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7권 = 잡저(雜著)-주회암이 《참동계》는 헛말이 아니라고 한 데 대한 변증
주회암이 《참동계》는 헛말이 아니라고 한 데 대한 변증〔朱晦庵謂參同契非虛語辨〕 참(參)은 섞는다[雜]는 뜻이요, 동(同)은 통(通)함이요, 계(契)는 합함이니, 《주역》과 이치가 통하고 뜻이 합함을 말한 것이다. 후한(後漢)의 위백양(魏伯陽)은 회계(會稽) 상우현(上虞縣) 사람인데, 수진 양지(修眞養志)의 법으로 이 책을 지어서 청주(淸州)의 서 종사(徐從事)에게 은밀히 보였더니, 서 종사가 이름을 숨기고 주해를 하여, 환제(桓帝) 때 같은 고을의 선우숙통(鮮于叔通)에게 주어서 마침내 세상에 행해졌다.
신선(神仙)의 책이 옳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군자는 마땅히 배척하고 비난하여 그것을 불태우려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참동계》라는 책은 본래 지인(至人)이 내단(內丹)하는 법에서 나왔는데, 무(無)를 생각하여 유(有)를 이룬다는 것에서 그 책이 허탄하고 그 법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고정 선생(考亭先生 주희(朱熹))께서 주해하여 전하면서 이름을 숨기고 기록하여 은연중에 그 책을 믿고 그 도(道)를 지킨 것은 어째서인가?
말한다. 주자가 어찌 믿었겠는가. 부득이해서이다. 하물며 그 설이 《주역》에 근본하고 이치가 있는 것에 가까움에랴. 그러니 비록 허황된 말이 아니라 여겨도 옳고, 발명해서 주를 달았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풍이 차갑게 불어오고 신주(神州 중국(中國))가 어지러운 때에 하찮은 서생(書生)이 도를 품고 쓰이지 못하자, 다음은 다급하여 허둥지둥 하였다. 물러나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책임을 펴지 못하고, 나아가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는 계획을 거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漢)나라의 불꽃이 재가 되려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타는 듯한 숨은 근심을 감히 말하지 못하며, 공자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려 했던 뜻을 품고 굴원(屈原)이 멀리 유람하려 했던 뜻을 본받아서 신선에게 의탁하여 한 책의 속에 나타내었으니 그 뜻이 어찌 얕다고 하겠는가.
이 책의 뜻이 비록 신선술(神仙術)에서 나왔으나 실제로는 《주역》의 오묘한 이치에 뿌리를 둔다.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그 법칙 또한 64괘로 신선이 되는 공정(工程)을 삼고, 건곤(乾坤)으로 화로와 솥을 삼고, 감리(坎離)로 물과 불을 삼았다. 30괘를 보름 전의 한 기운에 소속시키고, 30괘를 그믐 전의 한 기운에 소속시켰으니, 하루는 2괘 12효를 얻고 한 시간은 1효(爻) 1상(象)의 뜻을 얻었다.
그러므로 해당하는 괘와 만나는 효에 그 마음을 침잠하고 그 뜻을 기울여 잠시라도 간단이 없고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게 한다. 달이 차면 당기고 달이 비면 더한다. 조금이라도 잊어버리면 문화(文火)라 이르고, 조금이라도 조장(助長)하면 무화(武火)라 이른다.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니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반드시 그 사이에 일삼아서 천지 자연의 운행을 본받고 조화(造化)의 무위(無爲)의 묘리를 얻는다. 오래오래 푹 익히면 3년이 이른 뒤에 뼈가 바뀌고 정신이 변한다. 그렇다면 그 설이 조리가 있지 않으며 그 법이 지극히 치밀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주자가 차라리 이것을 하면서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과 더불어 쇠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래부터 멀리 노닐고 세상을 버릴 뜻이 있어서 이 허무맹랑한 말을 옳다고 여긴다면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나무라는 실수를 범하여 시비(是非)의 본심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한다. 그렇지 않다. 군자가 조정에 있을 때에는 그 백성을 근심하고, 멀리 강호에 머물 때에는 그 임금을 걱정하니,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여 근심하지 않는 때가 없다. 그러나 근심하는 뜻이 말하는 사이에 나타나고 문장 밖에 넘쳐나며 시비(是非) 사이에서 본심(本心)이 밝게 빛난다면, 그 말이 비록 멀리 노니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그 마음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오니, 어찌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비를 분별하는 밝은 눈을 잃겠는가?
공자가 “사이비(似而非)를 미워한다.”라고 하였는데, 《참동계》는 이치에 가까운 것이라서 진실을 어지럽힌다는 것이 아닌가?
말한다. 이 책의 비밀과 이 법의 오묘함은 군자의 양심(養心)의 법과 거경(居敬)의 묘함에 일치하며, 그 법이 지극히 은미하고 그 공은 지극히 엄격하다. 배우는 자가 진실로 이 도(道)를 배우고 이 학문을 전한다면 성학(聖學)에 매우 큰 공이 있을 것이다. 어찌 흡사하면서 진실을 어지럽히는 점이 있겠는가. 그러니 주자가 비록 멀리 노니는 뜻과 세상을 버리는 마음은 없었지만 또한 한가하고 무익한 한 일과 숨은 이치를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한 도는 아니다.
더구나 선생의 시에 “내 가서 그것 좇고자 하니, 세상 버리고 구름 낀 산에 있네.[我欲往從之 遺世在雲山]”라고 하였으니, 멀리 노니려는 뜻이 있지 않았던가? 또 “다만 천리를 거스를까 두려울 뿐이니, 삶을 탐하는 것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랴.[但恐逆天理 偸生詎能安]”라고 하였으니 과연 신선술을 믿었겠는가? 그 술을 믿지 않고서 도리어 그것을 본받고자 했으니, 그 근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근심이 깊었으니, 그 말이 자세한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선술이 아니다.
이 《참동계》의 말은 《주역》의 이치에 가까우며 옳은 듯하면서 그릇된 것이 아니니, 이 책에 가탁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노니 “이것을 어찌 믿었겠는가. 부득이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논자가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01] 참동계(參同契) :
도가(道家)의 서적으로 양생술(養生術)의 일종인데,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것이다. 참동계란 《주역》과 황로(黃老) 사상, 노화(爐火) 세 가지를 참고하여 하나로 만든 것으로, 노화는 연단술(煉丹術)을 이른다. 이 책에서는 감(坎)ㆍ이(離)ㆍ수(水)ㆍ화(火)와 용(龍)ㆍ호(虎)ㆍ연(鉛)ㆍ홍(汞) 등에 관해 많이 말하였다.
[주-D002] 내단(內丹) :
외부의 물질을 제련하여 단약을 만드는 외단(外丹)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호흡을 조절하여 정기(精氣)를 단련하는 것을 뜻하는 도가(道家)의 용어이다.
[주-D003] 공자가 …… 뜻 :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때 자기를 따를 사람은 아마 자로(子路)일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論語 公冶長》
[주-D004] 굴원(屈原)이 …… 뜻 :
전국 시대의 굴원(屈原)이 나라에 용납되지 아니하므로 신선과 함께 멀리 돌아다니며 장생을 노래한 〈원유부(遠遊賦)〉가 있다.
[주-D005] 문화(文火) :
약을 달일 때 쓰는 불에는 문화(文火)와 무화(武火)가 있는데, 문화는 불을 늦추어 때는 것을 말하고, 무화는 불을 급하게 때는 것을 말한다.
[주-D006] 내 가서 …… 있네 :
주희의 〈재거감흥(齋居感興)〉 시 중에 “표연히 신선의 무리 배우고자, 세상 버리고 구름 덮인 산에 있네.……내 가서 그것 좇으려 하니, 신발 벗기 실로 어렵지 않네.……[飄颻學仙侶, 遺世在雲山.……我欲往從之, 脫屣諒非難.……]”라고 한 구절이 있다. 《朱子大全 卷4》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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