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제학은, 사람이 자본을 섬기는 경제가 아니라, 자본이 사람을 섬기는 경제의 필요성을 말하는 경제사상이다.
소비는 행복의 수단에 지나지 않고 최소 소비로써 최대 행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Buddhist Economics은 독일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에 의해서 1966년에 제창된 경제학이자 응용불교학의 하나다.
영국 정부의 경제 고문이었던 슈마허는 1955년에 버마 정부에 경제 고문으로서 초대되고 현지를 방문했을 때, 현지의 불교도의 생활에 감명을 받아 특히 팔정도의 정업·정정진에 근거해 불교 경제학을 제창했다.
사원 경제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버마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던 독일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그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안에 불교경제학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물질주의자는 주로 물질에 관심을 보이지만, 불교도는 주로 해탈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불교는 中道이므로 결코 물질적인 복지에 적대적이지 않다.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불교경제학의 핵심은 소박함과 비폭력이다.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도의 생활방식은 경이롭다.
왜냐하면 놀랄 만큼 적은 수단으로 아주 만족할만한 결과를 산출할 정도로 대단히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근대 경제학자가 이것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항시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라는 전제하에 연간 소비량으로 ‘생활 수준’을 측정하는데 익숙하다.
일반인들은 이런 학과가 있는지도 모르며, 알고 있다 해도 불교학과에 입학하는 걸 출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출가하는 건 승려가 되는 것이다. 신부가 되려고 천주교의 신학과에, 목사가 되려고 개신교의 신학대학원 목회학과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불교학과는 종교학과나 개신교계의 일부 기독교학과처럼 인문학으로서 불교를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것이 목적이므로 둘의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스님이 되려면 불교를 믿어야 하지만, 불교학을 연구하는 경우엔 꼭 불교를 믿을 필요는 없다. 종교학과에 가기 위해 종교를 가질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
국내 불교학과 학생의 절대다수는 불교 신자이긴 하지만, 가끔 무종교인도 보인다. 이렇게 불교 신자의 비율이 높은 건 한국 정서상 불교가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고, 불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중시하는 서구에서는 가톨릭 신부가 불교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례까지 있다.
다만 학풍으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학교 분위기와 교수의 성향에 따라 불교학을 얼마나 학문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접근할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개신교의 신학과 학풍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