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41/Vocaburary]다시 한번 외워 볼까? 될까?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곤혹스러운 게 영어 회화conversation다. 아내에게 듣는 지청구 1순위가 “영문과를 나온 사람이 어째 비행기만 타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나?”였다. 그때마다 유구무언有口無言. 긴급상황은 언제나 아내의 몫이다. 그것 참, 몹시 창피한 일이다. 그 대신, 아내가 요구하는 영어 단어vocabulary는 즉석에서 조달 내지 제공을 했건만, 이제 그것도 얼마 전부터 자신이 없어졌다. 스펠링이 생각 안나거나 뜻이 헷갈리는 단어투성이인 것을 어찌 하랴.
‘아내의 집’(용인 고기리)에 1주일째 체류 내지 정박하고 있는데, 음식물 등 쓰레기 분리처리는 나의 몫이다. 그게 싫지 않은 이유는 주민들이 버리는 책 가운데 ‘재활용’할 것들이 많다는 거다. 한번은 이름도 흐릿한 오래된 책이어서 들춰보니, 양주동 박사의 ‘여요전주’였다, 고려시대의 가요들을 풀이해놓은 책이다. 대박! 알라딘중고서점 검색을 해보니 25만원이나 한다했다. 책 욕심이 많은 나인지라 기분이 완전 짱이었다. 엊그제는 낙서 하나 없는 소책자 두 권<사진>을 발견했다. 『능률VOCA mini 어원편』과 『워크북』이 그것. Day 1-60, 1쪽마다 20개 단어, 모두 1200단어가 실려 있다. 호기심에 풀어보니 이런, 이런. 20개 중 5개는 똑부러지게 뜻을 말할 수 없거나 스펠링을 쓸 수가 없다. 한때 어휘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늙어 총기聰氣가 없어졌단 말인가? 이 참에 이것이라도 한번 익혀봐?
1977년 그 여름, 수유리 4.19탑 묘지 근처의 독서실에서 2주간 영어단어를 외우려 씨름을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익산에 있는 대학교 영어교육학과 1년을 어영구영 다니며 어쩌다 친구들을 잘 만나 유명 사립대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했다. 1학기를 다니는데 몇 년 된 듯 힘들었다. 영문과이므로 영소설英小說 『테스』와 『걸리버여행기』 등을 읽는데, 단어실력이 달려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고(고교평준화 이전의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광주일고, 광주고, 전주고, 대전고, 부산고, 경북고, 춘천고 등)를 졸업한 수재들로서, S대를 떨어지고 후기의 명문대에 들어온 친구들이었다. 나만 전북의 명문고를 떨어지고 당시는 2류였던 고교를 졸업했기에 “어느 고高 나왔다고?”라는 ‘치욕스런 질문’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고교 진학담당 선생의 “너는 영어는 전북에서 제일 잘하니 국문과 가지 말고 영문과 가라”는 말만 듣고, 영문도 모른 채 영문과를 간 것이다. 대학 내내, 아니 사회에 나와서도 잘못된 전공 선택을 후회한 게 무릇 기하였던가.
영어 과외라도 받아야 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향토장학금’(부모가 고향에서 농사지어 보내주는 등록금)에 의지하는 터라, 살아남으려면 ‘막고 품어야’ 했다. 방학때 독서실에 쳐박혀 당시 인기 있던 영어어휘책 두 권을 샀다. 지금도 생각나는, 노먼 루이스의 『Vocabulary 55000』과 레빈의 『Vocabulary 22000』를 독파하리라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 2주만에 22000 단어를 외우니 ‘길’이 보였다. 라틴어 어원語源(영단어의 60% 이상이 라틴어에서 유래)를 조금 아니까 단어들이 술술술 외워졌다(라틴어를 1년 정의채 서울교구장으로부터 배웠는데, 두 학기 모두 A학점으로,전과목에서 유일했다). 2학기부터는 조금 숨통이 틔여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영어 희곡 교수는 나에게 “전라도 사투리가 심하다”며 돌아가면서 하는 대본 낭송을 시키지 않고 왕따를 시켰다. 나쁜 선생님. 오기로 나는 사투리와 특유의 억양을 지금껏 고치지 않고 있다. 원어민 회화선생은 아예 학점을 주지 않아, '전공필수'였므로 4학년 2학기때까지 악착같이 보충하여 간신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영문과 4년은 나로서는 '악몽惡夢 그 자체'였다. 육군시절엔 한미연합사에서 15개월 동안 미군들과 합동근무를 했는데,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아 얘기 한번 변변히 하지 못한 속상한 기억도 있다. 겨우 한다는 것이 꼴에 양담배(켄트와 말보루)는 사피워야겠기에 “Would you mind changing?”만 연발했으니(잔돈, 그러니까 종이지폐 달러를 코인으로 바꿔달라는 말이다). 민족적 자존심도 없었다. 말년에는 쫄병들에게 그 심부름을 시켰다. 꼴에 영어로 러브레터를 써 미군 여자상사를 꼬시려 애쓰기도 했다. 쯧쯧. 그나마 독해讀解Comprehesion와 작문composition은 어휘력이 바탕이 되어 어지간히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중학교때 안현필의 『삼위일체 영어』를, 고3시절에는 송성문의 『성문종합영어』와 김열함의 『영어의 왕도』를 독파한 실력이 아니던가. 흐흐.
그런데, 이 작은 어휘 소책자에 실린 1200단어가 가물가물한다. 치매癡呆 예매나 방지에도 좋다고 하니까, 연금생활자로서 남아도는 게 시간이므로 이번에 1개월코스로 기억을 되새겨보자고 작정했다. 아무리 알코올 등으로 총기가 흐려졌다지만, 10대때 『천자문』을 2주간에 달달달 외운 기본실력이 있지 않겠는가? 시인 서정주도 눈 감는 날까지 지구촌 산山 이름 1천여개를 날마다 외웠다 하지 않던가. 구순의 아버지도 『반야심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눈 감고 낭송하지 않던가. 전전전 직장 친구는 은퇴 후 매일 아침 잠언箴言들을 5개 국어로 노트에 적는다고 하지 않던가. 간호사 아들은 원어민 못지않게 전화영어까지 유창하게 하여 애비의 기를 누르고 있질 않은가. 좋다, 함 해보자. premature, pros and cons, outdo, utmost, overtake, extrovert, replace, diameter, exhale, undergo, detach, detect, undertake, extinct, unlikely, dismiss...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나지만, 밑질 일은 전혀 없는 일. 죽을 때까지 학생學生으로 배워야 하는 일이거늘. 더구나 내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은 “직업으로는 농업이 최고이고, 공부해볼 만한 것으로 어원학etimology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육십을 훌쩍 넘겨 초보 농사꾼은 겨우 흉내라도 내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라틴어를 비롯해 외국어 단어들을 내 품 안에 가득 안아볼까나? 어쩔거나? 가는 세월을 어찌 하리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