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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 시헌력(時憲曆)의 새로운 정체성
글쓴이 임종태 / 등록일 2023-06-12
잘 알려져 있듯, 시헌력(時憲曆)은 청나라가 발행한 달력의 명칭이자 그 바탕에 있는 천문학 체계(역법)를 가리킨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장악한 직후 반포되어 이듬해인 순치(順治) 2년의 달력부터 시헌력으로 제작되었다. 시헌력의 천문학 체계를 청나라가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명나라 말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광계(徐光啟)라는 학자 관료의 감독하에 제작한 『숭정역서(崇禎曆書)』라는 서양 천문학 총서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의 의견이 나누어져 실제 반포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중원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가 자기 왕조
의 역법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헌력은 청나라의 공식 역법으로서 서양 천문학의 이론과 방법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당시 대다수 사람에게도 자명했을 이 사실을 일부 양반 학자들은 그리 흔쾌히 인정하지 못했다. 18세기 초 그들은 시헌력의 정체에 대해 아주 색다른 대답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명나라의 역법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반포되지는 않았어도 명나라 조정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시헌력이 서양 천문학에 기반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명나라의 역법이며 그 때문에 고대 중국의 천문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와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1708년 숙종(肅宗)의 명령으로 관상감이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와 아담 샬의 천문도를 모사한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명나라 시기에 제작되어 조선에 전해진 이 서양식 천문도와 지도를 모사한 이유는 서양의 우수한 과학을 담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명나라의 숭고한 문화적 유산이며, 야만족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인 조선이 이를 보존해서 후세에 잘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중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모사본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는데, 당시 영의정으로서 작업을 총괄한 최석정(崔錫鼎)의 서문을 왼쪽 여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문의 결론부에서 그는 “숭정무진(崇禎戊辰)”(시헌력의 계산 기점이 되는 해로서 1628년), “대명일통(大明一統)”이라는 두 글귀를 천문도와 세계지도에서 발견하고 받은 감동을 적었다. 최석정에게 그 글귀들은 이 서양식 도상에 명나라가 남긴 유산의 지위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는 고대 중국 우(禹) 임금의 지리학, 주(周) 나라의 천문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스러운 계보와 연결해 주는 실마리였다.
시헌력의 바탕이 된 서양의 천문지리학을 중국 천문학의 계보에 위치 지은 최석정의 시도는 조선 조정과 관상감이 청나라의 시헌력을 제대로 학습해 보겠다고 결심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조선은 이미 효종(孝宗) 4년(1653)부터 시헌력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는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로 인해 그들의 시간 표준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일단 시헌력으로 달력을 제작할 수 있게 되자, 조정은 일월식과 행성 운행의 계산법에 대한 심화 학습이 필요하다는 관상감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세기 중엽 조선은 숭명 반청 이념의 고조기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의 역법인 시헌력에 대한 양반들의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1636년까지 명나라가 조선에 내려준 대통력(大統曆)을 애호하고 기념했다.
따라서, 시헌력 학습의 재개를 위해서는 우선 조선에 팽배한 반청(反淸) 정서가 완화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바로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시기였다.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면서 두 나라 사이의 긴장된 관계도 안정화된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국가의 표준 시간 체제인 역법을 불완전한 상태로 둘 수 없다는 주장이 조정에서 힘을 얻었고, 최석정과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화된 것이 반청 정서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았다. 시헌력의 적극적 학습을 위해서는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즉 청나라 야만족의 역법이라는 이미지를 씻고 조정과 양반들이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정체성이 고안될 필요가 있었다. 시헌력의 바탕이 되는 서양의 천문지리학이 명나라의 유산이자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지식의 계보를 잇는다는 최석정의 선언이 바로 이때 나온 것이다. 그해 가을 관상감의 중인 천문학자 허원(許遠)이 북경에 파견되어, 50년 동안 배우지 못한 시헌력의 행성 천문학 계산법을 배우고 돌아왔고, 이후 관상감은 “칠정력(七政曆)”이라고 불리는 천체력을 시헌력의 방법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헌력이 명나라의 천문학이라는 논리는 18세기 내내 청나라-서양 천문학의 학습을 주창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지지자들에 의해 반복될 것이었다. 이후 조선의 군주와 조정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그 결과 정조 시대에 이르러 관상감은 시헌력을 조선의 경위도에 맞게 완벽히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100년 동안의 천문학 사업이 바로 “시헌력은 명나라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구호 아래 이루어졌다. 지난 세기 역사학자들은 조선 후기 청나라를 통한 서양 천문학의 수용을 “서구적 근대”를 향한 변화의 첫걸음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 조선 후기 서양 과학의 도입은 역사학자들이 “서구적 근대”와는 대척점에 둔 “중세적 중화주의”의 이념적 틀 하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중국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우리의 관념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글쓴이 : 글쓴이 : 임종태(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