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진짜..차가 너무 밀리네.."
출근시간 이라 그런지 차가 너무 밀린다.
나경은 불안한지 핸들을 잡고 있는 손가락을 연신 움직거렸고 보영 역시 아랫입술을
계속해서 깨물고 있었다.
"아! 모자 챙겼어?"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영을 쳐다보는 나경.
보영은 대답대신 손에 들린 모자를 나경에게 보여주었다.
"챙겼구나..배고프지?"
도리도리.
"보영이..언니랑 말 안 할 테야..?"
"언니..엄마랑 아빠가 정말 도망 가 버린걸까? 나랑 오빠 놔두고..진짜..정말로
멀리 도망 가 버린거야..?"
보영의 다갈색 눈동자가 어른어른 눈물을 쏟아내려 하고 있었다.
곱게만 자라 뭐든 제 맘대로 하던 아이라 눈물이라고는 모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이제야 보영이 제 또래 아이 같기만 한 나경이었다.
"그런거 아닐꺼야..지금은 잠깐..다른 곳에 피해 계시는 걸 꺼야..
어머님이..이렇게 예쁜 보영이를 두고 어딜 가시겠어..
울지말고 어머님 돌아오실 때 까지 조금만 기다리자..응..?"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보영의 머리를 슥슥 만지면서
나경도 눈물을 꾹꾹 참아 내었다.
여전히 밖은 거북이 걸음으로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한시간이나 가까이
시간을 소비하고서 서울역 까지 도착 할 수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트렁크를 끌면서 공중전화 박스 근처를 두리번 거리는 보영.
"오..오빠!!"
그러다가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윤권을 발견하고
트렁크를 질질 끌면서 달려갔다.
"오빠 흐엉!!!"
"조..조용히 해!!"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품으로 냅다 뛰어 든 보영을 한 손으로 꼭 안아 주면서
주위의 시선을 염려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윤..권아.."
뜻밖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치켜 든 윤권.
가득 눈물을 머금 고 서 있는 나경이 보였다.
아..아..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얼마나 안아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마주하게 되다니..
윤권은 애써 태연 한 척 나경의 눈물을 못 본 척 하며 품에 안긴 보영을 밀어내고
나경의 손에서 트렁크를 뺏어 들었다.
"오랜만이다. 보영이 너 오빠 통장이랑 가지고 왔어? 빨리 꺼내봐."
"내가 챙겨서 왔어.. 여기.. 어디로 가려고 역으로 나오라고 했어.."
나경이 챙겨 온 통장과 카드, 그리고 도장을 윤권에게 내 밀면서 물었다.
하지만 윤권은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나경이 내민 통장들을 싹 뺏어 들면서
보영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쿨쩍 거리면서 윤권의 옷자락에 매달려 있는 보영.
"그만 울고 빨리 가자. 표 끊어 놨으니까."
"어디로 가는건데!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일단 차로 가자 윤권아!"
돌아서는 윤권의 옷 자락을 나경이 급하게 잡았다.
탁 -
나경의 손을 쳐 내는 윤권.
영문을 모르는 보영과 나경은 놀란 얼굴로 윤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후.. 한나경. 잘 들어라. 이 시간 이후로 나에대해 궁금해 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 진윤권을 니 머리에서 싹 지우라고. 너 머리 좋으니까 이쯤하면
알아 들었지? 잘 지내라."
"무..무슨 말이야.. 윤권아 잠깐만!! 지..지우라니.. 진윤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그래..오빠 무슨 말인데.. 나경이 언니가 오빠 볼려고 어렵게 한국 왔는데!"
잠자코 훌쩍거리기만 하던 보영도 윤권의 처사가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넌 빨리 화장실 들어가서 옷이나 편한걸로 갈아입고 와. 시간 없으니까."
정신이 없어서 옷도 못 갈아 입었다.
나시 원피스 차림에 흰 구두에 캐쥬얼 모자라.. 참 웃긴 행색을 해서 여기까지 왔구나..
보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윤권과 나경을 한번씩 쳐다보고서 트렁크를 끌고
화장실을 찾아 역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제 제대로 말 해봐.. 윤권아..방금 니가 한 말.. 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헤어지자는 얘기야."
단호한 윤권의 표정과 말투에 나경이 아연실색 하여 되 물었다.
"너..너..지금 뭐..뭐라.."
"지금 나를 똑바로 봐. 부모님 빚 가득 남겨놓고 도망가고 나한테 남은거라고는
부모 빚 그거 하나 밖에 없어. 이 꼴로 너랑 계속 만날 수 있을 것 같애?"
"우리 부모님이 도와주실 꺼야..그러니까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응?
돈이라면 나도 있으니까 나랑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응?"
나경이 윤권의 옷 자락을 잡고 결국 눈물을 토해낸다.
그 모습에 윤권은 가슴이 욱씬거려 미칠 것 같았지만 안간힘을 써 참았다.
"누가 도와주는데? 내가 군대 에서 나오면서 도진욱 그 자식 한테 제일 먼저 전화했다.
그랬더니 도진욱 그 개자식이 뭐라고 씨부렸는줄 알아?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란다..
하..자기랑 상관없는 일이래..귀찮게 하지말라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리더라..하..하..
아주 웃기지? 어? 씨발 십년우정 같은 좆 같은 거 개나 물어가라 그래!
너도 꼴 보기 싫으니까 꺼져버려! 다 똑같아! 평생 그렇게 돈만 쫓아가다 죽어버려라!"
폭포수 같이 쏟아내는 윤권의 말에 할 말은 잃은 나경이 뒤 돌아서서 멀어지는
윤권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 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제 까지만 해도 백년가약을 할 상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나 보고싶어 밤 잠을 설랬던 사람이었는데..어떻게..이렇게...
"윤권아!! 이러지말고 나랑 얘기를 좀 하자..응? 우리 그냥 그런 사이 아니잖아!
우리 사랑하는 사이잖아..너랑 나..한두달 사랑 한 것도 아니고 4년이야..4년이라구..
나..쭉 너만보면서 살았고 나 너만 사랑했어..다른 사람 생각 해 본 적도 없어..
내가 너 돈보고 사랑한거 아니잖아..그냥 진윤권 너..너 하나 보고 사랑한 거 잖아.
니가 빈털털이라도 상관없어.. 나는 니가 살인자라 해도 상관이 없단 말이야!! 윤권아!!"
나경이 운다.
곱게 드라이 한 갈색의 머리. 고급스러운 샤넬 선글라스를 앞머리와 함께 걷어올린,
그녀의 이마와 코 그리고 입술까지 떨어지는 선이 여느 연예인 못지 않게 아름답다.
하늘 거리는 하늘색 원피스와 하얀색의 반팔 볼레로는 가느다란 그녀의 몸을 더욱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얇은 발목에 걸린 발찌는 그녀의 하얀 발목을 더욱 만져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사람 이라는 분위기가 풍기는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따윈 아랑곳 않고 엉엉 울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 하고 매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윤권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만은 나경 역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계속하여
윤권의 이름만 부르며 그곳에서 울고만 있었다.
"멀리만 가지마..내가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그때 내가 다시 오빠 찾을 게...
오빠..멀리만 가지 말아줘..졸업하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오빠랑 나랑 보영이랑
같이 살자..아무도 없는 곳에서 같이..살자.."
오빠라고 칭하는것이 얼마만인가. 처음 부모님들의 손에 이끌려 만났을 때
그때를 제외하고 오빠라고 부르는게 아주 오랜만 인 것 같다.
지금 이것이 결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인연은 부모가 억지로 맻어준 인연이었지만 그 인연을 서로 등져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인연을 마주 보았고 오래도록 그 인연을 소중히 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아버지는 다른 상대를 골라 결혼을 하게 할 지도 모른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자..
그리고 졸업장을 따고 뭘 해서든 돈을 벌자..그런다음에..오빠를..보영이를..만나러..
만나러..돌아오자..
그러니까 윤권아..아니..윤권 오빠..
내가 찾을 수 없는 곳 까지 너무 멀리 가 버리지 마.
오빠 마음에서 나라는 사람 아주 비워내지 마..
"엄마얏!"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보영이 화장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윤권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못 볼 사람 봤어? 시끄러우니까 빨리 그 짐가방 들고 따라와."
어느세 모자를 뒤집어 쓴 윤권.
주위를 살피면서 연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입엔 담배 하나를 물고서.
"담배좀 그만 하라니까! 근데 나경언니는?"
"입 다물고 빨리와."
"아씨! 언니 어디 있냐고! 언니도 같이 가야지!"
"나경이가 어딜 같이가는데!"
윤권이 보영의 팔목을 잡고 끌었지만 보영은 버팅기면서
계속하여 나경을 찾고 있었다.
결국은 참다 못한 윤권이 버럭 소리를 질러 버리고, 보영은 그런 모습에
놀란 듯 큰 눈을 꿈벅거렸다.
"하..씨발..진짜. 자세한건 나중에 얘기 해 줄테니까 일단 가자."
윤권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순순히 윤권에게
팔목을 맞기고 트렁크를 질질 끌면서 걸어갔다.
부산행 ktx 게이트로 쑥 들어가는 윤권. 보영은 영문을 몰라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다. 빨리 올라가."
번호를 확인하며 들어가던 윤권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서서
보영을 먼저 밀어 넣었고 자신도 주위를 한번 살핀 뒤 기차위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 표에 적힌 번호를 찾아서 보영을 창가로 밀어넣은다음
커텐까지 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하아.."
그제서야 한숨을 푸욱 내 쉬는 윤권.
"고객님. 죄송하지만 기차 내에서는 금연입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윤권을 보고 승무원이 다가와 재떨이를 내민다.
윤권은 화낼 기력도 없는지 승무원의 얼굴도 보지 않고 담배를
재떨이에 툭 던져 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오빠..우리 부산 왜 가는거야? 나경이 언니는..?"
"나중에..나중에 얘기하자.."
그러더니 윤권은 모자의 캡을 쑥 내리고 팡짱을 끼더니
잠을 자는지 눈을 꼭 감고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그런 윤권의 모습을 울상을 하고 쳐다보다가 보영은 쳐진 커튼을 살짝
들어서 밖을 보았다. 기차가 출발 하려는지 덜덜 거리는 게 느껴졌다.
"커튼 쳐."
툭 -
윤권의 낮은 목소리에 보영은 한마디도 못 하고 커튼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륵 놓았다. 그리고 뭔가 생각 난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니 핸드폰 배터리 분리해서 내놔."
"왜!"
"빨리 내놔."
윤권이 기분이 정말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계속 참았지만
이것 까진 못 참겠다 싶었는지 보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 않고 여전히 눈을 감은 체로 보영에게 손을 내미는 윤권.
"싫어! 내 핸드폰이야! 왜 니 맘대로 하는데! 왜 부산을 가는지
나경이 언니는 왜 안 데리고 가는지 아무것도 말 안 해 주면서
내 핸드폰까지 뺏어 갈려고 그래! 싫어! 진욱이 오빠 한테도 연락 못..!!"
"닥쳐 좀!"
눈을 감고 있던 윤권이 별안간 눈을 번쩍 뜨더니
보영의 핸드폰을 뺏어 배터리를 분리하더니 자신의 트렁크를 열어
집어 던져 넣었다. 그런 윤권의 행동에 놀라 입만 벌리고 있는 보영.
"너..지금 나한테 뭐라 그랬어?"
"하..제발 부산 도착 할 때 까지 입 다물고 있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건데! 왜 나한테는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않하고 니 맘대로 하는건데!! 지금 어딜 가는지 왜 가는지 가면 어떻게
할껀지 말 해야 할 꺼 아냐! 기차 타면 말 해 준다며!"
"아 좀 닥ㅊ...!!!!!!"
"고객님..죄송합니다만 조용히 좀 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고객님들께
방해가 됩니다.."
윤권과 보영의 언성이 높아지자 윤권의 담배를 지적했던
승무원이 다시 웃으면서 둘 사이를 제지했다.
그제서야 윤권은 승무원을 올려다 보며 인상을 확 구겼다.
"에이 씨발!"
그러고서 윤권은 좀전 처럼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다.
승무원은 보영을 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돌아갔고
주위사람들의 시선에 민망해진 보영은 괜한 토트백만 만지작 거렸다.
창밖을 보지도 못하고 인상만 찌푸리고 앉아서 있기를 두시간 반.
부산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고 자는 줄 만 알았던 윤권이
벌떡 일어나 트렁크를 들고 일어섰다.
"빨리나와."
부산은 몇번 와 본적이 있지만 부산역은 처음인 보영.
그래서 그런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구경하기 바쁘다.
그런 보영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윤권은 다시 보영의 팔목을 부여잡고
질질 끌다싶이 해서 걸어갔다.
엔터존 PC방.
PC방 이라고 적혀있는 건물로 쑥 들어가는 윤권.
보영은 윤권을 놓칠새라 윤권의 뒤에 딱 붙어서 쫓아올라갔다.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는 PC방. 초등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곳 이었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아저씨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앉아."
"여긴 왜 왔어..?"
"검색 좀 할려고. 넌 거기서 할 거 있으면 해."
"응.."
무슨 검색이냐고 물어봤자 대답도 안 해 줄게 뻔 해서
보영은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을 열었다.
다음 홈페이지가 뜨고 주소창에 자신의 홈페이지 주소를 칠려고 하는데
뉴스 홈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이 보였다.
뜨끔하는 가슴으로 마우스를 사진에 가져다 대면서 혹시나 윤권이
보고있나 흘깃 윤권을 쳐다보았지만 윤권은 정말 검색을 하는지
자신한테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다행이네..'
보영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뉴스를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G.k 회장 진성원 45억원 횡령 후 해외로 도주.'
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기사를 읽어내려 가는 보영의 눈빛이 흔들리고
마우스를 잡고있는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기사는 대충 이러했다.
오는 새벽 G.K 회장 진성원이 아내 차영숙과 회사의 새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투자금과 회사의 주식을 팔아 45억원을 챙겨 해외로 도주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실이 아니다.. 이런 기사를 쓰는 기자는 그저 많이 읽혀지길 바래서
사실을 왜곡해서 기사화 한 것이다.. 절대 사실이 아니다..
엄마와 아빠는.. 절대..그럴 사람이 아니다.. 거짓말..이다..
"너 뭐하는..!! 이딴걸 왜 봐!!"
보영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느낀건지 모니터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윤권이 보영을 흘깃 보다가 보영이 보고 있는
기사를 발견하고는 컴퓨터 전원을 꺼 버렸다.
"아..씨발 진짜. 야. 이거 개구라야. 알지?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돈좀 벌겠다고 없는 말 다 같다 붙여서 써 놓은거라고!"
"알아! 그런 것 쯤 나도 안다고!! 나한테 소리지르지마!!"
"뭐야..거 좀 조용히 합시다!!"
"사랑싸움은 나가서 하쇼!!!"
결국 PC방 에서도 쫓겨나다 싶이 나왔다.
"따라와."
따라와 라는 한마디만 하고서 또 휘적휘적 걸어가는 윤권.
그런 윤권을 힘껏 노려보면서도 행여나 윤권을 놓칠세라
빠르게 윤권의 뒤를 쫓았다.
"아 좀 천천히 걸어! 운동화 아니라서 발 아파 죽겠단 말야!"
군대에서 축지법이라도 배워온건가.
걸음 무지 빠르다 씨이..
아침에 경황이 없어 아무 구두나 신고 나온게 하필이면
높이가 6cm나 되는 은색의 반짝거리는 힐 이었다.
윤권은 보영의 짜증에 궁시렁 거리더니 보영과 보조를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쥐콩만한게 힐 만 사댈 때 부터 알아봤다.
교복에 단화만 신고 다니면 되지 학생 주제에 왠 힐이야?
니가 대학생이야? 어?!"
"잔소리 좀 하지마! 나한테 잔소리 한다고 하지말고 너나 잔소리
하지 마시지! 그리고 여자는 힐을 신어야 다리 모양이 이뻐지는 거라고!
모델을 봐! 힐 신고 연습하지! 알지도 못하는게!"
열여덟 새파랗게 어린것이 군대까지 다녀온 우락부락(은 아니지만..)
스물셋 오빠에게 한말도 안 지고 너너 하면서 바락바락 대 든다.
하지만 이런 것 쯤 익숙하다는 듯 주먹으로 보영의 머리를 콩 쥐어박으면서
윤권이 입을 열었다.
"니가 모델이야? 어? 쥐콩만한게 자꾸 너너 해라!"
"왜 때려! 아프잖아!! 오빠 미워!! 이렇게 큰 쥐콩이 어딨는데!"
분홍빛 귀여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획 토라지는 보영.
이럴 때가 아니란 걸 알지만 윤권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가 다시 보영의 손목을 잡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철 타게? 어디 가는건데! 택시 타자! 나 지하철 싫단 말이야!"
"여기서 우리가 가려는 곳 까지는 택시비 많이나와. 우리 지금 택시 타고
다닐 만큼의 여유가 없다. 잔말 말고 따라 오기나 해."
"이씨! 그럼 내 짐이라도 좀 들어주던가! 무겁단 말야!"
"팔힘 좋잖아! 내 짐도 무거우니까 알아서 들고 와라~?"
그러고서는 다시 휘적휘적 표를 끊으러 가는 윤권.
혼자 걸어가는 윤권의 등에다 대고 세번째 손가락을 번쩍 치켜드는
착한 동생 보영. 지나가는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지나간다.
"아씨..."
휘적거리고 표 끊는 기계앞 까지 가서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윤권이 서 있자, 보영이 종종종 쫓아가서는 윤권옆에 섰다.
"왜? 뭐가 문제야?"
"동래 라는 곳 까지 가야 하는데 뭘 눌러야 되는거지?"
"동래? 그게 뭐야?"
"아오! 말을 말자 썅!"
"왜 욕을 하고 지랄이셈!!"
"뭐? 지랄? 너 죽을래!!!"
"저..기.."
시도때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너무나 다정한 사이임을
과시하는 윤권과 보영 남매.
서로 으르릉 거리고 있는데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휙 돌리는 사이좋은 남매.
그곳엔 천원짜리 한장을 꼭 쥐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가 있었다.
"뭐야!"
다정한 오라버니 윤권이 작은 체구의 여자를 째린다.
그 째림에 흠칫 하는 여자.
"아..아니..저도 표를 좀..뽑아야 해서..요.."
"그래서?"
"그러니까..다 뽑으셨으면..좀..비..비켜 달라구요.."
이젠 울먹거릴려고 한다.
"니 눈엔 내가 표를 다 뽑은 걸로 보이냐? 엉?!"
"아..아니요...죄송해요.."
눈물이 그렁그렁.
안되겠다 싶었는지 보영이 윤권을 획 밀치면서 여자에게 어색한
미소를 방긋방긋 날렸다.
"아하하..머..먼저 뽑으세요. 저희 오빠가 성격이 원래 좀 이상해요."
"고..고맙습니다."
"성격이 원래 이상해? 이게 죽을라고!!"
작은 체구의 여자는 덜덜덜 떨면서 2구간을 누른다음
1300원 이라는 숫자가 들어오자 돈을넣고 표가 나오자 잽싸게
표를 빼 내서 돌아섰다.
"야. 너."
"네..넷?!"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서는 여자를
낮은 목소리의 윤권이 잡았다.
그러자 여자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권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동그랗게 뜬 눈이 꼭 나경이를 닮았다.
아..제길..
"동래 갈려면 뭘 눌러야 되냐?"
in 서울 #
쾅쾅쾅!!! 쾅쾅쾅!!!
나경이 진욱의 방 문을 쉴세없이 두드렸다.
"아이고 나경이 아가씨..문 부셔져요..이러지 마세요.."
진욱의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나경을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진욱! 나와! 문 열란 말이야!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야?
니가 그러고도 보영이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어?! 어?! 문 열어!!"
진욱은 불꺼진 방에서 침대위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아주 시끄러운 락을 틀어놓고 벽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윤권이 오빠한테는 몰라도 보영이는..
보영이 한테는 이러면 안되는 거 잖아! 보영이는 너 믿고 있는데..
니가 이러면 보영이는.. 우리 보영이는...보영이..으흐흑...으으.."
주륵 -
꾹 깨문 아랫입술에서 비릿 한 피 맛이 돈다.
나경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 진욱의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진욱은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몇시간전. 보영의 부모님 소식을 듣고 당장에 달려나가려 했지만
진욱의 아버지가 들어와 못가게 제지했다.
"갈 필요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보영이와 너는 약혼자도 뭐도
아무것도 아니다. 나경이와 결혼 하게 될 테니 그렇게 알아라."
"뭐요? 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보영의 부모님 소식으로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
"오늘아침 나경이네 부모님과 얘기했다. 나경이 이번에 버클리로
못 돌아 가게 될 꺼다. 휴학하고 결혼식 올리고 그 다음에 너도
미국으로 가서 대학 졸업하고 돌아와라."
"하..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나경이는..나경이는 윤권이의.."
"어허! 상황파악이 그렇게 안 되느냐! G.K는 다른 회사로
넘어가게 되기로 주주총회에서도 그렇게 결정났다! 이제 G.K는 없으니
윤권이와 보영이도 없는거다. 니 인생에서 아무 필요도 없는 것들이니
생각하지 말거라."
"윤권이가 있습니다!! 윤권이는 G.K의 후계자 입니다!!!
후계자가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데 다른 회사로 넘어가다니요!!"
아버지 마음대로 보영이와 약혼을 시켰을 때 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대든적은 없었다. 당연히 그런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업간의 희생양이 되는건 이 세계에선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처음부터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반항도 하지 않았고 뜻 하지 않게 사랑스러운 보영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여기며 아버지에게 은근 감사해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때와 상황이 180도 다르다.
"윤권이가 G.K의 주식을 한줄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군대에서 갓 제대한 놈이 뭘 할 수가 있겠어! 실질적인 경영권이라곤
없는 놈이 뭘 할 줄 아느냔 말이다! 긴 말 필요없다! 결혼준비를 서둘러라!"
"아버지! 누가 뭐래도 G.K의 후계자는 진윤권 입니다!!
윤권이는 다시 G.K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윤권이 능력 아시잖아요!
그자식 머리 좋은거 알잖아요! 아버지가 도와주세요..그러면 윤권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난 경영인 이기 이전에 장사꾼이다. 장사꾼은 절대 이문이 남지 않는
일에 손을 대지 않지. 긴말 않는다."
소름돋을 정도로 차갑게 말 하고 돌아서는 아버지.
주먹을 쥔 진욱의 손에 핏줄이 선다.
"아버지가 하지 않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휙 -
진욱의 말에 돌아섰던 아버지가 다시 진욱을 돌아다 보았다.
"제가 윤권이를 돕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윤권이와
G.K 다시 세우겠습니다! 윤권이 부모님 일도 분명 모함입니다! 제가
다 밝히겠습니다!!"
"진 사장이 계획하던 프로젝트에 투자했던 사람중에 구룡파 보스
최형식도 있지. 꽤나 많은 돈을 투자했던 모양이야.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큰건 하나 없을 까 하고
이쪽판에 어슬렁 거리다가 진 사장 프로젝트에 가담했지.
하지만 결과는? 아주 처참해. 진 사장이 한국에 있다면 찾아내서 돈을 받아내는
것과 상관없이 죽였을 테지. 원래 그런 놈들 이니까. 하지만 지금 진 사장은
한국에 없어. 그렇다면 아들아. 최형식이 지금 눈에 불을켜고 찾는건 누구겠느냐."
좀전과는 다른 톤으로 한글자 한글자 나즈막하게
하지만 힘 주어 말하는 아버지.
진욱은 주먹이 하얗게 될 정도로 쥐고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저 깊은 곳에서 치 밀어오르는 분노와 욕짓끼와 두려움.
아버지 라는 사람의 더러운 행동에 대한 분노와 욕짓끼와 구룡파 보스
최형식에 대한 두려움. 국내에서 악질중의 악질이라 검사쪽에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 한다는 최형식. 그런 놈이 윤권과 보영을 찾고 있다.
그들은 사람 하나 찾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지. 금방 찾아낸다.
찾아내면..찾아내면..윤권과 보영이는..보영이는...
보영의 새침하고도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퍼뜩 생각나
진욱은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들아. 아버지는 내 아들이 잘 됐으면 하는 그 바램밖에 없다.
내 말을 듣거라. 그렇다면 그 아이들을 최형식 에게서 부터 지켜주지."
쾅 - !!!
"씨바아알!!!!!!!!!!!!!!!!!"
침대위에 있는 알람시계를 벽으로 집어 던지면서 소리를 지르는 진욱.
힘이없어서..사랑한다는 여자 제 손으로 지켜 주지 못 하는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십년이 넘도록 친 형제 보다 더 한 우정을 나누던 윤권에게도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했다.
"끄으..윽..보영아...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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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연애
(자작)
[ 달동네에는 공주님이 산다 ] 두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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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재밌어요 ^ ^ !
진짜로 재밌어요^^ 완전이요 ㅠ0ㅠ
ㅠ_ㅠ 감사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