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섬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윤선도는 막대한 부를 자기 왕국을 꾸미는데 쓴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고산에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다.
그들만의 낙원이었던 쓸쓸한 섬에 동백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보길도를 가려면 노화도를 관통한 뒤 보길대교를 건너가야 한다
보길대교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는 보길대교가 놓여 있다.
2008년 개통된 보길대교는 길이가 620m로 되어 있다.
1보길대교와 2보길대교 2개의 교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2보길대교에 세워져 있는 보길도의 관문이 멋스럽다.
"여기가 보길이냥"
센스 있는 벽화가 참 재미있다.
청별항
청별(淸別)이란 '맑은 이별'이란 뜻이다.
윤선도가 이곳에서 손님을 떠나보냈다 해서 제법 서정적인 이름을 얻었다.
당시엔 나름 흥청댔을 청별항은 이젠 쓸쓸한 항구가 되었다.
이제 청별항에는 이별이 없다.
느리고 느린 고요와 몇몇의 음식점과 햇빛이 있을 뿐이었다.
송시열 글씐바위로 가는 길에는 우아한 동백숲이 있었다.
상록수 터널을 지나면 바로 바다가 나타난다.
송시열 글씐바위
해안 절벽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향하는 유배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글씨는 많이 훼손되어 형태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든셋 늙은 몸이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북녘의 임금님을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아들기만 기다리네
이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글씐바위에 새겨진 시 전문
예송리 해수욕장
검푸른 갯돌 해변으로 인해 명성이 자자하다.
실제 해수욕을 하기는 적당치가 않다.
수심이 깊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이곳은 앉아서 놀기에 좋은 곳이다.
예송리 상록수림
갯돌 해변에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이 있다.
약 300년 전에 태풍을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만든 숲이다.
물고기떼를 유인하는 어부림의 구실도 하고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예작도와 복생도
예작도는 예송리와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예의범절이 밝아 예작도란 이름을 얻었다.
예작도 뒤의 무인도 복생도는 풍란 자생지로 유명하다.
보길도가(1)
「섬을 빚다. 보길도를 담다.」
보길도의 자연과 어우러진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다.
보길도에서 가양주 방식으로 빚는 수제 막걸리다.
보길도가(2)
보길도가에서는 자연 발효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고 있다.
찹쌀과 물 그리고 누룩 외에는 첨가물이 없다.
막걸리 한 잔에 섬의 자연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은 양조가 박영수씨의 미소에서 막걸리 향이 풍겨나왔다.
보길씨막걸리(9도) 2병과 고산맑은막걸리(12도) 1병을 구입하였다.
가격은 1만 5천원과 2만 5천원으로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젊은 양조가의 열정에 반해 기분좋게 구입했다.
기대했던 동백막걸리는 이제 발효중이라고 하였다.
세연정으로 가는 길에 동백꽃이 흐드러졌다.
파도처럼 부서지고 싶은게다
내가 다시 너를 찾아왔을 때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을 겹겹이 하얗다
왔다 가는 바람을
잡아두고 싶은 것이었을까
퍼런 손등 위로
너는 또 그렇게 새하얀 눈을 모아 두었지만
핏줄을 내려 앉힌 뿌리를
깜깜한 눈에 나는 결국 알 수가 없었다...............................................백영수의 詩 <흰동백꽃> 부분
세연정(1)
세연정은 자연 속에 만들어진 비밀정원 같은 곳이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다'는 뜻이다.
윤선도는 세연정의 양 옆에 자리한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시를 읊었다.
그리고 무희들의 노니는 모습을 감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민초들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세연정(2)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누정 공간이다.
말하자면 위락시설인 셈이다.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어부사시사> 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의 <어부사시사>에는 어부의 현실이 없고 어부의 풍경만 있었다.
꽃 세상의 땅, 천지는 온통 핏빛이다.
피어서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동백이 아름다운 건 질 때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꽃 시절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온 목숨 던져 지는 꽃...
옥소대
윤선도가 활쏘기 연습을 하던 표석으로 이용한 바위다.
그는 막대한 부를 자기 왕국을 꾸미는데 허비하였다.
그렇다면 정녕 고산은 낙원을 얻었던 것일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다.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김초혜의 詩 <동백꽃 그리움> 전문
대책 없이 타오르다 붉게 지는 목숨...
동백꽃은 서늘한 결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밤새 달빛 그리도 밝더니만
새벽 목마름 달래려고 찾아간 세심당 돌샘가엔
어젯밤 달님이 놀다 간 흔적 가뭇없고
산 그림자 모로 박힌 샘물에선 단내가 나네요
아마도 밤새 동백나무와 흥건히 젖어 놀던 상현달이
새벽녘에 뒷물이라도 하고 간 걸까?
나도 몰래 불경스런 생각에 귓볼이 붉어져
표주막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글쎄, 등뒤의 동백나무는 또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붉어진 꽃송이 툭! 툭! 떨구네요..............................................................................김경윤의 詩 <달빛 정사(精舍)> 부분
옛날 선비들은 귀양지에 동백나무가 있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떨어진 동백꽃을 보면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것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동백꽃이 주는 애처로움이 더 강했던 모양이다.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와 설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조성한 초당이다.
고산은 51세에 13세 소녀였던 설씨녀를 만나 평생을 사랑하였다.
보길도의 집들은 첩실과 그 자식들이 기거하는 집이었다.
낙서재(樂書齋)
근래에 복원된 낙서재 권역은 고산의 주거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에 기거하며 보길도에서 얻은 자식과 제자를 길러냈다.
고산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컴퓨터의 글씨체로 찍어낸 현판이 너무 무성의해서 실망하였다.
부용동 원림(園林)
주택 속에 인위적인 조경을 한 것이 정원이다.
자연을 그대로 조경으로 삼아 집과 정자 등을 배치한 것이 원림이다.
지형이 ‘연꽃 봉오리가 피는 듯하다’고 해 ‘부용(芙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고고한 매화꽃뿐이다.
복원된 건물은 화려했으나 혼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망끝전망대
뾰족산에 오르기 위해 보옥리로 차를 몰았다.
장쾌한 바다를 보려면 보옥리 마을로 가야 한다.
망끝전망대는 보길도의 가장 서쪽인 망월봉 끝자락에 있다.
보죽산(甫竹山) 뾰족산(195m)
보옥리에는 보죽산(195m)이라는 봉우리가 솟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소뿔을 잘라 놓은 것 같다 해서 뾰족산이라 부른다.
망루처럼 보옥리 바닷가에 뽀족하게 솟아있는 단일 암봉이다.
뾰족산의 들머리에서 동백꽃을 따라 들어간다.
키 큰 동백나무가 빽빽히 우거져서 어두컴컴하다.
이정표는 없지만 빠알간 꽃잎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동백숲이 끝나는 곳에 돌탑이 나타난다.
미세먼지가 옅게 깔려서 전망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계단이 가파르고 좁고 낡아서 불안하였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몸이 휘청인다.
혹시나 뱃길이 끊길까봐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아찔한 절벽의 암반 위에 돌탑이 세워져 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바로 코앞에 있는 정상은 포기하였다.
보옥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뾰족산에 용이 살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보옥리라 했다.
보길도에서 멸치잡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섬사람들은 뽀리기, 뽀래기라 한다.
동백꽃은 세 번 핀다.
나무에서, 땅에서, 마음 속에서...
보옥리 공룡알해변
보옥리 바닷가로 내려가면 해변을 가득 채운 몽돌들을 볼 수 있다.
공룡알해변의 바람은 유독 거칠고 파도 역시 세다.
투박한 풍광 속으로는 기묘한 바위들이 무리 지어 서 있다.
마치 공룡무리가 알을 잔뜩 낳은 듯한 모양이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한결같이 둥글둥글하다.
쓰르륵 쓰르륵...공룡알 사이로 드나드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노화동천항에서 오전 11시 20분에 출항하는 만세호를 타고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