린 건가? 그렇다면 지금 반도(半島) 땅에 있다는 성씨(姓氏)들의 정체(正體)는 뭔가?
➤➤➤ 그러나 ‘대륙(大陸) 땅’으로 눈을 돌려보면 상황(狀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희귀(稀貴) 성씨(姓氏)든 흔한 성씨(姓氏)든 위에서 언급(言及)한 많은 성씨(姓氏)들이 지금도 존재(存在)하며 그들만의 혈통(血統)과 씨족(氏族)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혈통(血統)과 씨족(氏族). 후손(後孫)과 후예(後裔)는, 인간(人間) 무리에게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하며 ‘DNA’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인간(人間) 무리이기를 부정(否定)하는 것과 같다.』
2023년 05월 23일 [글쓴이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