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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 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죽음의 문화를 바꾸는 긍정의 언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9,2-3.11-14
† 복음 마르 마르 3,20-21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 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새로운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성소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를 봉헌하시는 분이시다
(제1독서).
★ 새로운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느라
식사도 못하실 지경이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유다인들에게는 물론 친척들에게까지도 이해받지
못했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는 장남이고 올해로 아흔이 되신 어머니가 계신다. 가끔 서울에 일 보러
나가면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곁에 자려고 늦은 밤이라도 찾아간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터이다. 그러면 나는 이 시간에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동창 신부의 사제관으로 갈까? 아니면 야간열차를 타고서라도 우리 마을로
가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존재감이 한없이
클 것만 같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자는 아들에게 밥을 차려 주시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 생선도 발라 주시면 나는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저수지 갈대
끝의 잠자리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은 몸인데도 아들에게 마지막 밥을 지어
먹이시려는 듯하다. 집을 나서면 잠시 뒤 어김없이 베란다 창을 여시고
아들의 뒷모습을 내다보시며 ‘잘 가라.’ 손짓하시면, 나는 ‘어서
들어가시라.’며 손을 흔들며 답한다. 이런 순간도 이제 몇 번이나 있을지
생각하며 나는 정류장을 향한다.
나는 사제가 된 뒤로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혈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신자들의 혼인 미사 주례는 멀리라도 가서 해 주면서 친척
결혼식에는 참석도 하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성당 일에만
열심인 것이 신부의 도리’라면서 친척들의 장례조차 알려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온전히 봉헌하고 싶었던 마음임을 이해한다.
혈육이란 무엇일까? 부모 형제 친척은 출가 뒤라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그분을
찾아 나섰다는 것도 공감하고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출가와 혈연
사이의 최소한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해 주는 것도 나이 든 나의
태도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 [수도회] 미쳐야(狂) 미친다(及) -
제대로 미치야 성인(聖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24일 토요일(뉴튼수도원 75일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히브9,2-3.11-14 마르3,20-21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미쳐야(狂) 미친다(及) -제대로 미치야 성인(聖人)-
오늘 복음을 보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딱 두절로 짧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중 오늘 복음보다 짧은 복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역시 12년 전 여기 뉴튼수도원에 머물 때 일입니다.
"원장신부님, 강론이 아주 좋습니다.“ 당시 원장신부님의 영어미사중
영어강론에 대한 어느 수도형제의 찬사였습니다.
"예, 어느 면이 좋았어요?“ 반색하며 묻자, "아주 짧아서 좋았습니다.“
란 대답에, 언뜻 스치던 신부님의 실망스런 안색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좌우간 말이든 글이든 기도든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면 짧고 순수한 것이
좋습니다. 사실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저절로 짧아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중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강렬합니다. '미쳤다'는 말마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무엇엔가 미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허무한 세상, 재미없는 세상, 사막같은 세상,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인간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달인(達人), 장인(匠人), 도인(道人)이지만
잘 못 미치면 폐인(廢人)이란 옛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주교 학자나 복음의 예수님 및 모든
성인(聖人)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미친 사람들입니다.
제 정신이 아닌 거지요. 매일 새벽 3시마다 일어나 묵상하여 강론을 쓰는
저 역시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직장 생활 8년만에 교직을 접고 제 나이 34세에 수도원에 들어올 때
찬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반대했습니다.
무모(無謀)하기는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이었고 모두가 걱정했습니다.
이 또한 세상 눈에는 미쳤음이 분명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 역시 당대 세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미친 예수님께는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자 집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정처없는 삶이셨지만 역설적으로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요
집이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라는 대목의
집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당시 엘리트 종교인들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의 빈번한 충돌,
상종 못 할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림 등
예수님이 가족 들 눈에는 미쳤다고 볼 수 뿐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교사들도
마귀 두목에 사로잡혀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몰아 붙였을까요.
다만 예수님의 충실한 추종자들만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존경했고 무한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성자(聖子),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곳곳에서 제대로 미친 성인같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는 기쁨에 살 맛나는
인생입니다. 제대로 미쳤기에 마침내 하늘의 하느님에 까지 닿아 하느님을
감동시겨 부활하신 후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니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께서 집전하시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제대로 미쳐(狂) 하늘까지 이르신(及)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미사 선물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사도16,14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죽음의 문화를 바꾸는 긍정의 언어
2015년 나해 1월24일 토요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자 기념
마르 3,20-21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 3,21)
죽음의 문화를 바꾸는 긍정의 언어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치유와 해방을 불러오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며 놀라워 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그분을 배척하며 예수님을 붙잡아
없애려 하였다(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1,29; 2,1)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은 대단하였고
하느님의 선은 넘치도록 풍요로웠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에
관해 악의적으로 중상 모략하여 퍼뜨린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3,21). 같은 지방에서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기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왜 예수님을 ‘미쳤다고 판단하여’ 그분을
붙잡으려고 나섰을까?
예수님의 친척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자. 무엇보다도
그분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던 동기는 바로 ‘소문’에 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잘 알았을 뿐이었고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이나 지혜를 지니지 못했다. 그런 그들은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에 따라 피상적인 눈길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소문은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들도 얼마나 자주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함께하며 깊이 헤아려보지도 않고 그저 들리는 험담과 중상모략,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소문에 휘둘리는가! 그런 부정의 언어들이 생명의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몰아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게 됨을 의식하고 있는가?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경험과 기대에
예수님을 묶어두려고 한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틀 때문이었다. 친척들은
예수께서 고향과 친척, 직업을 저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셨기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 예수님의 형제들(요한 7,5)과 고향사람들마저도
그분을 믿지 않았다( 6,1-6).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경험과 혈연의
울타리 안에서 바라보았고, 나자렛 고을의 소박한 가정 출신의
동향인이라는 이미지 안에 그분을 가두어두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유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의 눈길이 없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선과 자유와 그분의 영이 꿈틀거림을 잘
알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또한 중상, 모략, 험담, 배척과 같은 부정의 언어를
멈추고, 서로를 살리는 칭찬과 격려와 지지와 관대한 배려와 속깊은
헤아림이 담긴 긍정의 언어를 통해 하느님의 혼이 숨 쉬는 살아있는
성전인 동료 인간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눈에 참으로 하잘것없어 보이는 이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경이로운 능력을 알아보아야 하리라.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인간적인 차원에 묶여 소문에 휘둘리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런 이들까지도 관대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될까! 바로 그
지점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분의 친척들처럼 눈이가려져 다른
이들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떨어지지는 말았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월 24일 토요일
[백]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전라도 광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아주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특히 ‘날’이라면 청산유수라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집에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똑 소리 나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어머니가 될 할머니를 잘 알기에 며느리가
엄청나게 시집살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고
오히려 며느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처음에 꽉 잡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부터 생트집을 잡고 모욕도
주면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그런 시집살이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의연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느냐?”고 생트집을 잡으면,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며 모욕을 주면,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라고 답변을
합니다.
매사에 이런 식이니 어떻게 갈등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을 한
없이 낮춘 며느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권위나 힘을 세상의 모든 것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자신을 낮춘다는
것일 쉽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의 상처도 보통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낮춤을 통해서 진정한 승리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척 바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었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없이 사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은 보지 않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조차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반대하려고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낼 만도 합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이런 사랑을 보여준
줄 아느냐? 너희 마음대로 살아봐!”라고 외치면서 벌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랑
실천을 멈추시지도 않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그래서 삶 안에서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신은 우리 가슴에 머물
것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운전 면허를 따지 못한 이유?
한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 사고가 나 차 안에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을 것이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의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돌아가셨니?"
"병원 침대에서"
"너의 할머니는?"
"침대에서"
"너의 아버지는?"
"침대에서..."
"가족들이 모두 침대에서 돌아가셨구나. 내가 너라면 그렇게 위험한
침대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다.“
교통사고의 사망률이 적지는 않지만, 침대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는
않습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변화시키려면 미안하게 만들라
2015년 나해 1월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변화시키려면 미안하게 만들라.
여자는 남자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열심히 하시는 모습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삽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쏟아내는 그 땀과 피가 없으면 금방 지쳐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 자랑하는 프로인 JTBC ‘99 만남’에 한 여성이 이렇게 남편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같은 회사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 3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편하게 자라서 고생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3~4개의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저의 꿈은 학원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일하다 허리를 다쳐 파스 하나 붙이고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을 가자니까 안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나의 꿈을
이루어주려고 저렇게 밤낮으로 고생하는데 나는 나의 꿈만을 이루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왜 이렇게 나를
미안하게 해. 당신도 꿈을 찾아. 당신은 꿈 없어?’ 그때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꿈을 이뤘어. 내 꿈은 당신이야. 당신만 행복하면
돼!’ 저는 이 말이 평생 잊히지가 않아요. 부러우시죠, 모두?”
정말 모범이 되는 남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의
희생이 삶의 힘이 되기도 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편이 고생하는 모습에 비추어 자신의 꿈만 찾는
모습이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안해졌고 남편의 꿈이 무엇인지도 물어볼 수 있는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 양심을 바로잡아주고 깨끗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속죄제사는 신약의 예형이었습니다. 대사제가 짐승의 피로 가장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 죄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신약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우리 지성소인 양심 안으로 들어가 우리 죄가 바로
당신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고 미안해하며 죄를 몰아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카인이 아벨의 피를 땅에 뿌려 그 피가 울부짖는
땅에는 살지 못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 죄송하다면 더 이상 죄는 우리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아이들을 깨끗하게 했던 그 방식을 다시 소개합니다.
박 목사와 살던 아이들은 배가 고파지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쳐도 고쳐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도둑질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박 목사는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들보고
쇠파이프로 자신을 있는 힘을 다하여 10대씩 때리라고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박 목사를 때렸고 박 목사는 허리를 다쳐 40일 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박 목사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아이들은
누워있는 박 목사 주위에 둘러앉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박 목사가 다
낫고도 그들은 그 시간만 되면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절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매번 죄를 범하며 그리스도를
피 흘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도 둘러앉아 나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고 미안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실을 돌아보아야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피는 나를
위해서는 헛되게 흘리신 피가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그분을 그렇게 아프게 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줏대있는 삶을 살아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 24일 토요일
[백]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줏대 있는 삶을 살아라.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나 반대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 죄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소신, 주관이 고집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줏대’있는 삶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먼저 식별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삶의 흔들림 없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월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묵상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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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친척들에게 들어갑니다. 보통 사람살이 그렇듯
소문을 들은 일가 친척 중 누군가는 마치 예수님과 그 가족을 위하는 냥,
호들갑을 떨면서 그의 부모들에게 살을 붙이기도 하고 띠어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고요. 그리고 그 결론이 예수가 미쳤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이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근본도 모르는 어부들을 끌고 다니면서,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로 선동을 하고,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심지어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겁 없이 도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그 소문이 이러한데 어느
친척들이 고운 시선으로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옳은 것을 보고 미쳤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 미쳤을 확률이
높습니다. 옳지 못한 것을 보고 옳다고 한다면, 세상이 미쳤던지 그 사람이
미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혼돈을 느낍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참으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똑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먼저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옳은 것이라 철저하게 믿을 수 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두가 미쳤다고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당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옳으심을 믿는 것은 하나의 신앙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도 당대의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요즈음 방송매체들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분야의
사건들, 그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는 혀를 차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분노를 폭발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철저하게 미쳐가고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그러한 사회를 만든
동조자이거나 방관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심이 생산해낸 세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주어질 시간들, 그 시간들은 더욱 옳은 것을 위해 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복음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옳은
것을 따르는 우리여야만 합니다. 복음적 실천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복음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삶은 분명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2015년 나해 1월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념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1)
여러분은 미친 듯이 일해 본 적이 있나요?
미친 듯이 사랑해 본 적은요?
예수님도 미친 듯이 일하셨군요.
병자들을 고쳐주느라 식사도 못하였다네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자신의 몸은 아랑곳 않고
미친 듯이 저렇게 일하니 친척들의 눈에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 같군요.
젊은 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몸사리지 않고 살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제 몸으로는 그렇게 못하여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만큼은
사그라들지 말아야 할텐데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 마음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텐데요.
벌써 열정이 식어버리고 사랑이 식어버렸다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시한번 우리 힘내봐요. 하느님 나라를 품에 안고
오늘도 힘차게 시작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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