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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왕후 황제 왕 차이 6P
皇后 王后 皇帝 王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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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천 ; 하늘 천
皇 황 ; 임금 황, 갈 황
王 왕 ; 임금 왕, 갈왕
帝 제 ; 임금 제, 하나님 제
后 후 ; ① 임금 ② 황후 ③ 토지의 신
陛 폐 ; 대궐 섬돌 폐
上 상 ; 위 상
下 하 ; 아래 하
殿 전 ; 1. 전각殿閣 궁궐宮闕 2. 큰 집 3. 절
低 저 ; 낮을 저
太 태 ; 클 태
국어사전 뜻
- 천왕 天王 처놩 ;
1.<불교> 욕계나 색계 따위의 온갖 하늘의 임금.
2.<역사> 상고(上古) 시대에, 수호신을 이르던 말.
3.<역사> ‘환웅(단군에 나오는 인물)’을 높여 이르던 말.
4.<역사> ‘해모수(북부여의 시조始祖 ?~?)’를 높여 이르던 말.
5.<역사> 중국에서, 천자(天子)를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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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皇帝 ;
1. 왕이나 제후를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을 왕이나 제후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
2. ‘임금’을 이르는 말.
- 폐하 陛下 ; 황제나 황후에 대한 경칭.
- 전하 殿下 ; 조선 시대에, 왕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
- 저하 邸下 ; 조선 시대에, 왕세자를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
- 태황 太皇 [같은 말] 태상황 ; 상황上皇을 높여 이르는 말
- 상황 上皇 ; 자리를 물려주고 들어 앉은 황제를 이르던 말.
- 왕후 王后 ; 임금의 아내
- 황후 皇后 ; 황제의 정실(正室) 아내
- 태후 太后 = (같은 말) 황태후 皇太后
1. 황제의 살아 있는 어머니
2. 앞선 황제의 살아 있는 아내
- 황태후 皇太后 => 태후 太后
- 태상황 => 태황 太皇
- 태황후 太皇后 ; 없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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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후와 왕후
1) 황후 왕후 누가 더 높나요?
조선 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禮)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부인 '황후'가 왕의 부인 '왕비(같은 말: 왕후)'보다 더 높습니다.
2) '황제'와 '왕' 차이?
황제는 '왕'이나 '제후'를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왕이나 제후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 입니다.
따라서 황제가 왕보다 더 높습니다.
전하(殿下)는 제후국(諸侯國)의 왕이나 황태자, 왕태자 또는 독립적 영지를 가진 영주나 추기경을 부를 때 쓰는 2인칭 칭호입니다.
여기에서 '전하'할 때 전(殿)은 '전각 전' 자로 전각(궁궐)을 뜻하며
하(下)자는 '아래 하'자로, 전각 아래(下: 아래 하)에서 뵈어야 하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제후국(諸侯國) 왕이 자칭을 할 때는 '고', '과인' 입니다.
자주국 왕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짐' 이라고 자칭합니다.
'주상 전하'라는 호칭은 고려 제24대 왕(재위기간 1259년-1274년) 원종(1219년 출생-1274년 사망)때 이후 부터 몽골(원나라)이 고려왕에게 부마관계이니 '황제'또는 '폐하'라는 칭호는 너무 쓰기에 부적절하다 하여
고려의 왕을 '주상 전하'라고 낮추어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상 전하'라는 칭호는 고려 제 25대 충렬왕(忠烈王)부터 '주상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은 고려 제24대 왕 '원종'이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조나 종이 아닌 '왕'자를 붙여야 하였고, 앞에 글자는 원나라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忠)'자를 넣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짐'은 '고'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 용어들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조선에서는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고 '주상 전하'라는 칭호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짐은 '과인'으로,
페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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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
-# 황후 ; 위키
황후(皇后)는 황제의 정실 부인으로, 궁정에서 태상황태후와 태황태후와 황태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황후를 정궁(正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대 중국에서는 수많은 황후들이 있었고, 일본도 자신들의 군주를 천황으로 높여부르는 터라, 현재까지 그 비를 황후라 하며 높여부르고 있다. 한국도 대한제국 당시 3명의 황후가 존재하였다.
유명한 황후들, 위키
중국
* 효흠현황후 엽혁나랍씨 - 청 함풍제의 황비. 생전에 황후는 아니었고, 죽은 뒤 추증되었다.
한국
* 명성황후 민씨 - 고종의 정실. 생전에는 왕후였고, 죽은 뒤 추증되었다.
* 순명효황후 민씨 - 순종의 정실. 생전에는 황태자비였고, 죽은 뒤 추증되었다.
* 순정효황후 윤씨 - 순종의 계실. 생전에 황후였던 유일한 인물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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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 ; 위키
왕후(王后, Queen consort)는 한자 문화권 국가의 제왕(帝王)의 적배(嫡配)의 작위 중 하나이다. 한나라 때 황제의 적배를 황후로 개칭한 것을 계기로, 이후 제국의 국모(國母)는 황후(皇后), 왕국의 국모는 왕후(王后), 번국(藩國: 제후국)의 국모와 특정 남성 황족의 배필은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재, 한자 문화권 국가에선 서양의 제국(imperium) 단위의 국가의 국모를 황후로, 왕국 단위의 국가의 국모를 왕후[註 1] 혹은 왕비[註 2]로 번역하고 있다.
* 왕후 개요
1. 왕후(王后)가 최초로 쓰인 국가는 중국의 고대 국가인 주나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로, 기원은 《주례(周禮)》에서 "천자(天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女官)를 둘 수 있다."한 것에서 비롯된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제왕의 배필은 왕비(王妃)이다.
2. 작위로써의 황제가 등장한 것은 진나라(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06년)의 왕이었던 영정이 전국시대인 중국을 통일해 진 제국을 건설하고 시황제에 오르면서부터다. 그러나 시황제가 후(后: 적배)를 봉작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아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사 상 공식적인 최초의 황후는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의 고황후(高皇后) 여치이다.
3. 전한(前漢)에선 황제의 적배 혹은 황제의 생모로서 사후 추존된 후궁을 황후로 규정하고, 전한에 속한 번국(藩國: 제후국) 혹은 외국(外國·蕃國: 오랑캐국)의 왕의 적배를 왕후라 규정하였다. 후한(後漢·東漢: 23년~220년) 때 이르러 번국(藩國: 제후국) 왕의 적배를 왕비로 개칭했다. 이후로 중국 황실에선 봉왕(封王) 된 황족 남성 및 제후의 적배를 왕비로 규정한다.
4. 한국 삼국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668년)[1], 통일신라시대(668년~698년)[2], 남북국시대(698년~926년)[3]에는 제왕(帝王)의 적배를 비(妃)라 하거나 후(后)라 하거나 부인(夫人)이라 하였는데 정확한 기준이 알려지지 않으며 적첩(嫡妾)의 구분도 애매하다.
5. 중국 위 명제(205년~239년) 때에 이르러 비(妃)가 황제의 후궁의 작위로도 쓰여지게 되었으며 진 무제(236년 ~ 290년) 역시 9빈(1후 3부인 아래)의 으뜸에 숙비(淑妃)를 추가하고, 남북조(420~589)에서 이를 계승·답습함으로써 이후 비(妃)를 황제의 후궁의 작위로 겸용하는 것이 정착됐다. 수 양제(569년~618년) 때 이후로 비(妃)가 황후 아래의 1등 후궁으로 정착돼, 비(妃)가 후궁의 통칭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참고: 후궁 (중국)】
6. 고려시대에는 제왕의 적배를 왕후(王后)로 삼고 후궁을 부인(夫人)으로 삼다가 8대 임금인 현종 때부터 비(妃)를 제왕의 측실의 작위로 썼다.[4][5] 고려의 왕후(王后)와 왕태후(王太后)는 중국 황실이나 조선과는 정의와 개념이 다른 독특한 것으로, 선왕의 왕후가 모두 왕태후로 봉숭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왕의 생모 혹은 국공을 세운 왕후를 왕태후로 봉증(封贈)[註 3]하여 다른 왕후들보다 한 단계 격을 높인 개별적 작위로 썼다.[6][7][8][9][10] 역대 고려 왕후의 최종 시호 및 묘비명이 청나라[註 4]나 조선처럼 황후나 왕후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왕태후와 왕후가 섞여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11] 원 간섭기에 이르러 고려의 임금들이 원의 부마가 됨에 고려의 임금으로서의 입장과 원의 부마(王)[註 5][12][13]로서의 입장이 충돌하게 된다[註 6]. 이에 고려 임금 중 처음으로 원의 공주를 적배로 맞이한 충렬왕은 처음엔 안평공주(세조 쿠빌라이의 딸)를 고려의 후(后)가 아닌 본래의 작위를 쓰게 하다가 그녀의 사후에 인명왕후로 추시했으며[14] 그들의 아들 충선왕은 즉위 후 다시 모친을 인명태후로 추존했다.[15] 그러나 원에서 그녀를 다시 추봉해 황고 제국대장공주의 시호를 내림에 고려에서 추시한 시호를 모두 고쳐야 했고, 이후부터 고려에선 후(后)를 쓰는 것을 포기하고 원의 공주로서 고려의 국모가 된 여인은 원의 작위인 공주를 쓰게 된다. 이는 단지 종전의 후비 제도에서 후(后: 왕후·왕태후)가 공주로 교체되고 왕후의 제한이 없던 정원수가 한 명으로 수정된 것으로, 후궁은 본래의 제도대로 비(妃)[16][17][18] 등을 썼으며, 후궁 출신 임금의 생모는 태후로 올리지 않고 '아들의 지위로 어미를 높일 때 작위에 태(太)를 더한다.'는 명부(命婦)의 법칙을 적용해 태비(太妃·大妃)로 삼았다. 원 간섭기가 마친 후인 공민왕 14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사망하자 대신들이 지어 올린 시호는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로[10], 우왕 즉위 후에는 인덕태후라 불렸다.[19] 공민왕 21년에는 충숙왕의 후궁이자 충혜왕과 공민왕의 생모인 왕대비 홍씨가 왕태후(太后) 격존됐고[20], 우왕 즉위년에는 공민왕 때 우왕의 생모로 선포된 궁인 한씨가 순정왕후로 추존됐다.[21] 우왕은 적후를 세우지 않았으며, 숭명정책을 내세웠던 이성계의 섭정 시대인 창왕과 공양왕 땐 비(妃: 王妃·王太妃[註 7]·國太妃[註 8])를 썼다.
* 왕후 (조선)
조선시대에는 개국과 함께 명나라의 제후 입장을 취함으로써 국모의 존위를 비(妃)로 규정했다.
그러나 태조 5년에 태조의 정비(正妃)인 현비(顯妃) 강씨가 서거함에 개국 공신이자 국가 경영에 동참한 국공을 높이 기려 존호를 추상해야 한다는 공신들의 건의 아래[22]
왕후(王后) 직이 부활하여
강씨가 신덕왕후로 추존되고 후(后)의 예우로 상장례가 치뤄졌다.[23]
3년 후인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태조의 원배(元配)로서 추존 비(妃)가 됐던 절비(節妃) 한씨의 아들인 정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여[24] 다음 달 임금의 생모 자격으로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해 신덕왕후와 동급에 올리고[25] 처 김씨를 왕후가 아닌 비(妃, 덕비 德妃)에 올린다. 이로 3년 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의 동복 아우인 태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여 아내 민씨를 비(妃, 정비 靜妃)에 올리고 정종의 비 김씨를 왕대비로 삼는다.[26]
신의왕후를 신의왕태후로 다시 격상[27]하여 신덕왕후의 윗전에 놓고 태조의 3년상을 마친 뒤 태조와 신의왕태후의 신주 만을 태묘(太廟: 종묘)에 부묘했다. 이어서 처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처를 맞이하는 중혼을 금지하고 이미 중혼을 한 자의 경우엔 혼인 순서로써 처첩을 구분토록 하는 제도를 세우니[28][29] 이는 신덕왕후를 첩으로 낮춤으로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태종 18년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며 태종의 비인 민씨는 정종 비와 마찬가지로 왕대비로 봉숭된다. 세종 2년에 왕대비 민씨가 서거하자 왕태후로 추존한다.[30] 이에 태조가 신덕왕후를 위해 부활한 왕후(王后) 직은 일시적이나 사실상 무실화된다.
세종 12년에 제후국에서 태후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으로 이후부턴 왕비가 서거하면 태(太)를 뺀 왕후로 추존토록 결정[31]하였는데 이땐 이미 신덕왕후의 왕후직과 권리가 모두 철폐된 상황이었다.
세종 12년 음력 4월 6일을 시점(始點)으로 조선의 국모는 왕비에 봉작되었다가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고종 31년까지 지속된다.
이후 고종 31년에 왕실의 존칭이 개칭하면서 왕의 적배를 왕비로 삼았다가 왕비가 사망한 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옛 규례를 폐지하고 왕의 적배를 왕후로 삼도록 제도가 개정되었고 경칭 역시 전하에서 폐하로 바뀐다.[32][註 9] 조선 역사상 살아생전 왕후에 봉작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이 바로 훗날 대한제국의 수립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는 민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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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
# 황후 왕후 황제와 왕 차이
개념적으로 다른 의미 입니다.
황제-왕-후 는 수평적인 개념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있어서
어느 나라도 황제라는 칭호를 쓸 수 없었습니다
황제를 처음으로 칭한 왕은 진나라의 시황제 영정입니다.
이른바 진시황인데요.
그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황제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또한 무슨 말인가 하면,
진시황이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를만큼 강력하고 거대한 왕권중심의 국가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강력한 자주국가였던 우리 선조들 역시 스스로를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광개토대왕도 이중 하나이며, 고려의 광종도 이들중 하나입니다
황제를 부르는 호칭도 왕과는 다른데
기본 적으로 '폐하' 라는 호칭이죠.
그 다음으로는 사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하'라는 호칭이며
그 아래는 '저하'-'합하' 등으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적인 세계관하에서.
왕이라는 것은, 중국 황제의 신하를 스스로 칭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의 군국제나 봉건제 속에는 무수한 왕들이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주나라(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를 그대로 둔채,
황제가 있고, 그 아래 무수한 제후국(신하의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연, 조, 제, 위, .. 이 같은 나라들 처럼.
스스로 왕을 칭한 다는 것은 스스로 중국 황제의 신하임을 자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반도에서 역사상 가장 강한 왕조였던 고구려와 고려는
황제를 칭했습니다.
여기에 또하나 더해질 만한 것이 연호 인데
이 연호라는 것은 그 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영락 15년. 건안 8년과 같이요.
그래서 스스로 왕국을 자임하는 나라 들은 제국인 중국의 연호를 빌려서 써왔으며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스스로 제국을 칭한 국가들은 연호 또한 중국의 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주변에 위협세력이 많은 조선이었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세워진 국가였기때문에
함부로 고개를 쳐 들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의 일종의 비애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설명된 왕의 부인은 왕후,
황제의 부인은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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