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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해성교회 순교자 정연행 전도사
순교자 정연행은 1887년 군산시 선연리에서 출생하여 1925년 개복교회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구원받았다. 남편을 구원시킨 후 시댁을 구원하고자 원당교회(1927)를 설립하였다. 1930년 군산 구암교회 성경학교에서 전도사 자격을 취득한 후, 익산 용산교회(1936~37), 다송교회(1938~42), 익산제일교회(1942~44)에서 시무하였고, 해성교회를 설립하고(1946년) 시무 중에 한국전쟁을 만나 순교하였다. 첫 개척지 원당마을은 미신 섬기기를 좋아하고 봉건사상이 강하였지만, 정연행은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철야기도하고, 신발이 닳아 1년에 몇 켤레 해질 정도로 열심히 전도했다. 그 전도로 원당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갔다.
순교자 정연행 전도사
해방 후 정연행 전도사는 단정한 용모, 뛰어난 연설, 명석한 판단력과 지혜로 대한민국 옥구군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았고,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역 공산주의자 십수명을 찾아가 집중적으로 설득하여 전향시킨 바 있다. 해방 후 정부는 치안 유지를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구속했을 때, 경찰서장을 찾아가 담판하여 20여 명을 석방시켰다. 석방되지 못한 자들은 6.25가 발발하자 경찰이 다 사살하였다.
전연행 순교자가 설립한 해성교회
공산 치하가 되었을 때, 석방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전도사님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보호하겠소” 장담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예수 믿지 말고 우리 여성위원장이 되시오!” 강요했다. 정연행 전도사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수차례 끌려가 구타당하고 고문당했다. 이런 형극에 피난을 권유했지만 정 전도사는 “다 피난 가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겠느냐? 일제강점기 때도 신사참배를 믿음으로 이겼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지키겠다.”며 피난을 거절하였다.
정연행 전도사 순교비 앞에서 필자
정연행 전도사는 일제강점기 때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킨 죄목으로 9월 25일 추석 전날 붙잡혀가 9월 28일 군산 은파유원지 근처에 있는 원당리 창고개에 일본군이 파 놓았던 방공호 속에서 윤응칠 집사, 윤행원 성도, 이춘석 집사, 조봉익 성도, 김두명 성도, 문병길 성도와 함께 해성교회 교인 7인, 정연행 전도사가 개척한 원당교회 교인 14인(이포엽 집사, 신덕례 집사, 신덕휘 집사 등), 신관교회 교인과 우익인 들이 함께 학살당했고 시신은 10월 2일에야 발견되었다.
2018년 정연행 전도사 추모예배시 후손들
당시 원당 굴 앞에서 순교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들이 죽창과 총칼을 들고서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만 해라, 그러면 살려주마.”하며 유혹하고 위협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정 전도사는 침착한 모습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오”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공산당은 시민들을 굴속에 생매장하고 굴 입구를 흙으로 메워버렸다. 정 전도사의 유해는 굴속 가장 깊은 곳에서 홀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군산시에는 약 15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져 생매장되거나 우물에 수장당한 민간인이 213명(유족회 통계)에 이르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9월 30일(토) 미군 25사단 2연대가 군산을 수복(收復)시킴으로 10월 1일 주일부터 감격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순교자 정연행 후손들
순교한 정 전도사의 가족들은 두 아들 홍천봉, 홍만봉과 장손녀 홍청자가 포함되었다. 후손 가운데 목회자는 홍성자, 박영신(孫), 홍경택, 박민영(曾孫) 목사가 있고, 아들 중에 홍삼봉, 홍팔봉 장로, 손자 중에 홍상근, 홍성근, 홍충인, 홍성석, 홍진석, 홍귀심, 홍정석 장로가 있고, 손주사위 중에 강윤철, 국정옥, 정성수, 박현명, 조남성 장로가 있고 증손 중에 홍광택 장로가 있다. 정연행 전도사의 후손들은 4대에 걸쳐 순교자의 길을 걷는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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