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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봉오 제주문화원장님 묘소 참배 간 날
- 일시 : 2021. 2. 5일(금) 14:00~16:00
- 조천읍 와흘리 연안김씨 함덕가지 일부 선영
- 동행 : 4명 백종진(문화원 사무국장), 유승희(문화원 강사), 박문헌(향토문화연구회장)
거리두기로 인하여 돌아가셨을 때 부민장례식장 출입이 원만하지 못했고, 장지로 모실 때도 제한된 인원만 참석하게 되어 함께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49제 때는 집에 일이 있어 참석 못하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래도 이번 참배로 인하여 아주 조금 마음에 짐을 덜었다. 묘 위치를 알았으니 지나는 길에 가끔씩 들려봐야 하겠다.
이번 탐방 길은 원장님이 제주문화원에 10여 년 넘도록 봉사 하시면서 제주에 양질에 제주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업적을 쌓았고, 더 많은 일을 하려고 8대 원장에서 9대 원장을 연임하고 임기를 1년 마무리를 했는데 몹쓸 병에 걸려 8개월 여 병마와 싸움하다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정말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제주도도 큰 박물관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다. 제주에 문화, 학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김을 물론 좋은 프로그램들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그 공로로 “2020. 대만민국 국가기록 관리 유공 제주문화원 행정안전부장관 단체표창”을 받아서 그 표창을 들고 찾아뵈었던 것이다.
고 김원장님 출생
김봉오 1940년생 조천읍 신촌리 출생. 20대 중반에 고향 후배인 김정숙 여사를 만나 결혼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자식농사 만큼은 제주에서 제일 잘 지은 집이라고 저는 늘 자랑하기도 했다. 조천중-오현고-한양대를 졸업하고 대학생 때 4.19 참가자로 4.19제주동지회 사무총장을 역임 중이었다. 군대는 독자라 10여 개월 복무하고 제대했다. 사실 형이 계셨는데 제주4·3 때 돌아가셨다. 신촌에서 조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오현고등학교) 때부터 건입동 현 동초등학교 서쪽에서 살면서 평생을 살다가 2006년 경 도남으로 이사를 했고, 2013년 경 다시 한마음병원 남쪽으로 그리고 2019년 첨단과학단지로 옮겨가서 살다가 2020년 8월(음)에 돌아가셨다. 선친께서는 신촌에서 방앗간을 경영한 것으로 알고 있고 부자 집이었다고 들어 알고 있다.
고인께서는 제주도내 교육, 문화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할 수 있겠다.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분이고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아주 천천히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가듯 실수 없이 진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성품이 조용하면서 위트 있는 농담도 곧잘 하셨으며 일을 시작하면 끈기 있게 진행하는 모습을 나는 40여 년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좋은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기도 하였다. 고 김원장님 장기라고 한다면 주변 분들과 함께 가려고 무척 노력하셨던 분이시고 남과 궂은일은 피하고 지나려 노력하면서 주변 사람들 어려운 일에는 적극 앞장서서 해결해 주셨다.
제가 알고 있는 김봉오
저와의 인연은 1975년이다. (주)대한항공 호텔사업부에 입사를 하고보니 총무계장으로 근무를 하고 계셨다. 저는 1975년 4월 (주)대한항공에 입사를 하려고 입사원서를 들고 제주칼호텔 총무과에 찾아갔는데 알듯 말듯 한 분이 내 서류를 확인하면서 서류통과 절차를 자세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당시만 하여도 호텔이라는 곳이 대중화 된 장소가 아니어서 마음에 부담을 갖고 들어갔는데 아주 조용하게 설명을 해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마음에 짐을 덜었다. 속으로 참 고마운 분이구나 생각만 하고 사무실을 돌아서 나오며 누구였더라? 많이 뵌 분인데 하며 그날은 끝났다. 16명 모집인데 200여 명 몰려서 합격이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고, 모집은 부서별로 했는데 제가 지원한 부서는 일반직이 아니고 공직자로 본다면 7급 초급간부 직이다.
1975년 6월 21일 발령을 받고 다시 인사를 하게 되면서 인연이 되어 40여 년 넘도록 곁에 있었다. 그리고 궁금한 일도 풀렷다. 우리 외삼촌과 오현고 동창(7회)이어서 몇 차례 삼촌댁에 놀러 와서 약주할 때 심부름도 했었던 것이다. 당시 삼촌은 제주시청 총무과 계장으로 계실 때였다.
고 김원장님은
1978년 호텔사업부 총무과장으로 진급을 했고,
1982년 경 직급이 차장으로 올라가면서 호텔사업부에 차장자리가 없어 호텔사업부를 떠나서 당시 제주공항 확장 건설할 때여서 한진그룹 산하 한일개발 공항현장 노무담당 차장으로 옮겨 갔다. 제 기억으로 제주공항 확장 현장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했고 공항현장이 마무리 될 무렵 청주 철도공사 현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사직을 했을 것이다.
한진그룹을 떠나 다음 행선지는 한라병원(이사장 김병찬)이 종합병원을 짓는 과정이었는데 현 연동에 있는 병원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광양로터리에 한라의원으로 있다가 지금에 자리로 옮겨 갈 무렵에 병원에 관리부장로 선임되어 병원 오픈할 때까지 근무하면서 제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끝내고 공학박사 학위를 받는다.(전공 :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80년 중반 경 당시 산업정보대학 지금은 국제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기획실장까지 엮임하고 정년퇴직(2006년 경)을 한다. 대학에서 은퇴하고 제주향토사에 관심을 뒀는데 2004년 경 유배문화해설사 교육이 있어 저랑 함께 지망을 했다. 여기서가 원장님하고 두 번째 인연이 시작이다. 당시 교육은 도 지원 사업으로 기억이 나고 장성철(현 국민의힘 제주도당 의원)씨가 운영하는 교육장이었으며 제주대 양진건 교수가 전담강사였다. 여기서부터 고인은 제주사에 푹 빠졌고 저 역시 그랬다. 정말 재미있었다.
2008년
제주4·3연구소(소장 김창후)에서 제주4·3역사문화해설사를 모집하였고 김원장님이랑 함께 응모하여 합격하였다. 당시도 40명 모집에 70여 명이 몰려 경쟁이 심했다. 6개월 간 빡세게 교육을 받았고 마지막까지 남은 교육생은 26명이다. 이론 강의에서 배우면 현장에 나가 시연도 하고 수료식 직전에는 시험까지 봐서 어려운 괴정을 넘겼다. 1차 출석률이 80% 이상이어야 모든 과정을 이수할 자격을 얻는 것이 관문이다. 나는 2000년 초부터 제주4·3에 관심이 있어 현기영 선생님이 쓴 “순이산촌”을 읽었고 김석범 선생님이 쓴 “화산도”도 읽던 중이었다.
2009년
현 제주4·3평화재단(출범 2008년-초대 이사장 장정언)에서 제주4·3아카데미 수강생을 모집하였다.(80명) 또 다시 함께 교육을 받았고 3개월 수료 후 장정언 이사장님 권유로 단체를 구성하게 된다. 제주4·3아카데미탐문회 출범이다. 회장 김봉오, 사무국장 김원순, 교육국장 김성용(당시 한라대 강사)으로 임원을 편성하여 현재까지 운영 중이며 평화재단에서 4년간 지원받아 사업을 햇고 지금은 제주도 4·3지원과에서 지원을 받고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사무실도 제주동초등학교 서쪽 김원장님 건물 2층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그 사무실은 다른 용도로 사용 중이었고 그 사업이 마무리 되어 사실 사무집기만 있고 근무자가 없어 내가 입주하고 한 달 이상 청소하고 정리를 하였다. 이 사무실은 2018년 건물을 팔면서 마무리 되었다. 제주4·3단체가 여려 개 있지만 순수 봉사단체는 우리단체 뿐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원장님 회장직을 맡고 계셨고 초창기 임원이 그대로 유지하였다. 올해 2월 정기총회를 거쳐 임원선출을 해야 한다.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역임
2009년 5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하였다.(50명) 내가 추천을 했고 원장님은 1년 과정을 무사하게 마치고 교육생 때는 학생장도 하였다. 수료 후 동기회장은 지내면서 2009년 9월 현장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2013년 7대 해설사협회장에 추대되어 해설사협회에도 큰 공을 세웠다. 돌아기시기 전까지도 산지천갤러리에 주말에만 근무를 하고 계셨다.
2010년
제주대학평생교육원에서 유배문화 교육이 있다고 신문에 공지가 되어 다시 함께 입학을 하고 1년 과정을 수료하고 2011년에는 심화과정을 거쳤다. 수료식 하면서 국가공인 유배문화해설사 자격시험을 봤다.(한국국립대학교 총장이 주최하고 제주대 평생교육원장이 주관하는 시험이었다)36명 응시하고 28명 합격했다.
2012년
성균관유도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에서 유학대학 1년 과정을 모집하였는데 나는 다니다 시간이 없어 탈락하고 김원장님은 마지막까지 이수한다.(8기. 나는 13기) 제주향교 관임장의로 입문하여 향교와 인연을 맺었다. 2013년 전국단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성균관이 주관하여 향교서원 해설사 1기 모집 하였는데 제주에서는 3명 만 해당되어 원장님과 향교 사무국장(김순열), 임원 한분 하여 세 명이 1년 과정을 거쳐 정식 해설사 자격증을 받았다. 향교서원해설사 자격증이다. 나는 원장님 추천으로 2014년 2기로 입학하여 졸업을 했다. 이때 나는 제주향교 관임장의 총무수석 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이다.
2013년
그리고 김원장님은 전 제주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문 00) 추천을 받고 제주향교 전교에 출마를 한다.(이 전에는 향교 관임장의 중 가장 어렵다는 의전수석을 하였다) 당선되고 4년 임기를 잘 마무리 하였고 다시 도전하여 낙마되고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때 내가 더 적극 말렸다면 아마도 상처를 덜 받을 수도 있었을 걸 하는 생각에 지금에 그 생각 하면 가슴이 아프다. 향교에 전교로 봉직하면서도 많은 일들을 했다. 대성전을 국가보물로 승격시켰으며(2016년) 울타리 보수 공사, 건물 보수 등 향교가 많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 제주특별자치도 초대 주민자치위원장도 역임하고 계셨을 것이다(2010년~2013년) 임기 2년에서 1회 연임이 가능하다.
제주향교 전교직을 하면서 제주문화원장도 겸임하고 계셨고, 제주시 들불축제위원장직도 수행 중이었다. 나도 원장님 뒤를 따라 향교-문화원향토문화연구회-제주시 들불축제위원 등을 함께 하면서 원장님 뒷마무리 일들 일부 보조도 하였다. 돌아가시기까지도 들불축제위원장직에 계실 때이다. 2020년 작년이 임기 마지막이었다.
2019년
제주문화원 7대 원장직을 무난히 수행하고 8대 원장에 단독 출마하여 큰박수를 받으며 추대형식으로 당선되었다. 1년을 잘 마치고 2020년 2년 차 들어섰는데 1월 21일 코로나19가 창궐하여 꼼짝 달싹 못하게 하여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그러는 시기에 병와 사투를 하고 계셨다.
2020년
고 김봉오 원장께서는 제주사회에 문화, 예술, 교육 분야에 업적을 남기셨고 생을 마감하였는데 지금도 제 주변에 계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집안에 무사안녕과 제주문화원 발전에 힘을 보태주시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제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회가 연구소로 승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김순이 원장께서 승계 하셨으니 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원장님 또 찾아뵙겠습니다. 고히 잠드소서.
위에 기록한 내용의 글은 필자 주관으로 고 김봉오 원장님과 함께 걸었던 길을 사실대로 옮겨 쓴 것이고 중간 중간에 생략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잘 못되어 김원장님께 누가 될 만 한 내용이 있으면 읽어보시는 분들이 지적해 주시면 바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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