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 상록호텔 앞에는 커다란 수석 소망석(所望石)이 있다. 그 주위에는 십이지(十二支)의 12 띠의 동물의 모양이 조형물로 빙둘러 서 있는데 이는 사람을 12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누구나 자기 띠 앞의 석물 앞에서서 자기의 소망을 빌어 보라는 것이다.
이소망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총각이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은 식량을 구하러 강가에 나가 그물을 던졌더니 갑자기 회호리바람이 치며 물속에서 가득 물고기와 금은보화를 매단 커다란 바위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 많은 원님이 하인을 시켜서 소원을 빌게 하고, 올라오는 바위를 동아줄로 꽁꽁 묶어 통째로 가져 가려고 하인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바위는 사라지며 하인들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시는 바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괴로워 하던 총각은 "나 죽으면 그 바위처럼 세상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바위가 되리라."고 벼르며 살다가 죽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1988년 남한강에서 후세 사람들이 강물 속에서 큰 바위를 올리고 보니 3. 5m, 무게가 28톤이나 되는 구멍이 뻥 뚤린 묘하게 생긴 화강암 바위로 그 옛날 총각의 넋이 어린 없어졌던 바위였다. 이 바위 앞에서 빌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이 있다고 알려져서 이 바위를 소망석(所望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소원하나 빌어 보기로 하자.
소원석이여! ilman을 영웅 되게 도와 주서서.
홍길동 같은 서민의 영웅 되게 도와 주서서
그 길이
그렇게 되는 길이
롯도 복권 당첨 되는 길이외다.
수안보(水安堡) 어원
-수안보(水安保)라는 온천명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물안보', '물안비'라는 지명이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어져 왔다. 그것은 이곳에 보(洑)가 생기면서 보의 안쪽 '물탕(溫水)거리'라는 순수한 우리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洑)란 논에 물을 대려고 흘러 가는 물을 막아 두려고 쌓아 놓은 둑을 말한다.
-五州衍文長箋散稿(1934 헌종)
위 글을 보면 지금의 표기 '수안보(水安堡)'와 그 한자가 다르고, 그 설명 속에 '보' 자가 '保, 洑'로 또 달라서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필자 나름대로 수안보(水安堡)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밝혀 보기로 한다.
-이 고장을 수안보(水安堡)라 하기 이전에는 안부 또는 연풍이라 하였다.
안부(安富)는 이 고장 교통중심지였던 안부역에서, 연풍(延豊)은 옛날에는(지금은 수안보 면) 연풍현에 속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안보'라는 이색적인 명칭의 어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보(堡)'자가 왜 붙었는지가 궁금하다.
수안보(水安堡)에서 '보'는 '보루'의 준 말이다. 보루(堡壘)란 적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하여 돌이나 흙, 콘크리트 같은 것으로 만든 견고한 구축물을 말한다.
사전을 찾아 보니 '바깥 보루(-堡壘)'의 상대어로 '안보루(-堡壘)'란 말이 나온다. 이를 가지고 다음 이야기로 유추해 본다.
고종 31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당시 나라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청(靑) 나라에 원병을 청했더니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이 이를 트집잡아 조선에 파병해 와서 지금의 문경 하늘재인 계립령(525m)에 경비를 해준다는 명목으로 많은 일본군 헌병대를 주둔을 시켰다. '그 바깥보루'에 해당하는 죽령과 조령이 좌우로 있었으니 계립령은 '안보루'였다.
그 '안보루'의 준말인 '안보(-堡)'에 이 고장이 온천관광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수(水)' 자가 더해져서 수안보(水安堡)가 되었다고 유추해 본다. 일본 강점기 조선 지형도에 그 수안보 온천(水安堡溫泉)이란 이름의 표시가 그 근거다.
수안보에 대한 명쾌한 이야기가 없기에 내 나름대로 연구한 이야기이니 후학(後學)에 이를 기대하여 본다.
*. 수안보 온천의 개발
다음은 수안보 상록호텔 대중탕 가는 복도에서 본 옛 수안보 모습의 사진이다.
위 그림은 1927년의 수안보 옛모습이다. 거의가 초가집인데 좌측에 보이는 일식 건물이 이엽여관(二葉旅館)으로 당시 수안보 온천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일본인 사무소다. 그 뒤편에 대중탕은 안 보여 아래 그림으로 소개한다.
1916년 8월에 있던 이 대중탕은 당시에 유일한 수안보 온천으로서 현 수안보관광호텔 구관자리에 있었다.
위 건물은 그 전 1908년에 세웠던 초가식(草家式)을 개조한 것이다. 건설 당시에는 남과 여, 조선인, 일본인 넷으로나누어 운영하였다. 그후 욕탕 출입을 1, 2등으로 바뀌어 운영하였다.
지금은 입탕 요금을 7,000원 씩을 받고 있다.
위 그림은 1927년의 수안보의 모습이다.
1929년에 드디어 땅 속 124m 까지 파서 물을 끌어올리기에 이르렀다.
수안보 온천이 오늘날과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 무렵 노천식 온천(路天式溫泉)으로 1916년에 일본식의 근대 건물로 지은 것이다(위 그림 참조).
그후 일인에 의해서 온천수를 뽑아올리다가 우리의 힘으로 지하 약 250m에서 구멍을 뚫어 대량의 온천수를 얻기 시작하였다.
솟아나는 53℃의 물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중앙집중 공급방식이어서 이를 수안보의 숙박업소를 비롯하여 283개 소에 고루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다른 온천처럼 온천수를 따로 데우지 않아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수안보 온천은 어디서나 수질이 원탕과 구별없이 어느 곳이나 동일하다.
*. 수안보와 꿩요리
여행 가서는 잘 보고, 잘 자고, 잘 먹는 것이 제일이라는데 금번 수안보 여행에서는 그 소원을 모두 풀었다. 여행 가서는 찜질방이나 전전하던 내가 상록호텔에서 숙식(宿食)을 하고 그 유명한 수안보 온천에 몸을 담가 보았으니 이 밖에 더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
수안보 향토음식이라는 올갱이국에다가 꿩요리 그리고 황송하게도 김 이사장님이 특별히 마련한 월악산의 고본주(藁本酒)를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마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수안보 면 내 어디를 가도 식당 앞에는 커다란 장끼가 버티고 서 있다.
춘천의 닭갈비와 막국수 같이 '수안보에 와서는 꿩고기를 먹지 않고 수안보에 왔다 하지 말라.' 고 하여야 한다면 꿩과 수안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어디에도 그 관계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는 꿩요리를 대중화 시킨 개발의 역사만을 찾았을 뿐이다.
수안보 근처의 월악산 상원사(上元寺)가 '보은(報恩)의 꿩' 전설로 유명해 진 것을 보면 옛부터 이 고장에 특히 꿩이 많았던 모양이다.
-수안보 지역에 꿩요리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입니다. 그러다가 1994년 박명자 요리사가 꿩요리 비법을 체계화하여 꿩요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부터 본격적인 꿩 요리 전문접이 늘어나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