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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품에 참예하라(벧후1:1-11)-2024.8.4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상’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첼렘’입니다. 영어는 image로 번역하였습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어떤 사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이 서로 닮은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 간에 찾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닮은꼴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영원한 지존자이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이 어찌 비슷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의 의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성과 영성과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할 수 있는 감정과 의지와 양심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유일하게 인간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며, 반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되어질 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세상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피조물이라도 인간보다 위대할 수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피조물이라도 인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존귀하게 보일지라도 인간보다 존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관리하는 대리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8장19절에 보면,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후사로서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과 피조물의 회복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되기만을 말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깨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지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죄가 있는 한 하나님과 인간은 교제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죄의 담이 무너져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사람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은 반드시 세 가지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입니다. 칭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신의 성품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화는 신의 성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함은 칭의로 시작되고 성화로 발전하며 영화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성품에 참예함은 성화를 이루는 목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간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지요. 문제는 그 깨어진 관계회복을 누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혹은 세상의 어떤 신도 할 수 없습니다. 깨어진 관계회복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신 것이지요. 관계가 회복되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죄의 장벽을 우리 인간이 무슨 재주로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 어떤 사람도 어떤 신도 죄의 장벽은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죄의 장벽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있는 장벽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의 물리적인 힘으로 죄의 장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죄의 장벽은 오히려 철통같이 보강이 될 뿐입니다. 사단은 오히려 무너진 곳을 더 강한 것으로 보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혹시 인간의 어떤 선행으로 죄의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죄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힘센 사람도 못합니다. 제 아무리 착한 사람도 못합니다. 어떤 종교의 교주도 못합니다.
죄의 장벽은 사망으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사망의 장벽을 감히 어떤 인간이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죄의 장벽을 스스로 무너뜨려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과 착함과 정직함을 무기삼아 호기를 부리지요. 때로는 말씀과 기도와 경건의 능력으로 도전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죽인다는 말씀으로 도전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의 도전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도전 앞에서도 죄는 호락호락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모한 도전일 뿐입니다.
죄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죄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당신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것이지요. 그분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그분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주십니다. 죄의 담을 무너뜨려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분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죄의 담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죄의 담이라도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려다가 중단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십니다. 스가랴서4장6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러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성전 재건하는 데 장애물들이 많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시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로 오신 그리스도십니다. 실제로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이 무너뜨리신 담을 재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무너뜨린 담은 완전하게 파쇄된 것입니다. 마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로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형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1장15절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당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본 자들은 하나님을 풍성히 누리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보다 풍성히 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지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수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신히 턱걸이로 구원을 받은 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 전 후서를 보냅니다. 베드로전서가 주로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를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베드로후서는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난과 배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4절). 이것은 모든 믿는 자의 목표인 셈이지요.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1절). 베드로는 그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교제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도 각자에게 주어진 성품이 있고, 사단도 사단만의 성품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품을 갖고 계시지요. 믿는 자는 그 성품이 어떤 성품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인지 사단의 성품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크게 보면 사단의 성품은 악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부분 두 성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이 살아갑니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때로는 원치 않게 사단의 성품을 받아들이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은 금방 사단의 성품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단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사단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서 피터지게 싸우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고상한 용어로 영적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전쟁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살 것이냐, 혹은 사단의 성품에 미혹당한 채 살 것이냐의 싸움입니다. 이른바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의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전쟁은 우리의 육신이 죽어야 끝이 납니다. 분명한 것은 믿는 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사단의 성품을 지지하고 인정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제일 되는 목표입니다.
(2)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됩니다. 주님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지요. 만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자가 아니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찌 예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인간의 수고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종교적인 열심이나 선한 양심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하며, 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함은 예수님이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와 왕이 되시고, 나의 머리와 전부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분이 공급하시는 능력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분의 믿음이 하나님의 성품이요, 소망이 하나님의 성품이며, 사랑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품일지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아니한 자들일지라도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말로 법 없이 살아갈만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없는 그들의 성품은 인간의 성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인간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본성일 뿐이지요.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성품이라 할지라도 선한 성품이 있고, 악한 성품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품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 성품이 선할지라도 세상적으로는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영적 성품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성품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성품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 성품의 기준이 무너지면 믿음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 세상에서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좋은 것이라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성품인지, 혹은 내 스스로의 성품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주어진 성품인지, 믿음과 상관없는 자연인으로서의 성품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논리입니다. 결국 나의 성품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품인지, 혹은 내 스스로의 성품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선한 성품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지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는 것처럼, 성품도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좋은 성품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성품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안에 주님이 계시는 지의 여부입니다. 주님 없는 어떤 성품도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주시는 성품을 갖는 것이 진짜 좋은 성품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좋은 성품을 바라지 마시고 내안에 주님이 주시는 성품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품을 사모하라는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요? 세상 정욕을 인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4절). 그것은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오직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신의 성품에 참예함을 받은 자들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요(1절), 보배로운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4절).
사도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의 덕목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5절부터 7절까지 여덟 가지 덕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우애, 형제우애에 사랑입니다. 이른바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와 경건, 형제우애와 사랑인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나오는 덕목들이 반드시 이 순서대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들이라는 것이지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을 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믿음을 거론하고 마지막에 사랑을 거론합니다. 그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받은 것이지요(1절).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시고 불러주셨음을 아는 믿음이지요(3절).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공급된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반드시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도 덕을 세우는 믿음도 있고, 덕을 가리는 믿음도 있거든요. 솔직히 믿음을 들먹이면서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믿음도 자기중심적인 믿음이 있고, 하나님중심적인 믿음이 있거든요.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율법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의롭다고 여기는 믿음이지요. 반드시 덕을 세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은 오직 내안에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믿음입니다.
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동반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완전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3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2절).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은 영생에 이르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지식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됩니다.
아무리 풍성한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절제할 줄 모르면 헛것입니다. 잘못하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만 익지 않는 벼가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지요. 지식도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기 쉽지요. 때문에 지식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 없는 지식은 유익보다는 유해함을 주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절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절제하지 못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단에 빠진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절제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절제 없는 자기들의 지식 때문에 이단에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절제는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절제는 속성상 인내가 수반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인내는 경건을 요구하지요. 경건은 형제우애를 요구하고, 형제우애는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한 이 모든 덕목들 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를 공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덕목인 것입니다.
(3)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의 방법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함은 믿음으로 기초를 닦고, 소망으로 집을 세워서, 사랑으로 지붕을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한 이 모든 덕목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들인 것이지요. 이 모든 덕목들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며 보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8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든 교회들마다 흡족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는 자라면 소경이라는 것입니다(9절). 영적소경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자들은 원시치 못하고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은 자라는 것입니다. 원시치 못한 자라는 것은 근시안을 가진 자라는 말이지요. 눈앞에 있는 세상의 것은 보이지만 멀리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알지 못하는 자라는 말이에요. 이런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이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과거에 청산된 죄사함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그런 자들은 개처럼 토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벧후2:22).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인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거룩함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함을 좇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거듭남은 단회적이지만 성화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감은 오직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의 성품에 참예함이 말로는 쉽지만 쉽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내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이나 공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럴싸한 종교적인 간증거리가 있을지라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가 막힌 은사가 있을지라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종교적인 연륜이나 경륜이 있을지라도, 혹은 종교적인 직분이 있을지라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다만 영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지요. 때문에 신의 성품에 참예함을 입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주님이 내안에 계셔야 신의 성품을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성품 자체도 모르고,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먼저 내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시는지의 여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3장5절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발전소에서 전류를 공급하지 않는데 아무리 스위치를 작동한들 전깃불이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내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신의 성품에 참예함을 입으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나의 주로, 왕으로, 전부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임이 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을 시켜주시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요한1서5장12절에,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오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속적으로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나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분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그분이 행하시는 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른바 새 언약의 복음인 것이지요.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주님 마음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믿는 자는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자라고 말합니다(1:11). 하나님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천국의 시민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시민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것이지요.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오직 주님 마음 되어 살아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함을 입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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