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환(哀歡)은 슬픔과 기쁨이요 애환(哀患)은 슬픔과 근심이다. 애환을 함께 한다는 말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즉 근심은 서로 위로하고 기쁨은 서로 나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哀歡이라는 말보다는 哀患이라는 말이 먼저 마음에 와닿는다. 슬픔과 근심을 서로 나눈다는 의미이리라. 이말은 사실 내가 만들어 낸 말이요 哀患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비록 오래 산건 아니지만) 기쁨을 나누기 보다는 슬픔을 나누는 쪽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슬픔을 나누고 서로 토닥이는게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다는 얘기다.
우리가 춤을 추는 이유가 뭔가. 한편으로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지만 뒤집어보면 마음을 위로받고자 함이다. 사람이 기쁨에 취하면 그 보다 더한 기쁨을 또 찾게 되지만 슬픔을 나누면 그 자체로도 행복함을 느낀다. 이와같이 보면 기쁨이라는 건 불행의 반댓말이지 사실 기쁨이 기쁨자체로 존재하는 건 아닌 듯도 하다.
어려움을 나눠야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도 생긴다. 이리보면 우리가 꼭 즐겁고 기쁘고 좋은 일만 찾으러 쫒아다닐 일은 아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는 못할지라도 그 처지를 이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춤을 춘다해서 너는 문제가 많다고 할 일이 아니고 문제가 많기에 춤을 춘다고 이해하면 안되겠는가. 또 문제야 춤추는 사람에게만 있는가.
상대방의 哀患을 이해하게 되면 세상에 다툼도 줄어든다. 예수님이나 석가님은 이러한 인간의 哀患을 직시하신 분이다. 哀患을 어루만지려 한 분이지 인간에게 기쁨을 주려 고행하신 분들이 아니다. 풍요로운 추석을 보내면서 이리 哀患 얘기를 하는게 뭔가 맞지 않아보이지만 哀患을 얘기할 수록 마음은 편해진다. 그건 아직 哀患을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에 겨워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어려움은 닥칠 것이고 또 세상마저 등지고 떠날 날이 앞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기쁨 행복이라는 단어에 매달리기 보다는 오히려 슬픔이나 어려움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려야 할 듯싶다. 세상엔 어려움도 수없이 깔려있다는 걸 알아야 마음의 준비라도 하지 않겠는가.
때리는 놈보다는 맞는 놈이 뱃장이 편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좋은 것만 찾기 위해서 또는 이기기 위해서 매달리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움을 직시하고 인정하는게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거다.
하여간 춤이란 꼭 즐거움을 쫒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어찌보면 저 깊은 곳의 哀患을 치유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좌우간 哀患에 익숙해지자. 哀患은 항상 우리 곁에 함께 한다는 걸 생각하자. 그런 어려움을 딛고 서로 이해하며 감싸주는 삶도 의미있지 아니한가. 이리보면 부정적 의미를 가진 단어라해서 꼭 기피할 일만은 아니요 좋은 단어라해서 그 것만 보고 쫒아갈 일도 아니다.
이리 쓰고나니 웃음이 나온다. 이건 불행이 닥칠 때를 대비하여 미리 보험을 들어 놓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애시당초 哀患을 피할 재주는 없고 그저 받아들이며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바람 앞의 갈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걸 또 한번 느끼게 된다. 하여간 어찌 살던 이리저리 자기 생각대로 살수 밖에 없는게 인생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