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바다를 보았을까? 보았습니다.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드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삼각주였고, 메소포타미아 내륙으로 올라오는 해상 무역선들이 정박하는 항구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페르시아 만에 접해 있는 모래사막과 바다가 만나는 해변은 아브라함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닷가의 모래를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고향을 떠나 사막을 유랑할 때는 근대적인 현대문명은 아직 눈도 뜨지 않았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끝나면 밤중엔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 속에 별빛만 볼 수 있었지요. 아브라함에게 모래와 별은 그가 경험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두 축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대목에서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줄 축복을 그가 경험한 가장 작은 알갱이들과 웅대한 우주의 파노라마를 연결시켜 말합니다. 1차적인 의미로 보면 이 비유는 그 수의 많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노정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 비유는 또다른 느낌을 줍니다. 하늘(우주)의 별들에서 지상의 모래까지 이 세계(우주)를 하나의 인식의 그물망으로 보게 합니다.
별과 모래는 셀 수 없는 수(數)를 상징하는 것들이지만 그 셀 수 없음은 인간의 이성이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끝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 우주의 크기와 마주할 때 인간은 비극적 자기 인식에 처하게 됩니다. 존재의 왜소함과 광대무량변한 우주 앞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 대해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SF소설 <콘텍트>에서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우주의 광대함과 바닷가의 모래 같은 무량(無量)함을 네 작은 이성(理性)의 눈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셀 수 없는”이라는 수식절은 이성(理性)을 도구로 하거나 어떤 프레임으로 세계를 보지 말라는 뜻이 함의됩니다.
풀을 찾아 사막을 떼 지어 다니는 수천, 수만 마리의 양떼들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인식체계와 이성의 도구로 셀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그것들에 빗대지 않고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에 빗댄 것은 헤아리며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을 멀리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조악한 인식과 논리로 하나님을 헤아리고 판단할 수 없도록 아브라함의 정신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입니다. 좁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말고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무량(無量)한 하나님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인식의 창을 통해 측정하는 이성적 활동이라면 ‘느끼는 것’은 이성을 초월한 감각으로 하나님과 세계의 전일성(全一性)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난 10월에 몽골에 갔습니다. 별을 찍으려고 작심하고 카메라 장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 자정부터 새벽까지 셔터를 열어놓고 별을 담았습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별들이 출렁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말보다 더 큰 야생 엘크가 거친 숨소릴 내며 내려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고요 속에 야생동물의 접근은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별을 보는 마음으로 그 짐승을 향해 섰을 때 엘크의 눈에서 또 다른 두 개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 별과 나의 별은 한참동안 마주보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해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의 거친 숨소리는 부드러워졌고 우리 사이에는 밤하늘의 별들로 충만했습니다.
진노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량(無量)한 출렁임으로 세계를 감싸는 하나님을 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존재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쁨으로 죽음의 사막을 유량할 수 있었습니다. 이 황량하고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를 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존재의 기쁨이 세속의 압박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은 성서가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종교적 신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별을 봐야 합니다.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무량함을 느껴야 합니다.
며칠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삼촌 목사라는 이가 페이스북에 아주 긴 글을 장황하게 쓴 걸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근본주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작가와 작품,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하며 훈장질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는 조카인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며 기독교의 구원관을 들이댔습니다.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형님과 조카를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가 가족 친지와 연이 끊어지고 단절된 이유가 그의 기독교적 구원관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구원 때문에 그는 형제와 친지로부터 단절되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조카가 노벨문학상을 탔다 하니 불쑥 나타나서 공개서한을 보내 구원을 운운합니다.
하나님을 ‘영혼 구원’이라는 교리의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보니 이런 오지랖이지 싶습니다. 교회에서 성서만 보지 말고 밤하늘의 별을 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만 보면 바보가 되기 쉽습니다. 바보들은 자기만이 하나님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문자의 창살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런 바보들이 진리를 말하고 구원을 말하니 누가 구원받고 싶겠습니까.
내년에는 팀을 꾸려서 몽골에 별을 보러 가는 이벤트를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사람이 만든 문자가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같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무량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별이 빛나는 은혜의 밤> 같은 이벤트 말입니다. 부흥회, 수련회, 성경학교, 이런 거 말고...
첫댓글 도구적 이성을 멀리..
우리가 만든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무량함을 느끼며 살기.. 존재의 기쁨으로♡
황량하고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를 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