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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베푼 가르침(1)
사도행전 18:9~11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시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한 후에 나중에 유대인들의 대적함과 비방함을 인하여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복음 전도와 가르침에 힘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차 전도 여행 때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사람들의 격렬한 핍박과 이차 전도 여행 때의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폭력을 동반하는 핍박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한 집요한 박해의 주동자들이 동족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고린도에서 분명히 동족 유대인들이 집요하게 박해하여 복음 전파를 막으려 덤벼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핍박의 조짐이 고린도에서도 보이자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무거운 중압감이 찾아왔습니다. 동료들이 곁에 와서 한편은 든든하지만 핍박자들 때문에 시내에 다니기가 겁나고 설교하기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번에 고린도에서 적지 않는 유대인들과 수많은 고린도 성의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왔는데 또 다시 핍박 때문에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가 하는 염려가 생기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일로 사도가 밤중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밤중에 환상 중에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음이라”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마음을 짓누르던 핍박에 대한 두려움, 사역의 방향에 대한 혼돈과 불안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하여 고린도 성에 주님께서 작정하신 영혼들이 모래알처럼 많이 있음을 확신하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다 버리고 확신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에 머물며 일년 육 개월 동안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는 매우 강력하게 세워지고 그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일년 육 개월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에 주의 백성들에게 전한 주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편지와 그리고 고린도 사역 도중에 쓴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 편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참으로 그 주제가 광대합니다. 그 중에 오늘 세 가지만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고린도인들의 교만함을 겨냥한 복음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고린도 시는 75만 명의 거대한 인구를 가진 대도시요 동서 각국의 문물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상업 중심 도시였습니다. 자연히 고린도에는 대단한 부자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또 로마의 퇴역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신분이 탁월한 사람들도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물질적인 부와 신분에서의 탁월함 때문에 사람들 마음 속에 교만함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신자가 되었어도 정신과 태도 속에 강력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로 가르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과 2절에 이에 대하여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모든 세상의 주군이십니다. 그런 그가 세상에 가장 낮은 자로 와서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십자가에 피 흘려 대신 죽기까지 죄인들을 섬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낮아짐과 죽기까지 섬김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다 사해졌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무리 큰 부자라도 용서받은 죄인이요 가장 비천하게 여기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제자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자라면 자기의 부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학벌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은 허튼소리인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의 주님으로 모신 자는 기꺼이 죄인 중의 괴수요 지옥에 떨어질 자기를 위하여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부자요 모든 자 위의 최상위 권력가요 그의 뜻대로 만사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통치자이신 예수께서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약하고 가장 미련한 십자가의 길을 택하여 우리를 멸망에서 살려낸 사실을 믿는 자이므로, 이제 그의 자랑은 자기의 부, 자기의 지식, 자기의 재주, 자기의 신분, 자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자랑이 되어야 하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자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의 죽으심만을 그토록 강력하게 전하고 또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랑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삼고 살게 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사도 바울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변의 은사도 받고 지식의 은사도 받아 주님의 일에 대하여 할 말들을 많이 하는 은사가 임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령의 각종 은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강력한 은사들이 임했고 성도들 역시 각종 은사들,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병 고침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등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성도들이 또 교만해졌습니다. 자기의 은사만을 자랑하며 다른 성도들의 은사는 무시하며 무질서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를 들면 예언하는 자가 서로 여기 저기서 예언을 하여 질서가 없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분은 예배 시간에 일어나 방언을 몇 십 분을 계속 하였습니다. 성도 중에 통역의 은사가 없는 중인데 이렇게 예배 시간이 방언을 계속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멀뚱 멀뚱 듣는 중에 뜻없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이는 다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영적인 점에서도 교만해진 결과로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며 예배를 무질서하게 하고 은사들이 조화롭게 활용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인하여 그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이요 은사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교회와 성도들의 지체를 위하여 섬기라고 주신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질서있고 덕이 되도록 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언하는 자도 한 사람이 예언하면 다른 사람은 순서를 기다렸다가 예언이 끝나면 이어서 예언하고 또 그렇게 끝나면 예언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가장 많이 하지만, 예배 때에 가르치는 설교 시간에 방언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를 가진 자가 없으면 방언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다 함께 통성 기도하는 시간에야 방언하거나 우리 말로 기도하거나 자기의 기도에 큰 소리로 집중함으로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예배의 여러 순서 중에 방언하는 시간에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 은사 장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영적 교만을 사도가 적절하게 다루어 지혜롭게 교회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고린도교회는 교만함의 문제가 영적인 지식이 많아짐으로써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점점 영적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잡신도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먹는 것들인 음식 역시 더러운 것이 하나도 없고 믿음으로 받으면 다 깨끗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자기보다 지식이 부족하고 영적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그들은 무시했습니다. 더 많이 영적 지식을 배우면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을 사도만큼이나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교만까지 생겼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사도 바울 외에 아볼로와 같은 성경 교사가 찾아온 후에 더 심해졌고 거짓 교사들이 들러서 타락한 교만의 본성에 불을 질러놓음으로써 더 극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을 거듭나는 은혜로 이끌고 많은 영적 지식으로 이끌어주었던 사도 바울을 사도도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파, 나는 베드로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바울파 이렇게 서로 당파를 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깊은 병인 교만을 부채질하는 마귀의 공격꺼리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과 사이비에 끌려가는 사람들 중에는 영적인 지식이 좀 생겼을 때에 우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알면 알수록,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자신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식의 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 속에 무지의 어둠이 너무 많고 너무 깊음을 알고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자신의 무지함 때문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보다 더 훌륭하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인 줄로 알고 겸손하게 배우고자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자기의 자식이 부족함을 알아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만큼 더욱 깊어집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자기의 지식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자기의 탁월함을 감추며 모든 형제 중에 자기가 가장 작은 자로 알고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 고린도전서 8장 1절로부터 3절에서 이르기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말보다는 능력이 중요하고, 능력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열매가 더 중요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점점 더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기 바랍니다.
이렇듯 교만함이 천성적으로 많았던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가르치며, 자기를 치며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계속하여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교만함의 본성이 심히 끈질김을 항상 인식하고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교만한 내 자아를 죽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한평생 자랑하는 겸손한 신자가 됩시다.
둘째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방 신앙과의 영적 싸움 한 가운데 있었고 그래서 혼합 종교화의 유혹이 컸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고린도 시의 중앙에 아크로고린도 언덕이 있는데 그 돌산에는 온갖 신전들이 많이 건축되어 있었습니다. 아폴론 신전도 있고 포세이돈 신전도 있고 아프로디테 신전도 있고,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신전들이 수없이 있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 신전의 주신들이 다 실재 존재하는 살아 있는 신들로서 자기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적 실재로 알고 믿고 기도하고 도움을 청하곤 하고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제물로 그 제단에 바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과거에 자기가 철썩같이 믿은 여러 신들과 그들의 신전에서 섬기는 여러 무녀들의 저주와 무당들의 영적인 예언, 신탁 등에 대하여 여전히 영향을 받고 저주를 두려워하는 유혹을 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설교할 때에 자주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는 다 헛것이며 거짓 신이며 사람이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한 것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5 이하의 편지를 보면 사도가 이렇게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8:5~6)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렇듯 오랫동안 깊게 퍼져 있던 다신교의 영향과 맞서 싸워 유일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싸움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계속하여 이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마침내 헬라 사람들이 그토록 신봉하던 수많은 신들의 나라에서 그 우상들을 다 몰아내고 그것들은 한낱 인간이 만들어낸 생각들인 신화에 불과함을 이제 만천하에 다 알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다신교적인 유혹이 많이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의 헬라의 신비주의처럼 우리나라에도 무당, 무녀 등의 예언, 접신, 주술 등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단과 사이비가 사도 당시에도 많이 일어난 것처럼, 지금 한국 교회와 세계 각처의 교회들에 거짓 교사들이 스며들고 이단과 사이비가 많이 일어나서,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들을 전하고 교회 안에 영적인 고통을 주는 쓴 뿌리가 여기 저기 일어나곤 합니다. 이것은 처음 세상이었던 아담과 하와 시대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하여 교묘하게 자기를 위장하여 속임으로써 넘어뜨리곤 하는 마귀와 그의 수하에 있는 더러운 영들인 귀신들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에 있을 때에 수많은 종교들 속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가 맞서 싸웠던 영적 전투를 우리도 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유일신 하나님, 오직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영적 씨름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들어왔지만 수많은 신전들에 에워싸였고 각종 신전의 영매들, 주술가들, 무녀들의 영향을 받아서 신전 제사에 참여하여 영혼이 더러워지고 신전 제사에 참여하여 그 제물인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영혼이 더러워져서 신앙을 저버리는 일들도 적지 않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혼합주의 종교화의 위험을 자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경고하여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든다면 고린도후서 6:14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린도후서 6:14~17)
우리가 세상 밖으로 갈 수 없기에 우상 숭배자들과 어리석은 무당집 출입자들과 이단 사이비에 속한 사람들과 따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는 참 하나님의 아들 딸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이므로 믿지 않는 자들, 우상 숭배자들, 잡신 숭배자들과 깊은 연합을 이루는 일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거룩하게 잘 지키면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도 고린도에서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교적 영적 유혹이 강력한 상황입니다. 티브이만 틀면 곧장 사회자들이 점치는 무당으로 분장하여 사람들과 상담하는 프로그램이 많고 툭하면 연애 상담을 점쟁이에게 가서 올해 연애할 운이 있는지 여부를 묻곤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무슨 페스티벌, 지역 축제하는 곳에 가면 잊지 않고 부스를 차려놓고 점을 봐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학축제에도 젊은이들이 심심풀이로 그렇게 손금을 보러 다니고, 카페에 가서 타로 점을 보기도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준 사도 바울의 이 강력한 경고대로 우리는 주라 이름하는 신들이 많지만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주님도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분명한 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두 가지를 겸하여 섬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하며, 타협 없이 우리 믿음을 강력하게 고수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전했던 가르침입니다.
셋째로, 방탕함, 곧 성적 타락과 남색, 동성 연애, 술취함의 유혹이 큰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고린도는 방탕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아크로고린도 언덕에서 가장 큰 신전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 신전, 곧 미의 여신인 이 신전 안에는 천 명의 여사제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배객들을 안내하며 타락한 행동으로 미의 여신을 섬겼으며, 밤에는 화려온 옷을 입고 목걸이들로 자기를 꾸미고 시내로 내려와 창기의 일을 했습니다. 고린도 시는 많은 부와 다양한 나라에서 들락거리는 장사꾼들과 사방에서 몰려든 방탕한 자들과 많은 술집들에서 수많은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얼룩졌습니다. 더욱이 한번씩 디오니소스 축제도 열리면 며칠을 온 도시 사람들이 술에 깊이 잠겨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용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적으로 타락하고 방탕하게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한 방탕한 도시에 사도 바울이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으니,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세속 도시의 타락한 문화에 깊이 물들거나 아니면 싸워 거룩함으로 무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 도전과 맞서 싸웠을까요? 그는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9 이하에서 보면 이렇게 그가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린도전서 5:9~13)
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방탕하고 음행을 범하고 우상 숭배를 하고 물질에 탐욕에 절어 산다 해도 어쩔 수 없거니와 하나님의 교회에서 형제 자매라 일컫는 자들은 이러한 악행들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면해도 듣지 않으면 징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고린도전서 6:9 이하에서 선언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린도전서 6:9~11)
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상습적으로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회개함 없이 계속하여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남의 재물을 속여 빼앗고 불법으로 편취하고 남의 것을 상습적으로 도적질하고 술에 절어 살고 남을 늘 모욕하는 자들은 천국에 못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런 일을 했더라도 예수님을 믿게 된 자는 이런 행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주님의 백성답게 이런 일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버리고 구별된 성도의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이러한 행실의 열매를 맺을 필요가 전혀 없고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신앙의 진실함은 삶의 행실의 열매의 변화로써 증명이 됩니다. 믿음은 그 행함으로 인하여 온전해지고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참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믿음은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써 진실한 회개, 진실한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천국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사도가 방탕한 도시 고린도에서 가르친 복음은 잋럼 거룩한 행실의 복음입니다.
자 이렇듯 사도가 일년 육개월 동안 가르친 주의 가르침의 일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사도의 복음은 교만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들 때문에 교만하기 쉽고 영적인 은혜를 많이 받아서 교만해질 수 있고 영적인 지식이 많아지는데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교만한 본성이 너무 강하고 끈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자기의 교만과 무섭게 싸워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교만을 죽이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자기의 죄를 더 깊이 인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로 알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은혜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고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많은 주, 많은 신,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오직 유일하고 참된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만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수많은 영적 미혹이 이 시대에도 너무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이것 저것 함께 믿어도 될 것이라는 혼합주의 신앙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두철미 진리의 말씀만을 붙들며 오직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앙, 바른 영성을 잘 가꾸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혼잡하고 미혹하는 많은 가르침, 다른 영들, 다른 복음, 이단 사이비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매우 차분하고 그리고 지혜롭고 단호하였습니다. 우리도 지혜로운 분별력을 갖고 이 시대를 살피고 이리 저리 끌려다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대도시 고린도는 심히 방탕한 도시였는데, 그곳에 성결한 복음을 사도는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승리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방탕함 속에서 점점 타협해가는 이름뿐인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술도 매일 마시고 성적인 유혹에도 마음을 주고 동성애도 용납하는 등 고린도 사람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많은데, 그 중에 신자들도 가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고린도 시에서 세상 사람들이야 상관없지만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은 내쫓으라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이제는 점점 구원받은 자답게 주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거룩한 행실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머잖아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이 서둘러 다가올 그 때나 아니면 그날보다 주님이 먼저 세상을 심판하러 영광 중에 오실 때에 우리는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답게 살고자 힘쓴 성화의 수고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극히 복된 사랑과 영광과 상급과 위로가 영원토록 주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