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신보 가기 (國民新報 價記) 진안군 국민신보 보급료 내역서 (1906년)
일진회의 기관지로 전국 지방관청에 강제로 신문을 보냈으나 구독료가 걷히지 않아 정간이 잦았던 신문으로 본 사료는 전북 용담군 일동면, 이동면, 일서면, 이서면, 일남면, 이남면, 일북면, 이북면, 용담읍의 각 자치단체별로 1906년 1월 15일 부터 4월 말일까지 납부된 구독료와 미납된 구독료를 기록한 미수금 내역서로 전체 구독료 113원 5전에서 수금된 구독료는 43원 7전 5푼 이었으며 미수금은 67원 4전을 기록하고 있다.
※ 국민신보(國民新報) : 1906년 1월 6일에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畯)이 일진회의 기관지로 한성부 중서 미동 제30통 4호에서 창간하였으며 초대사장은 일진회 회장인 이용구였으며, 자본은 관찰사를 지냈던 일진회 간부 김세기(金世基)가 출자하였고 초창기 주필은 최영년(崔永年)이 맡았으며, 기자로는 선우일(鮮于日), 김환(金丸) 등이 종사하였다.
초기에는 지방관청에 강제로 신문을 보내어 지방 발송부수가 7천부 까지 이르렀으나, 구독료가 걷히지 않아 재정난에 부닥쳐 창간 5일 만에 1주일 동안 정간하고, 1906년 6월 초순에 다시 일시 정간하였으며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 정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논진을 펴 대한매일신문, 황성신문과 같은 민족진영의 신문과 격심한 대립을 하였으며, 일반 독자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9일에는 친일논조에 불만을 품은 동우회(同友會)와 시위 군중들이 신문사를 습격하여 사옥과 인쇄시설이 모조리 파괴당했으나 친일 논조는 계속되어 민족지와 여러 차례의 논전이 있었으며 제2대 사장은 친일파의 거두인 송병준으로 1907년 5월에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자 한석진(韓錫振)이 제3대 사장을 맡았고, 제4대 사장은 최영년으로 폐간될 때까지 맡았다.
이 신문의 경영은 일진회에서 자본과 비용을 부담하였고, 창간초기에는 용지 등이 모자라고 충분한 자력(資力)이 없어 정간되는 경우가 잦았으며, 충분한 독자를 확보할 수 없어 근근히 발행되었으나 국권 상실 이후 모든 사회단체들이 해산될 때 일진회도 해체되어 시천교(侍天敎)의 기관지로 남아 발간을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1910년 10월 11일에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