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벗어나 피난 섬을 찾아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상법현이라는 승려입니다.
무상은 법호이고 법현은 법명입니다.
법현은 법 곧 진리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출가하여 계를 받으면서 이름도 함께 받습니다. 계명이라고 해야 하는데 한국불교계에서 법명이라는 이름이 익숙합니다.
무상은 상(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상은 한국불교에서는
금강경에 나오는 사상 곧 네 가지 존재의식인 아상,인상,
중생상,수자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ㅇㅇ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그 의식 지닌 존재밖에는 발전의 가능성이 없으니 그런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입니다.
합쳐서 부른다면 고정관념이 없으면 진리가 드러난다고
할까요?
그리고 중국의 고승 가운데 인도에 육로로 갔다가 해로 곧 해상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돌아와 열반경 등 경전을 번역하고 순례기 곧 불국기를 쓴 최초의 큰스님 이름이 법현입니다.
또 당나라의 참선하는 대선사이시고 깨달음을 얻어 정중종이라는 선종파를 개창하셨고 마조도일선사의 실제 스승이시고 티베트에 참선하는 법을 지도하였으며 중국불교에서 500나한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되었던 신라 왕자출신의 큰스님 이름이 무상스님입니다.
그런 훌륭한 분을 본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제 이름을 스스로 이렇게 해석하니 쑥스럽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가까이 해보고자 소개드렸습니다.
경전 말씀을 조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합장하고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Sabbe saṇkhārā anicca=諸行無常 띠 야다 빤야 빳사띠
아타 닙빈다띠 두케 에사 막꼬 위숫디야
Sabbe saṇkārā dukkhā=諸行皆苦 띠 야다 빤야 빳사띠
아타 닙빈다띠 두케 에사 막꼬 위숫디야
Sabbe dhammā anattā=諸法無我) 띠 야다 빤야 빳사띠
아타 닙빈다띠 두케 에사 막꼬 위숫디야 사두사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이웃종교의 성전인
바이블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아서 그렇지요. 동양의 고전 소설인 삼국지도 읽는 이들이 아주 많지요. 다양한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삼국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흔히 착한 촉나라의 유비(劉備·161∼223)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공동 주인공인 오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함께 세 축을 이루고 있으며 나중에 삼국을 통일한 위나라의 조조(曹操·155∼220)야말로 삼국지의 주인공이라 할 것입니다.
조조가 직접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아들인 조 비를 시켜서 사마의중달의 모사를 힘입어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지요. 조조는 참으로 쉽게 여기지 못할 위인입니다.
그런데 삼국지를 읽으면 조조가 세 번 웃다가 패한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적벽대전은 조조가 양쯔강(揚子江) 남쪽의 적벽(赤壁)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를 가리킵니다. 적벽은 기암절벽이 즐비하고 경치 또한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험준하여 무너뜨리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가 그곳과 닮았다 해서 전라남도 화순의 대동적벽과 물염적벽을 사람들이 아낍니다. 이제는 댐 건설로 물에 잠겼지만 예술과 경치를 사랑하는 이들이 아껴서 지방자치체제에서 적벽축제라는 이름으로 특별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제 고향이 화순이어서 적벽이라는 곳을 어슴프레하게 기억합니다. 절벽과 건너편 모래사장 그 너머의 논으로 가로지르는 밧줄로 얼기설기 엮은 구름다리가 떠오릅니다. 매우 아름다운 추억이지요.
중원을 통일할 야심을 품은 조조는 손권의 오(吳)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였으나, 적벽에서 주유와 제갈량의 화공(火攻) 계책에 당하여 크게 졌습니다.
얼마 남지 않는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던 조조는 새벽녘에 나무가 빽빽하고 땅의 모양이 험준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조조는 자신이라면 그와 같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군사를 매복시켜 적을 섬멸하였을 텐데 주유와 제갈량의 지략도 별것 아니라고 비웃었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자룡(趙子龍)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공격하였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바삐 달아나던 조조는 호로구(葫蘆口)에 이르러 지친 몸을 쉬었습니다. 이때 또 그 곳에 군사를 매복시키지 않았다며 주유와 제갈량을 비웃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번에는 장비(張飛)가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나타나 공격하였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조조는 화용도(華容道)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조는 또 다시 그처럼 험준한 길에는 몇 백 명의 군사만 매복시키더라도 적을 사로잡을 수 있겠노라며 주유와 제갈량을 무능하다고 비웃었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우(關羽)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조조는 관우의 의리에 호소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쳤습니다.
공연히 아는 척을 많이 하거나, 잘못 골랐다 할지라도 바로 벗어나면 더 많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되고 결국 바라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쉼 없이 불타고 있는데..”라고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일깨우십니다. 현재 우리는 스스로가 처한 죽을 위험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웃어 제쳤던 조조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요?
불타는 집이야기는 대승의 <법화경(나무 삿다르마 푼다리카수트라)>에도 나온답니다.
또 키에르케고르라는 서양 철학자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도 실감나게 나옵니다.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던 삐에로의 눈에 객석 뒤쪽에서 불이 난 것이 보였습니다. 삐에로는 다급하게 불이야~~~를 외치지만 관객들은 연기인 줄 알고 더 흥분하며 몰입합니다. 그럴수록 삐에로는 당황해서 불이야를 외치고....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어려움이라 인식하고 그것을 벗어나고 극복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나의 견해가 바르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바른 정진을 하지 못하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불살라지는 것조차도 모르고 되풀이되는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잘 벗어나는 것이 온전한 행복과 평화를 이루는 시작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를 벗어나 열반을 얻기를 바라는 우리들이 벗어나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느 것이나 처음처럼 그대로 있을 것(常)이라는 착각과 조금 익숙하면 편하게 느끼는 적응력(樂), 그리고 어느 것도 마음대로 안 되면서도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세상 그 어느 것이 처음처럼 그대로 있던가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쇠도 녹이 슬고, 사철 푸른 것 같은
소나무나 사철나무도 누른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가요?
사람의 마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권세도 십년 가기 힘들고 꽃도 열흘이나 붉게 빛나기 어렵다는 말은 이제 너무나 귀에 닳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은 그렇다고 해도 나와
우리 것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착각하거나 “그러지 않았으면...”하고 되지 않을 희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변하는 사물과 마음에 적응하지 못하면 부딪히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고 좋은 것과 떨어지고 나쁜 것과 부딪치고 바라는 것 얻지 못하고...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말한다면 ‘내(五陰=정신,육체)가 왕성(盛)한 때문에 괴롭다. 더 쉽게 말하자면 뭉쳐서 괴롭다(五聚蘊)’는 것입니다. ‘무자식 상팔자’처럼 혼자 있으면 괴로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 세상 존재들이 느끼는 아기자기한 즐거움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참 즐거움, 행복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슬퍼하지 마. 괴로워 하지마.‘ 하고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려 보십시오. 내 마음인줄 알았는데 내 마음이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어찌 내 마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슬퍼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 말라고 하면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되는가요? 그렇다면 내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 뿐 아니라 내 몸의 구석구석도, 내 것이라고 생각해
붙인 나의 이름도..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말하자면
내가 아닙니다(非我). 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내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속아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아 날뛰고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설명을 부처님의 경전으로 살펴보면 존재의 세 가지 특징적인 모습(三特相)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모은 말씀’이라는 뜻의 『법구경』에서 하신 가르침입니다. 인도 고어인 빠알리어로 담마빠다dhammapada라고 합니다.
담마는 가르침 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담마는 현상이나,사물이라는 뜻이며 그것을 마음으로 인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지각 기능 가운데 여섯 번째인 마음(意,mano)의 지각대상이 담마입니다.
마노로 담마를 보았을 때 법칙이나 진실을 알게 되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저 사물이요,현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겨울에 피는 꽃은 철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갖춰지면 꽃이 핍니다. 그것이 법칙이지요.
물론, 다른 경전에서도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지어진 모든 것은 변하고(無常),
지어진 모든 것은 괴롭고(苦),지각대상은 모두 자아가 없다(無我)는 가르침입니다.
경전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변한다(Sabbe saṇkhārā anicca=諸行無常)고 슬기롭게 보면 괴로움(苦)을 싫어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277)
지어진 모든 것은 괴롭다(Sabbe saṇkārā dukkhā=諸行皆苦) 고 슬기롭게 보면 괴로움(苦)을 싫어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 278)
모든 지각대상에는 자아가 없다(Sabbe dhammā anattā=諸法無我)고 슬기롭게 보면 괴로움(苦)을 싫어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 279)
어찌 보면 어려운 가르침 같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참 쉬운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변하고(無常),지어진 모든 것은 괴롭고(苦),지각대상은 모두 자아가 없다(無我)는 가르침을 익혀서 제대로 알면 청정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청정은 바르게 앎(正知)에 의해 생기는 고요함 즉 열반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은 인도 고어 가운데 문자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의 한자어 발음이고, 실제언어(口語)인 빠알리어는 닙빠나(nibbana)입니다.
진정으로 행복을 바란다면 벗어나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착각과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미련,
그리고 괴롭지 않다는 어리석음과 괴롭지 않았으면 하는 과대망상, 나일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과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뒤집으면 반대로 작용하는 것 또한 착각이며 고집이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경전을 읽고 법문을 듣고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12월이 지나고 201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작년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 살펴보고 보낼 것은 보내고 맞을 것은 맞을 일입니다. 그래서 하지 못한 것을 붙들고 끙끙거리기보다 그 어려운 곳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법문 주제를 “빨리 벗어나 피난섬을 찾자”로 하였습니다.
밤하늘에 별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할 일도 그만큼 많습니다. 시골에는 별이 쏟아지듯 많은데 서울은 별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수행도량 열린선원이 있는 역촌중앙시장 옥상에 밤에 올라보십시오.
봄, 여름에도 많지만 가을, 겨울에는 어찌 그린 시린 별빛이 영롱한지...가끔은 서울 하늘에서도 실망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살피면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별똥별이 떨어졌다고 슬퍼하지 말고 고를 때 신중히 해야 하지만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때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로 벗어나야 할까요?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나 배에서 떨어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어딜까요? 섬입니다. 그 섬을 찾아야 합니다.
함께 경전을 읽으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합장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그 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아라한[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
사람을 잘 길들이는 가장 높은 분[無上士調御丈夫]
신(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깨달으신 분[佛]
세상에서 존귀하신 분[世尊] 이십니다.
부처님의 담마(dhamma,法)는
잘 설해진 것이고,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는 것이며,
(열반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체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승가(sangha)는
진지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sangha)
정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sangha)
올바르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sangha)
여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sangha)
이분들 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
이분들이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sangha)이니,
공양 올릴 가치 있는 분들,
환영할 가치 있는 분들,
시주 올릴 가치 있는 분들,
합장 공경할 가치 있는 분들이며,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심는 대상입니다.
《다작가숫따=깃발경》
불교의 세 가지 보배는 부처님,가르침,스님입니다.
그 세 보배 즉 삼보를 피난하는 섬으로 삼아야 합니다.
윤회의 괴로운 삶의 바다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삶이
보장되는 섬 그것은 삼보입니다. 삼보에 의지해서
스님들처럼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실천하면 부처님처럼 됩니다. 빨리 벗어나서 피난섬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