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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리명 백과 - 리알토 다리
hanjy9713
2023.11.19. 16:44조회 10
리알토 다리
요약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대운하(Canal Grande)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모습의 보행자 전용 아치교이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리알토 다리 전경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다리인 리알토 다리
1. 다리의 정의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리알토 지역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단경간 석조 아치교로 1588년~1591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설계는 당시 베네치아의 공공 담당 기술자였던 안토니오 다폰테(Andrea da Ponte)가 맡았다. 경간의 길이는 28.8m이고 다리의 폭은 22.9m에 달하는 넓은 다리로, 두 개의 경사진 램프는 중앙의 포르티코(Portico)로 연결된다. 다리의 양편으로는 지붕이 덮인 램프를 따라 상점이 들어서 있다. 이 다리는 당시의 기술력에 비해 매우 혁신적인 다리로서 당시의 많은 건축가들의 우려와 달리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되었다.
2. 다리의 건설 배경
오래 전부터 리알토 다리 주변은 상권의 중심가였다. 12세기경, 넘쳐나는 상품들과 대운하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배가 감당하지 못하자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2세기 말 배다리(선교)가 건설되어 사용됐는데, 근처의 리알토 시장이 성행하면서 통행량이 늘자 이 부유식 교량은 1255년 최초의 목조 교량으로 교체됐다. 이후 수차례 목조 교량이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며 사용돼왔다.
1512년 화재로 다리가 유실된 후 파리의 노트르담 다리를 설계한 수도사 조콘도가 영구적인 석조 다리 건설을 제안했다. 1458년에 건설된 4번째 다리가 1524년 붕괴하자 베네치아 시는 석조 다리 설계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시 당국은 결국 다리 설계 공모를 실시했고 이는 애초부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구조물로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라디노를 비롯한 당시 저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에게도 설계를 의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 시의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당장 건설을 시작할 형편이 못되었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나 다리 건설이 추진되었을 때는 설계안을 제출했던 장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1587년, 베네치아의 공공시설 담당관인 토목 공학자 안토니오 다폰테에게 설계 임무가 맡겨진다.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리알토 지역의 대운하 위로 비단 상업 지역과 금세공 지역을 연결하는 석조 교량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3. 다리의 역사
1) 리알토 다리 이전의 다리들
이곳 리알토 다리가 서 있는 곳에는 원래 니콜로 바라티에리가 1181년에 건설한 배다리(선교)가 있었다. 이 다리는 근처에 있던 조폐 시설 때문에 ‘돈의 다리’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대운하 동쪽의 리알토 시장이 성행하면서 통행이 늘자 이 부유식 교량은 1255년 목재 교량으로 교체됐고, 이때부터 다리를 ‘리알토 다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다리는 1310년 바자몬테 티에폴로의 반란 시 화재로 유실되기도 했고 1444년에는 페라라 후작의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다리가 붕괴되기도 했다.
카르파초가 그린 그림의 교량은 1458년에 건설된 교량으로 경사진 2개의 램프로 이루어 진 다리인데 중앙에는 큰 배가 지날 수 있도록 도개교가 설치돼 있다. 다리 양편으로 상점이 들어서 있고 그 수익금은 다리의 유지 · 보수에 사용되었다. 브라운과 호겐버그가 1572년 출판한 1560년대의 베네치아 지도를 보면 지붕이 있는 목재 다리가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16세기 중반의 베네치아 지도
브라운(Georg Braun)과 호겐버그(Frans Hogenberg)가 1572년 출판한 책 <세계의 도시 (Civitates Orbis Terrarum)>에 실려 있는 1560년대의 베네치아 지도. 지붕이 있는 목재 다리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리알토에서 행한 십자가의 기적>(전체 및 부분)
카르파초, 1496년, 캔버스에 템페라, 365×399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리알토 다리 직전의 목재 다리의 디테일이 확연하게 보인다.
카르파초의 1496년 그림 <리알토에서 행한 십자가의 기적>에 당시에 서 있던 목재 다리가 상세하게 묘사돼 있어 당시 베네치아의 교량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상점이 들어선 경사진 램프는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간결한 처마를 달아놓았고 교각에는 X자 형태의 브레이싱이 사용됐다. 다리 램프와 같은 경사로 살짝 내밀고 있는 도개교의 캔티레버는 공학적으로든 미관으로든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다. 목재로 만든 교량이지만 당시 베네치아의 미술과 공예 기술을 한데 모아 놓은 듯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하다.
2) 다리의 건설
다폰테는 그에게 맡겨진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단경간의 세그멘탈 아치 교량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1588년 6월 8일 다리의 첫 돌이 놓이고 공사가 시작됐다. 다리의 건설에는 그의 조카 콘티노(Antonio di Bernardino Contino)가 참여했는데 그는 나중에 베네치아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되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를 설계했다.
3) 다리의 완성
공사를 개시한 지 3년 만인 1591년 다리가 완성됐다. 대운하에 영구적인 석재 교량이 최초로 건설된 것이다.
4. 다리의 설계 및 공법
1) 다리의 설계
이미 1503년부터 이곳에 석조 다리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다리 설계 공모를 하게 된다. 이 설계 공모에는 당시의 쟁쟁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당시 최고의 거장 미켈란젤로도 초빙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가장 잘나가던 건축가 팔라디오(Andrea Palladio)도 그중 하나였고 그의 야심 찬 교량 설계안이 이미 제출돼 있었다. 자신의 설계에 대해 팔라디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 중의 하나인 베네치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훌륭한 다리”라고 스스로 치켜세웠다. 그리고 다리가 “강이 넓고 상인들이 오가며 흥정하고 일 보는 곳에 있으므로, 웅장하고 위엄 있는 도시에 걸맞고 시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다리를 매우 넓게 만들어 도로가 3개나 지나도록” 했다고 밝혔다 .
그러나 3개의 아치로 지지된 그의 교량은 너무 크고 무거울 뿐 아니라 아치의 크기가 작아 부친토로(Bucintoro)라고 불리는 베네치아 영주의 큰 배가 지나다닐 수 없었다. 더구나 교량이 도로에 비해 너무 높아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안의 여러 건물들을 철거해야만 했다. 팔라디오의 설계는 웅장하고 우아했지만 공학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재에 밝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배의 통행을 제약하며 도로의 높이와 맞지도 않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다리를 반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팔라디오의 설계안
팔라디오가 설계한 리알토 다리. 3개의 작은 아치 위로 육중한 그리스풍의 건물이 서 있다.
1587년. 베네치아의 공공시설 담당관인 토목 공학자 다폰테에게 막중한 임무가 하나 맡겨졌다. 다폰테는 스위스 태생의 베네치아의 엔지니어로 1574년 화재로 손상된 베네치아 영주궁을 재건했던 인물이다. 다폰테는 당시 주로 사용되던 반원형 아치를 버리고 과감하게 단경간 세그멘탈 아치 교량을 선택했다. 경간의 길이는 28.8m이고 아치의 라이즈는 6.4m, 수면으로부터의 높이는 7.3m다. 다리의 폭은 22.9m로 길이에 비해 폭이 대단히 넓은 다리다.
이 다리의 모습은 직전의 목재 다리와 모습이 비슷했다. 두 개의 경사진 램프는 중앙의 포르티코로 연결된다. 다리의 양편으로는 지붕이 덮인 램프를 따라 상점이 들어서 있다. 이 다리는 당시의 기술력에 비해 매우 과감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팔라디오의 뒤를 이은 건축가 스카모치(Vicenzo Scamozzi)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다리가 곧 붕괴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예상과 달리 다리는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자리매김했다.
2) 다리의 공법 및 특징
다폰테는 그에게 맡겨진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는 폭이 40m인 대운하는 이 섬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였으므로 교량을 건설할 동안 배의 통행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교량의 아래로 큰 배들이 지나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예산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꼭 필요한 예산보다 금화 한 닢도 더 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교대가 놓일 지반의 조건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네치아는 연약 지반 위에 건설되었다. 그곳에 건물을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다 밑 지반에 나무 말뚝을 근입하고 그 위에 기초를 다져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다리가 계획된 곳의 주변에는 중요한 건물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곳을 너무 깊이 굴착하면 건물의 말뚝이 공기에 노출되어 부식될 것이 뻔했다.
다폰테는 단경간의 세그멘탈 아치 교량을 선택함으로써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당시로서 그러한 선택은 매우 과감한 것이었다. 당시 주로 사용되던 아치는 로마식 반원형 아치다. 반원형 아치는 하중을 거의 수직 방향으로 작용시킨다. 그러나 낮고 평평한 아치에서는 하중이 수직 방향뿐 아니라 수평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그래서 다폰테는 힘을 연약 지반 아래로 작용하는 힘과 함께 근처의 건물 기초에 수평 방향으로 작용하는 거대한 힘을 지지할 수 있는 기초를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양안에 우물통을 만들고 나무 말뚝을 높이가 서로 다르게 3단으로 근입하고 각각의 단 위에 평평한 플랫폼을 완성한 뒤 이 플랫폼 위에 벽돌을 비스듬히 쌓아 교대 기초를 완성했다. 그래서 교대 기초가 아치의 하중을 직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했다. 다폰테는 한참 후대의 기술자처럼 힘의 전달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이론을 알지는 못했으나 힘의 방향과 균형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경간의 세그멘탈 아치
많은 사람들이 다리가 곧 붕괴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결국 다폰테가 옳았음을 입증한 단경간 세그멘탈 아치 교량
3) 다리의 관련 시설 및 조형물
두 개의 경사진 램프는 중앙에서 계단을 통해 포르티코로 연결되고 램프를 따라 다리의 양 옆으로는 지붕이 있는 건물을 세워 상점들이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다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중앙부가 가장 넓은데 양 옆으로 석조 상점과 판매대들이 끝까지 늘어서 있다.” 이 두 줄로 늘어선 판매대들은 실제 다리의 일부로 그 내부뿐 아니라 양 바깥 편에도 공간을 두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리알토 다리 위 상점들
양편으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는 다리의 내부 모습
다리는 르네상스의 구조물답게 아치 볼트, 코니스 등으로 장식돼 있고 스판드렐에는 수많은 부조가 붙어 있으며 난간도 매우 장식적이다. 다리 위의 상점 아치와 중앙의 포르티코는 장식적인 처마로 마감돼 있다.
다리 중앙의 포르티코
경사진 램프가 중앙의 포르티코로 연결되어 있다.
5. 다리의 역할, 상징 및 의미
다폰테가 건설한 혁신적인 교량에 대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다리의 붕괴를 우려했으나 다리는 4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늠름히 서서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만일 팔라디오의 다리가 선택되었다면 다리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을까? 지금처럼 관광객이 꼭 가봐야 할 베네치아 최고의 명소 중 하나가 되어 있을까?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잘 나가던 건축가 팔라디오가 아니라 교량 기술자 다폰테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운하에 세워진 4개의 다리 중 존재감과 역사상이 가장 큰 대표적인 다리다.
두 개의 경사진 램프는 중앙에서 계단을 통해 포르티코로 연결되고 램프를 따라 다리의 양 옆으로는 지붕이 있는 건물을 세워 귀금속과 가죽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려야 할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다리를 포함한 베네치아의 건축물과 운하 등이 ‘베네치아와 석호’라는 집합적인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악마의 다리 전설
리알토 다리에도 악마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다리 공사가 힘들어서 그런 전설이 전해오는 것일 것이다.
오래 전 리알토 다리 공사가 힘들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주일 동안 낮 동안 해놓은 공사가 밤이 되면 운하 물로 허물어져 내리는 바람에 공사 감독들이 줄줄이 해고를 당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티아노라는 젊은이가 공사 책임을 맡게 된다. 그는 이 공사를 제 시간 안에 끝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아내가 첫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아노는 일이 끝난 후 밤새 다리에 남아 도대체 왜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자정이 되자 하루 종일 해놓은 작업이 큰 소리를 내며 대운하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세바스티아노가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 악마가 서 있었고 다리 건설을 마무리하고 싶은 세바스티아노는 결국 악마와 거래했다. 다른 악마의 다리의 전설과 유사하게 다리가 완성되면 다리를 지나는 첫 번째 영혼을 악마에게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악마는 결국 다리를 완성했다. 세바스티아노는 꾀를 냈다. 악마가 처음 지나가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안 했으니 이른 아침 개통식을 하기 전에 닭을 한 마리 먼저 건너게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세바스티아노는 다리에 경비를 세워 사람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그렇지만 악마라고 늘 속기만 하지는 아닐 터. 인부로 변장한 악마는 세바스티아노의 집으로 가서는 그의 아내에게 남편이 급히 찾는다고 말했다. 아내가 서둘러 다리에 도착하자 그녀의 얼굴을 아는 경비들이 다리를 건너게 해주었다. 세바스티아노가 닭을 구해 다리에 도착해보니 아내가 막 다리를 건넌 후였다. 남편은 기겁을 하고 악마와 거래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의 아내는 그날로 아이를 유산하고 해가 지기 전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로 다리에는 어린아이의 유령이 나타났다. 어느 날 곤돌라를 모는 어떤 노인이 어린아이의 재채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노인은 “어린 아기여, 신의 가호를!”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희미하게 “감사합니다”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축원이 어린 아이의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풀어주게 되었던지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6. 문화 예술 속의 다리
1) 문학 속의 다리
리알토 다리는 셰익스피어의 <베네치아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 등장한다. 제1막 3장에서 샤일록이 “리알토 다리에서 무슨 소식 없나?” 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2) 영화 속의 다리
수많은 영화 속에 베네치아의 명물 리알토 다리가 등장한다. 근래의 영화로는 2006년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로 출연한 <007 카지노 로얄>(2006)에서 제임스가 베스퍼(에바 그린)와 함께 리알토 다리와 아카데미아 다리 사이의 대운하를 요트를 타고 지난다.
3) 회화 속의 다리
<남쪽에서 본 리알토 다리>
카날레토(Canaletto), 1737년, 캔버스에 유채, 68.5×92cm, 로마 국립 고전 미술관 소장
베네치아 최고의 베두타 화가인 카날레토는 리알토 다리의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이 그림은 1737년에 그린 <남쪽에서 본 리알토 다리>라는 작품이다. 카날레토의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으로 리알토 다리와 주변 건물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리알토 다리>
프란체스코 과르디, 1775년, 캔버스에 유채, 샌디에이고 미술관 소장
밤의 리알토 다리
해가 지면 운하를 따라 하나둘 씩 켜지는 아름다운 불빛들이 밤의 리알토 다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알토 다리 (세계 다리명 백과, 이종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