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3,22-30)
“Lord, will only a few people be saved?” He answered them,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말씀의 초대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곧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다른 나라에 흩어진 동포들까지도 모아들이신다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시련을 어떠한 자세로 이겨 내야 하는지 권고한다. 곧 시련을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내린 훈육으로 여기고 인내하며 바른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러할 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하였다고 자부하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태도를 버리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번은 동창 신부가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 하였는데, 그분은 공직자로서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비근한 예로,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과일 등의 선물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곧바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단돈 만 원 한 장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아들 신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원칙 하나가 있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단다.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선택하기 싫은 것, 바로 그것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될 거야.” 덜 원하는 것, 덜 편한 것, 덜 쉬운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복음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그려야 합니다. 그 반면, 넓은 문은 대접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하고 쾌적합니다. 이 두 개의 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도록 합시다.

첫째가 꼴찌 되는 실수 범해선 안돼"
-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주님은 구원받을 사람들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주님과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긴밀한 내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회개의 여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주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는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만 두려고 해도 되풀이 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인정하며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한탄하는데서 방향을 전환시켜 주님의 자비에 맡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바라는 '악'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께서 바라는 '선'으로 향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키고 변명의 구실을 늘어놓는 것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희망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 여정을 걸어가듯이, 주님은 우리가 누구나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 되풀이 되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서기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자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사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두드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의지와 필요성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입니다. 문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세상이 주는 사라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두드림은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용서와 자비의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을 제시하십니다. 아마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기에 좁다는 뜻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문은 들어가기에 결코 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삿짐 옮기듯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손에 움켜쥐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을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 가져가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오히려 문에 걸려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교만, 자신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자만, 그런 장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문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며 열려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이 닫히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문 밖에서 외칠 것입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아담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주님을 피해 두려워 숨기만 했습니다. 주님이 애타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찾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서, 주님 성찬례 안에서, 주님을 안다고 변명해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필요에 따라서만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우리는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픈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준다는 사실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다
-손용환신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그러면 좁은 문의 특징이 뭘까요? 어렵고 힘듭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합니다. 의미 있게 삽니다. 구원을 희망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합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참고 인내합니다. 겸손하며 용서할 줄 압니다. 아낌없이 베풀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신 분들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넓은 문의 특징은 뭘까요? 쉽고 편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합니다.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요행을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교만하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모으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멸망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 고질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일주의요, 둘째는 상대주의요, 셋째는 실리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편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물질문명입니다. 요즘은 물질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한 것에 길들여지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고 점점 더 안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다음은 상대주의입니다. 요즘은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방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피땀 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목숨 바쳐 의로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살아서 존경받을 이유도 없고, 세상이 썩고 부패해도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리주의입니다. 이것은 결과주의와도 비슷합니다. 방법과 과정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질병이 신앙생활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축복만을 갈구합니다. 이런 신앙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편한 길이요, 넓은 문입니다.
엘리위젤이 쓴 「흑야」를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무리들이 일터로 끌려갈 때, 사정없이 내리치는 간수들의 채찍을 피해 대열의 가운데에서 걷고자 사투합니다. 일단 대열의 중앙을 확보하면 무서운 채찍은 모면할 수 있습니다. 채찍은 항상 바깥쪽의 친구들만 위협하고, 중앙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사안일주의적인 평범한 중앙대열에서 이탈하시어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의 문은 대열의 중앙에 있기만 하면 저절로 밀려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도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될 날은 반드시 옵니다.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지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오늘의 희생과 봉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지옥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멸망으로 이끕니다. 천국의 문은 좁고 험하지만 생명으로 이끕니다. 집주인이 천국 문을 닫은 후에 문을 두드리지 맙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신희준신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말마디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뭔가 답답해져 옴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받는 것마저도 ‘무한경쟁’이란 말인가요?”라는 공허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봅니다. 어릴 적부터 자원은 오로지 인간뿐인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짓밟고 죽이는 일에 넌더리나게 푹 빠져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직장 다니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중학교, 더 좋은 초등학교, 더 좋은 유치원 등등에 다니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우리에게 ‘좁은 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도 ‘좁은 문’이라뇨?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신앙생활도 결국엔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물리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랑의 예수님께서 설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문득 신학생 때 수업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은 무한하게 크지만, 그렇게 큰 은총을 받아 담아야 할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의 그릇이 작은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박하게 작다고 하느님 탓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을 향한 ‘좁은 문’과 구원의 ‘좁은 문’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가 간과했습니다.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은 누구나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그곳을 향한 문은 ‘실제로’ 좁지만, 그와 반대로 구원을 향하는 길을 ‘정말로’ 충실하게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넓기만한 구원의 문은 좁은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인 정치인
은 많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처럼 정치하는 사람은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겉으로 외치면서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무척 적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오. 미안하지만 문을 열어 드릴 수 없겠소.”라며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는 우리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 해주실까요? 우리 얼굴을 알아보셔야 우리가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정답은 우리 양심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번 오랜만에 일으켜 세워 볼까요? 정답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끝으로, 제 가슴 속에 작은 울림을 남긴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아르 지방의 한 평야에 세워진 바벨 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세기에 건립된 그 탑의 건설은 혼란을 일으키며 중단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탑들을 사람들은 짓고 싶어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첫째 탑의 운명을 후대의 탑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__

사통팔달
- 장재봉 ?
세상은 숫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과 큰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오늘 주님을 찾은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궁금해 한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숫자의 많고 적은 것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힘써라”고 동문서답을 하시네요.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느님나라를 향하는 길을 크고 넓게 확장하시고
그 나라로 통하는 문을 사통팔달 열어 놓으신 분께서
“좁은 문”이라 하시니 의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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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 말씀은
하느님의 계획이 이미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깨닫도록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모으신 일도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는 말씀도 교회를 통해 모두 이루어졌으니까요.
오늘 주님의 아리송한 답변의 이유를 찾아봅니다.
물론 우리는
좁은 문에 대칭되는 넓은 문이란
세상이 따른 일이기에 수월하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기에 매우 인기가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때문에 매사,
세상이 선호하는 일을 포기하고 결단하는 결의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순간마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 상황인지를 일깨운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최선을 살아가는 마음들이 너무 ‘좁다’고
더욱 더 “힘써라”고 말씀하신 줄 모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이지만
한번 닫히면 결코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
한번 들어서지 않으면 영영 놓치게 된다는
절박한 진실에 깨어있기를 당부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늦기 전에’ 주님께로만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또 어려운지를 일깨우신 것이라 받습니다.
노닥대느라 허비한 시간만큼
불의와 타협하느라 더뎌진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고
그분의 길을 어서 가고, 마저 가야한다는 이르심이라 헤아립니다.
그 길을 막고 있는 잡다한 생각들을 허물고
그 문 앞에 놓인 것들을 말끔히 치워야 한다는 말씀이라 새깁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모여든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얼마든지
믿음으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을 다 받아들이기 위해서
넓고 큰 길을 닦아 놓았으며
엄청나게 큰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아멘

어느 날 부자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의 초라한 옷차림을 본 종업원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작은 비누와 너덜너덜한 수건을 주었지요. 목욕을 마친 그는 종업원들에게 금화 한 개씩을 팁이라면서 각각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깜짝 놀랐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보다도 오히려 후한 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했지요.
‘우리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더라면 더 많은 금화를 팁으로 주지 않았을까?’
일주일 뒤 부자가 다시 그 목욕탕을 찾아왔습니다. 종업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이번에는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그에게 무료로 마사지도 해주고, 몸에 좋은 향수도 뿌려주면서 극도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목욕이 끝나자 부자는 그 종업원들에게 팁이라며 100원씩만 주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종업원들을 바라보며 부자가 말했습니다.
“이 동전은 지난 번 서비스에 대한 것이고, 지난 번 금화는 오늘 서비스에 대한 것이네.”
이 부자의 행동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공평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동을 섣부르게 판단하기에 급급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대상은 나의 이웃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문이 자기에게만은 활짝 열리기를 바라기 보다는, 그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이 꼴찌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꼴찌처럼 보였던 사람이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그 좁은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을 간직하고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형제님 한 분이 전력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렇게 전기가 나가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전력회사 직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부터 빨리 드십시오.”
정전되면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이 녹을 테니 빨리 먹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우선순위는 사랑의 실천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목표는 찾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운이다(G.K.체스터톤).

“공부의 신”이라는 TV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꼴찌들을 모아 국내 최고 명문대에 합격시키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시청자들은 ‘루저’들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여기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강자의 논리’와 ‘1등 지상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세상은 첫째를 우선적 가치로 꼽습니다. 둘째 이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1등만 대접을 받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풍자도 있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이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은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공하고 출세하여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이웃과 단절되고 맙니다. 또한 첫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늘 불안하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꼴찌의 삶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기꺼이 꼴찌가 될 때 이웃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만연된 시대에 상생과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바보는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바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궁극적으로 “바보천사”라 불립니다. 이 세상에서 기꺼이 꼴찌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
-전삼용신부-
살다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에겐 술을 마실 때 후회스러운 일이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어제도 과음을 해서 오늘도 늦게 일어났고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한 채 보내야했습니다.
저는 독한 술을 잘 안 마시는데 어제는 술자리에 함께 하신 신부님들이 고량주를 드시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조심스런 분위기라 저 혼자 약한 술을 마시겠다고 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상황이 그렇게 가더라도 아닌 것 같으면 혼자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과 과감하게 홀로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한 심리학자가 지원을 받아 제비뽑기를 하여 간수 팀과 죄수 팀을 짜서 며칠간 만들어진 감옥세트 내에서 상황극을 하며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수들은 점점 사악해져갔고 죄수들은 간수들의 폭력에 온갖 굴욕적인 것까지 정말 죄수처럼 따라하였습니다. 실제 간수가 아니고, 실제 죄수가 아닌데도 아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황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결국 며칠 뒤 폭력이 점점 심해져서 억지로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간수들이 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대부분의 장면들이, 수십 년 후에 미군들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했던 장면들과 매우 흡사한 면을 보면서, 상황이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지를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것도, 좋은 단체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혼자서는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하는 것들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상황의 힘 안에서 힘없이 맥도 못 추고 주관도 없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조종하는 그 상황의 힘을 이기라는 뜻입니다.
공기 중에 인간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산소는 21%입니다. 그러나 생명유지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질소는 78%를 차지합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도 질소의 비율보다는 산소의 비율에 가까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해서 더 많은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당에 나온다고 해서 과연 다 공기 중 산소와 같이 21%에 속할까요?
세계에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도 21%정도 되겠지만, 그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정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21%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주일미사 참례율은 신자의 30%에도 못 미치고, 유럽은 10%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나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따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진짜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미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분과의 친교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사에 나와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미사를 했는데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겠다’고 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2년의 보좌생활을 하고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전화로 자신들의 이름을 대면서 먼저 자신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조금 난감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리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학교 때 지금의 에버랜드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누가 예쁜 여자들과 사진을 찍는가 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예쁜 아이에게 말을 걸어서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그 아이와 단 10초 정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일 년 이상을 매일 함께 했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상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상을 주지 못하는 신자들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거나 혹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억에 오래남지만 특별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 신자들은 자주 연락하지 않는 이상엔 조금씩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잊지 않으시지만 아무리 미사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도 악을 일삼으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억하시는 예쁜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매일 군중 속에 끼어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예수님께 예쁜 모습을 보여야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에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나서서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앙만 버리면 많은 재산과 명예를 주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고통스러운 순교를 선택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끌어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들은 모두 성인들이고 예수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많은 사람이 넓은 문으로 가고 좁은 문으로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이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골고타 언덕까지 간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요한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가슴깊이 새겨진 사도는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율 28%,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28%에 들어야합니다.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당연히 몇 명 안 되죠? 그렇다면 그 몇 명 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까, 읽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묵주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안 내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정말 이렇게 따지다보면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좋은 길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고 무엇이 좁은 문인지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좁은 문이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길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십시오.”

좁은 문
-임문철 신부-
‘좁은 문’ 하면 갑자기 입시 지옥이 생각나 느낌이 그닥 좋지 않습니다. 요즘 부모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진학 문제라고 합니다. 아니 진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신학교 입학 시험을 보는데 꼭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하다가 순간, ‘내가 붙으면 다른 한 사람이 떨어져야 하는데?’ 하고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고 말았습니다. 좁은 문은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지 않고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잔뜩 구겨 넣은 이기심과 탐욕의 대형 짐가방을 들고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문입니다. 배낭도, 손가방도 버리고 빈 손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이지요. 대신 좁은 문은 남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사랑의 손에는 무한히 넓어지는 자동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좁은 문은 달콤한 멍에요, 가벼운 짐입니다.

좁은 문으로, 파이팅!
- 김영국 신부-
파이팅! 우리말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경기에서 ‘잘 싸우자’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호를 너무나 좋아해서 운동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하자는 격려의 의미로 아무 때고 사용한다. 가벼운 게임을 할 때도 의례 파이팅을 외친다. 파이팅이 원래 ‘싸움’이라는 뜻의 파이팅(fighting)에서 유래했으니 외국인들의 귀에는 우리가 호전적인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도 파이팅을 외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힘써라’는 번역은 너무 점잖다. 희랍어 ‘아고니제스테!’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편에서는 거저 주시는 것이나 우리 쪽에서 보면 그저 편안히 드러누워 얻어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1티모 6,12), 자신도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2티모 4,7)고 말했다. 여기서 다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믿음의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처절한 싸움의 길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문(요한 10,9)이 되어 주셨다. 성경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고 전한다. 여기서 ‘고뇌에 싸여’라는 표현 역시 너무 약하다. 희랍어로 ‘엔 아고니아’는 머리만 쥐어짜는 고뇌가 아니라, 인류구원의 기로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며 악의 세력과 벌이신 처절한 한판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소수정예로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구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권고와 격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주님이 그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주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것처럼(1코린 10,1-5), 세례성사를 받아 교적에 이름이 올라 있고, 게다가 성경과 교리지식까지 풍부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며 주님과 안면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주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하시며 매몰차게 외면하실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우리 모두 파이팅!

좁은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평화신문 2004년 8월 22일-
요즘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대안학교를 비교 연구하던 중 특별한 한 학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교육이념에 충실한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적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대학합격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의 강한 소명의식과 끊임없는 헌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읽다가 '직업선택의 십계'란 항목이 유난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①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②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③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④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⑤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⑥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⑦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⑧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⑨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⑩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한마디로 요약해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왜 하필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은 왜 우리를 좀 편하게 두지 않으십니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멸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넓은 문은 누구나 꿈꾸던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선택함과 동시에 넓?예루살렘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영예스런 문이 아니라 고통스런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가파르고 좁고 험한 길인 십자가 길, 치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 길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좁은 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생명을 구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의 각 단계 앞에 놓인 많은 문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문 크기에 절대 연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문 크기나 외적 화려함에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문이 얼마나 비싼 문인지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보다는 문의 종착점을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 삶의 최종목표이신 주님께서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넓은 문을 포기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주님께서 통과하신 문이며, 좁은 문 그 너머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비록 고달프고 자주 포기하고픈 문이지만 결국 그 문만이 영생의 문이며, 구원의 문이며, 부활의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사실 너무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앞에 펼쳐질 구원의 문은 넓기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넓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완고하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들, 과도한 욕심과 지나친 이기심으로 가득차 터질 듯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구원의 문은 좁기만 합니다.
내 방식만이 최고라는 사람들,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사람들, 언제나 사사건건 따지고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영혼은 너무도 비대해진 나머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입니다.
반대로 매일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매순간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사람들, 갖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과중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매일 떨치고 기쁘게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은 한없이 넓기만 합니다.

좁은 문
- 이기양 신부-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된 자매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자매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또 신부라는 이유만으로는 천당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하고 인간적 친분을 내세워 들어가려고 애원하지만 집 주인은 야박하리만치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아무리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친분이 있어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뽑혀서 첫째가 된 그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이 말씀은 이방인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도 비록 그 출발은 늦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따른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은 자녀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켜서 어떻게 출세를 시켰으며, 재산은 얼마나 모았으며, 얼마나 사회적 직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조건을 갖추면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요 행복한 집안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준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고 첫째로 꼽힐 사람의 기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느냐'하는 것이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관점을 지향해서 살아가며 그것밖에 모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첫째였을지 몰라도 죽어서 하느님 심판을 받을 때 꼴찌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는 덜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주 구체적인 예가 루카 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매일 호화롭게 먹고 입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부자는 자신의 재산만 믿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부자의 집 앞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며 개들이 종기를 핥던 거지 라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첫째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도 이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기에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23절)라는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늘나라를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Meir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Shema(신명 6,4)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반대로 어떤 묵시문학계에서는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한 방울의 물보다 크듯이 구원받는 사람들보다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제4에스델 9,15).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직접적인 답은 회피하시고 구원에로의 결단을 촉구하시고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24-25절)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위대한 선물인 하느님 나라를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24-25절).
만일 문밖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세례를 받았고,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영했다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26절). 선을 행한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 앞에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악을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만이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해있다는 특권으로가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에 따르는 의무와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인간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만이 은총과 사랑을 통해 당신의 길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차지하고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사명 즉 ‘선교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1977년 8월 3일, 바오로 6세 담화문).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먼저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철저히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부 사람들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모든 이로 하여금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세례 때 받은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참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1. 연옥에서 만난 주교님 본당에서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한 아주머니는 본당신부님을 항상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당 신부도, 그 아주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연옥에서 그 신자가 본당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높고 먼 곳에 계셨던 본당신부님을 연옥에서 만나다니, 한동안 정신이 멍하였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본당신부님께 달려가서 “신부님, 저는 신부님 본당의 신자였는데, 신부님이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쉿! 조용히 하세요. 저기 우리 주교님도 계셔요.”하였다고 한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주교님도 아직 연옥에 계셨다.
이 이야기는 물론 꾸르실료 교육 때 할법한 우스개 소리지만,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없지 않다. 인간 세상에서는 신분과 직책의 고하(高下)나 빈부귀천(貧富貴賤)에 따라 사람대접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꼴지가 첫째 되는 이변 이 세상에도 예상을 뒤엎는 사태들이 많다. 선거 때마다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의 투표소 출구조사에서조차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후보가 의외로 고전하고 낙선하는가 하면, 가망이 없어 보이던 후보가 의외로 민심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당선되는 예를 많이 본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 조사(祖師)로 추대되고, 방장(方丈)이 되어 대대로 전수되어 왔다. 그래서 ?달마? 대선사(大禪師)로부터 시작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마도조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누가 다음 대를 잇는 조사(祖師)로 추대되어 방장이 될 것인가??하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사(祖師)는 수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깨달음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공안(公案)을 내걸고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부엌에서 불이나 지피던 화부(火夫)나 주방장들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받아 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무욕(無慾) 무념(無念)의 경지를 얻고, 진정한 혜안(慧眼)을 갖는 득도(得道)의 길은 세상의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하는 질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쉽고 편하여 많은 사람이 택하는 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선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고 말씀하신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벌, 재산, 사회적 지위, 가문, 미모 등등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비굴하게 행동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너와 다르다.”를 강조하며 “네가 감히 나와 맛 먹으려고?” 하는 자세로 얼마나 으스대고 잘난 체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내세우며 비뚤어진 선민(先民)의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자렛 촌놈’으로 여겨 배척하였다. 결국 첫째는 꼴찌가 되고, 이방인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오래된 구교우 집안이라고, 집안에 신부 수녀가 많이 났다고, 재산이 많다고, 본당 간부나 직책을 오래 역임했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께서는 “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구원될 사람들 중에 들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살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십자가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쉽고 편한 것이 =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문 :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자!
- 홍금표 신부-
우리 민족의 특징을 극단성에서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극단적으로 발달시키는 경향입니다. 중국보다 더 극단적인 주자학,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가톨릭 문화가 그러한 예입니다. 최근 웰빙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도 그렇고, 개구리가 좋다하면 개구리가 씨가 마르고, 반신욕이 좋다하면 반신욕과 관련된 용품과 방법이 봇물처럼 터지는 현상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적인 건강한 삶에 더해질 때 유용한 것으로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양 한동안 얽매입니다.
이러한 극단을 추구하는 현상은 우리 국민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것보다는 특별하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인기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상적인 가치나 평범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습니다. 탈선이 아니면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드라마들이 「다모 폐인」이나 「파리의 연인 폐인」과 같은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인간의 욕심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적이고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단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보다 더 이상적인 사랑과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은 특별한 비법과 신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본적이고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은 특별한 무엇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인양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기본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되고, 특별함만을 쫓다 정말 중요한 일상을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이란 인간의 의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그 의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의향에 맞갖은 의지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 노력이 좁은 문, 즉 회개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기본진리입니다. 요즈음 올림픽이 뉴스의 중심입니다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승리라는 선수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땀이 함께하는 연습과 노력이 있을 때 꿈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두르려도 소용이 없다』란 말씀은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 즉,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세상의 일을 하고 내일은 구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28절의 말씀. 같이 식사를 했거나 가르침을 받은 것과 같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또는 아브라함과의 육적인 관계 등 그러한 자격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의 악을 일삼는 자들(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정의의 실천 여부가 심판의 관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다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여기서 첫째와 꼴찌는 구체적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유다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인생에 있어서는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요,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고,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완성(구원)을 위한 회개의 삶이 바로 오늘의 삶이요, 그러한 삶이 첫째가 첫째로 남아 있고, 꼴찌도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에 왕도와 특별한 비법은 없다』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 김기성 신부-
우리는 많은 불안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불안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갖는 불안함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지키고 살아가니까 내가 죽은 후에 하느님은 나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겠지?' '비록 내가 약간의 죄를 짓는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바로 이런 의혹과 불안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한 편으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일들을 도와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만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자부심을 가차 없이 깨트리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으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하신 후에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에,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율법서에 적힌 대로만 행동하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아 항상 불안에 떨며 생활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불안 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는 않고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유혹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좁은 문을 향하여 가려 해도 갈등과 고통이 따르니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넓은 문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다 하여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넓은 문을 통과해서 살다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좁은 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말입니다. 또한 그 좁은 문은 선택된 사람들만이 통과 할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았으니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만을 갖고 있다든지, 약간의 선행과 의무를 지닌 신앙생활로 만족하여 머물러 있다면 구원의 좁은 문은 영원히 통과할 수 없는 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만족함이 없이, 그리고 멈춤이 없이 넓은 문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매 순간 이겨내는 싸움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 서공석 신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울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봅니다. 보지는 못하였어도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법대로 심판하고 벌 줄 것이라 상상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그 그늘에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기도 하고 제물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인간 상상이 만들어낸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질서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토스에게?,10,6). 그런 본받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질서가 실천되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바로 이 본받음이 보이는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하는 신을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재주껏 혜택을 받아내어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매료된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본받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얻고,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실(失)이 아니라 득(得)이 구원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이 아니라 득을 주는 구원을 찾아 나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으면서 실천 가능합니다. 소수의 사람이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합니다. 그런 것을 하느님이 주시는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잃었을 때 하느님이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와 혼동되지 않은 하느님에게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런 것과 혼동되지 않는 하느님을 택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우리가 쉽게 탐내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이, 그러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때때로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회 제도 안에 몸담는 일도 아니고 기적을 얻어내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길도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득이 아니라 실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내는 길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을 찾지 않고 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
- 최경용 신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지만 사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상으로 인해 자기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사람이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즉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은 죽어야 판결이 나고 완성되므로 ‘아직’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 받는 조건은 주님을 믿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연결되어 있다. 이승에서 잘 살아야 저승에서도 잘 산다.
어떤 이는 자기 조상이 순교 성인이고 자기 집안이 순교자 가문이라고 자랑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구원은 순교자, 성직자, 수도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잘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신자 아내를 둔 어떤 비신자가 ‘자기는 하느님의 사위’라고 자랑하였다. 자기 아내가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니 자기는 저절로 하느님의 사위가 되었단다. 아무리 하느님의 사위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은커녕 장인 되시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일수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불의를 일삼은 사람에게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고 항의해 봐도 소용이 없다. 같은 내용이 담긴 마태 7,21-23을 보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사람만 알아보시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른다고 배척하신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행복이다. 사랑하면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구원 받겠습니까?’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보편종교 가톨릭이란 ‘공번된’ ‘보편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열린 종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시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장애자이든, 여자이든, 죄인이든, 세리이든 그들 모두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그것도 모든 계층, 성별, 나이, 종교 등의 엄격한 차별이 있었던 때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열망하시며 포용의 참 평화를 사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 스승 예수님의 정신을 꼭 닮으려 노력하였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200년 전 그 같은 놀라운 보편된 가톨릭 신앙의 정신이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분들은 분명히 가톨릭 정신을 알았고 그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양반, 중인, 상놈, 노비, 천민, 백정의 계급이 뚜렷했던 그 시대에 그 모든 계급의 벽을 부수어 버리고 함께 평등의 삶을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호남 교회사 연구소 소장이신 김진소 신부님은 그때의 교우들 감격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천주님의 신비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감격에 자지러졌다. 이 깨지기 쉽고 허약한 뚝배기 같은 인간, 훅 불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인간, 정승집 개만도 못한 인간이 천주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라니, 이제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광명의 빛이 이 땅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신앙의 인품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내려오니 그토록 빠른 시간에 복음이 이 땅에 선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진 것처럼, 동방의 한국 땅에도 전해진 것입니다. 보편된, 가톨릭 그 이름으로 말입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 18)
걱정의 소리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하였습니다. 2000년 전, 200년 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에도 가톨릭, 보편 신앙이 가능했었는데, 그 모든 차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가 보편된 가톨릭 이름 값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의 삶이 가엾어 지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자신들과 이해가 맞는 교우들과 신앙이 아닌 친목 모임으로 변절되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된 바리사이 종교가 되어 나가는 행태에 걱정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본당은 본당대로 자기 본당에 안주하려 들고, 교구는 교구대로 자신의 교구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늘날 개신교의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통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 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 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 헌금자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하였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 말은 비단 개신교 교단에만 국한된 탄식과 비난이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도 어느 사이엔가 비슷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행하였던 자신들만의 성역을 쌓는 파렴치한 일들을 오늘 우리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의 신앙의 삶에 물어 보아야할 것입니다. 전통 신앙이라고 자부한다면 그 전통에 걸맞은 너그러움과 보편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미리 시작하였다고 모두 구원의 문에 입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받아들임, 좁은 문으로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오늘 예수님 진노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까지 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 무슨 까닭인지 앞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앞 사람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본래 얼굴과 다른 사람들이 많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답니다. 얼굴이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형수술이 유행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우스갯말까지 나올 정도로 외모에 대한 관심이 크다 보니 무리한 다이어트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육신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 영혼도 다이어트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단지 밥을 굶어서 살을 빼는 다이어트는 생명력이 없고, 적당히 영양을 섭취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한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주님!’ 한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영양을 섭취하고 실천으로 단련될 때 영혼은 비로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영혼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살펴봅니다.
음식:“얘야, 살아가면서 너 자신을 단련시켜라. 무엇이 네게 나쁜지 살펴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사실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누구나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온갖 사치를 누리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음식을 탐하지 마라. 사실 병은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데서 오고 탐식은 구토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탐식 때문에 죽었으나 그것을 피하는 자는 생명을 연장하리라.”(집회 37,27-31) “술 마시는 것으로 남자다움을 과시하지 마라. 술은 많은 사람을 망쳤다.”(집회 31,25) 하느님의 뜻:“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의 것:“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콜로 3,5.8) 삶의 자세:“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자선:“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말:“절대로 말을 옮기지 마라.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리라. 어떤 말을 들었으면 죽을 때까지 묻어두어라.”(집회 19,7.10ㄱ) 부정 이윤:“상인은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고 장사꾼은 죄악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죄를 짓고 부를 찾는 자는 눈을 감아버린다.”(집회 26,2927,1) 나눔:“계명을 생각해서 빈곤한 이를 도와주고 그가 궁핍할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 돈을 내주어 그 돈이 돌 밑에서 녹슬지 않게 하여라.”(집회 29,9)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자녀교육:“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종종 매를 댄다. 그러면 말년에 기쁨을 얻으리라.”(집회 30,1) 용서:“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랑:“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걱정:“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 시련:“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1베드 4,12) 재물:“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복음선포:“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부모공경:“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에페 61) 판단:“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완전히 지키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율법교사나 부자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18,18) 하며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질문한 어떤 사람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구원받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다, 많다’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십니다. 내 역량만큼 힘쓴 다음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한테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그것마저 빼앗긴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힘쓰지 않은 것입니다. 행하는 사람은 체험을 통해 영적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더 행하게 되고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예수께 감동을 준 이유도 그녀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루카 21,3). 꼴찌 그룹에 속하는, 어쩌면 물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물려받은 것이 별로 없어 창녀와 세리가 된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참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단죄와 구원의 기준
-박상대신부-
루가는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예수께서 그 도중에 마치 어느 곳도 빼놓지 않으려는 심상으로 여러 동네와 마을에 직접 들러 가르치셨다고 전한다.(22절)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루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을 재차 강조하고,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는 걱정을 은근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숫자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에 ‘좁은 구원의 문’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묻기보다, 묻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숫자보다는 좁은 구원의 문을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24절)
여기서 노력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개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를 마지막 시간으로 미룬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發想)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좁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이 한번 닫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뇌물이나 억지는 물론, 끈덕진 요구도, 면식(面識)도, 친분(親分)도 통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판에서 단죄와 구원을 판가름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악을 일삼는 자들’이다.(27절)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임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과 평소에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善)을 따라 행동했느냐 않았느냐는 것이다. 줄을 잘 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善)과 정의(正義)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음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 소수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꼴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30절) 성조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이미 들어 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허락 받았으나, 그들 자신은 정작 문 밖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문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당장 회개하는 사람이며, 회개의 표로 선(善)을 행하고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