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생각하는 대학서열은? : 부산대
우리가 공무원시험을 보거나 고시를 보거나 입사시험을 볼때 자신의 점수를 미리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시험은 지원을 먼저 하고 나중에 시험을 보는 선응시 후시험인데..
대학입시는 선시험 후지원(응시)이지요..
먼저 시험을 본후에 그 점수를 가지고 학교를 지원하기 때문에..
학교가 이른바 "점수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라는 말이 생겨난것이지요..
이 선시험 후지원제도는 1981년에 나타납니다..
그전에는 선지원 후시험이었습니다..
지금 입사시험을 보는데..
현대가 어 어렵겠습니까? 삼성이 더 어렵습니까?
바로 70년대는 이와 같은거였습니다..
도무지 어떤 학교가 더 공부잘하는 학생이 가는 학교인가?
대충 어떤 학교가 어떤 학교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많이 간다.. 이정도 였지.
어는 학교는 커트라인 301.32 어떤 학교 어떤과는 300.14..
이렇게 소수점까지 나누어 지는 지금과는 판이 하게 달랐었지요..
그때는 본고사 시절입니다..
본고사는 각학교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내서 자체적으로 체점하는 방식입니다..
서울대 합격점수(커트라인)가 45점이고 지방의 3류대의 합격점수가 90점이라고 해서 지방의 모대학에 더 점수가 높다고 할수 없겠지요?
각학교 시험문제 자체가 다른건대.. 당연한 것이지요.
70년대는 지금처럼 컴퓨터가 발전되있질않았습니다..
고3때 모의고사를 봐도..
전국적인 통계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기껐해야 사설 입시학원( 대성 서울 양영)에서 서울의 5대 사립 5대공립 고등학교 지방의 도청소재지 명문고 10개학교 정도가 연합해서 모의고사를 치루고 선생님들이 한달내내 채점하고 통계내서..
자기내 학교학생들의 성적을 가늠해 볼따름이었습니다..
"점수로 대학 서열을 매긴다" 라는 말은 1980년대 이후에 나온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대 입시석적이 높을까 고대 입시 성적이 높을까..
이런 의문만 가졌지 자세한 수치를 알수 없었습니다..
본고사라는 것이 각학교마다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죠..
뿐만아니라 본고사 이전에 치루는 예비고사라는것도 지역응시자 배분의 목적으로 치루는 것이었습니다.
에비고사는 서울지역에 있는 대학정원이 8만명이다 그러면 3배수 정도인 약 24만명을 서울지역으로 응시하겠다는 응시자중에서 24만명정도를 서울지역 합격생으로 뽑는것입니다..
340점 만점(국영수 150점 기타과목 170점 체력장20점)에 대략 190점 정도가 이정도 점수에 듭니다..
서울대를 지망 하는 응시자들은 예비고사 200점 정도만 맞을만큼 공부하고 모든 것을 서울대 본고사에 맞추어서 공부를 하죠..
서울대 지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국영수 140점 이상은 기본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기타과목 4지선다에서 몽땅 1번으로 찍어도 40점은 나오고 체력장은 원서만 내도 16점은 나오니까. 예비고사는 전혀 신경을 안쓰고 본고사 준비에 전력을 하죠..
그래서 서울대 합격생중 예비고사 190점대도 수두룩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대가 90점대학생들이 들어가는 후진대학라고 말못하는거죠..
예비고사는 반영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일부 하위권 학교는 예비고사점수로만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서울의 중하위권대학의 예비고사 커트라인이 보통 245점 이었습니다(예비고사만 반영하는 학교)
그런데 서울대 합격생중에 상당수가 서울지역 예비고사를 1~2점 차로 넘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서울대가 커트라인 245점인 학교보다 점수가 낮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당연히 서울대는 본고사로 학생을 선발 했으니까요..
본고사가 폐지되는 81년전까지 입시제도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두가지 시험으로만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내신전혀 반영하지 않았지요..
이런 입시제도 때문에 고등학교 수업은 파행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렇게 학교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1981년 전두환때 과외금지 보충수업금지 본고사 폐지 내신적용등의 정책이 나온것입니다
그리고 내신이 반영이 안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의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에 기를쓰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고2만 되면 대략적이 지원대학이 정해서 그학교에 맞게 본고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학교는 오자마자 출석체크만 하고 서울같은 경우 D학원 J학원 Y학원등 이른바 입시 명문 학원 재학생반으로 곧장 갑니다.. 어떤 학생은 아예 학교에 오지 않고 학원으로 직행합니다..
학교에서는 들어가지 어려운 학워에 다니는 학생들 출석체크는 형식적으로 만 했습니다..
내신적용을 안했기 때문에.. 출석잘해서 개근 하는 학생이 반드시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현실이기 얼마전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나온 "양가 아저씨"처럼 꼴찌를 해도 스카이 대학에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학교의 커트라인이 "수능 몇점"으로 명백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점수로 각학교를 점수순으로 줄을 세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70년대는 전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점수로 줄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어느학교가 어느학교보다 명문이다라고 유추할수 있는 것은..
대략적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옆집에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A대학를 봤는데.. 떨어졌다..
그런데 앞집에 2류고등학교 다니는 녀석이 B대학시험을 봤는데.. 붙었다..
이러면 A대가 더 좋은 학교다라고 생각한다거나
A대학에는 경기고등학교와 5대공립 5대 사립고등학교출신 학생이 50%가 넘고 B대학은 10%밖에 안된다 그러면.. A대학이 더 좋은 대학이다 이렇게 평가를 하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처럼 한가지 시험으로 먼저 시험을 보고 그 점수를 가지고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서론이 길었습니다..
지금 까지 이야기로..
성대를 생각해 봅시다..
서울의 경기고등학교는 고교 평준화 이전(1974년) 의 학생들이 졸업하는 대학 76학번까지
서울대학교에 평균 250~350명이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5대공립고(경기 경복 서울 용산 경동)
전국의 도청 소재지명문고 들이 50~250명정도 합격시켰지요..
경기고등학교가 고3 재학생 700여명중 5~600여명이 서울대에 응시해서 250명정도를 합격시키고 재수생 이상 졸업생들이 400명명응시해서 100여명 합격하였습니다..
서울의 현재 중상위 대학중 그때 서울 연세 고려 이화 숙명 서강 중앙 경희 동국 ..등등이 전기 대학이었습니다.전기대가 70%를 차지 했고 후기는외대 성대 한대 (홍익 건국 단국 경기 명지 ...외대 성대 한대 외의 학교는 전기와 후기를 가끔 바꾸곤 했습니다)였고 30%정도 였습니다
경기고등학교재학생들은 약 500~550명정도가 서울대에 응시를 합니다..
이때는 전기에 딱 한개의 학교 후기에 딱 한개의 학교 밖에 응시를 할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 100여명의 학생들이 연고대에 응시를 했죠.
그러니까.. 경기고에서 하위그룹의 학생들이 응시하는 학교가 연고대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경기고에서 1~2등 하던 학생도 연고대 상위권학과에 응시 많이 했으니까요..
하지만 상식적으로..생각하면.. 경기고에서는 상위권은 서울대 하위권은 연고대 응시라는 등식이 도출될겁니다..
경기고학생중에 전기에서 서울대에 오륙백명이 응시하고 나머지 100여명이 연고대 응시..
서울 고려 연세 외의 다른 던기 대학을 응시하는 경기고 재학생은 드물엇죠..
한마디로 경기고 출신중에 재수 3수가 아닌 현역으로 연고대에 갔다고 하면..
동문들 사이에서 성적이 나빴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고 연고대는 많이 회피를 했답니다..
오히려 경기 경복 용산 서울등 명문고 출신들은 연고대보다.. 후기명문인
성대를 들어갔지요..
성대 들어 가서는 같은 재학생끼리 편을 갈라 비명문고 출신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죠..
난 경기고 출신이다 같이 취급하지 마라..너희하고는 다르다..
오고싶어서 온게 아니다.. 이런식으로 학교생활을 했을겁니다..
경기고등학교를 생각하면.. 성대가 고대 연대보다 명문 같게 느껴 지지만 그외의 학교장에서 보면.. 또 얘기가 달라집니다..
서울대에 10명 내외를 보내는 학교와 10년에 한명 보낼까 말까한 시골의 어는 학교의 입장에서는 또 전혀 다릅니다..
시골의 이른바 똥통학교에 한학생이 입학했는대.. 한학기 한학기 갈수로 실력이 부쩍 부쩍 늘더니 고3때는 시험마다 올100을 맞습니다..
이학교에서는 서울대는 커녕 서울에 있는 중위권대학도 한두명 보낼까 말까한 학교인데..
이런 천재적인 학생이 들어와도 이학생이 작년에 지방 국립대에 들어간 1등하던 놈보다 약간 더 잘하는건지 무지 잘하는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죠.. 그래서 그지역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서 치룬 기말고사 시험지를 가져다 주고 풀어보라고 하니까.. 그 좋은 학교에서 1~2등하는 놈보다 더 잘풀더라 그러면.. 이학생을 서울대나 연고대 그외 전기대에 응시를 하게 할때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이 고민을 합니다..
공연히 서울대 치게 해서 떨어지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연고대 치게 하거나 더 겁먹고 중앙대나 ..경희대 치게 하죠..
10명이하 보내는 학교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컴퓨터로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이 응시하는 모의고사같은게 없었습니다..
지금 처럼 컴퓨터도 발전이 안되 있었고..
전국 몇등몇등이다라는건 아무의미도 없는 것이었죠..
지금 처럼 선시험 후지원 하는게 아니라
선지원 후시험이었고..
시험은 각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시험문제를 내서 치루는 본고사 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겁니다..
그래서 감을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대 쳐서 떨어진 사람이 성대 떨어지고 연고대 쳐서 떨어진 사람이 성대 붙고
경기고 수석입학 수석졸업한 사람이 서울대 법대 5수한 경우도 있고..
70년대본고사 시절과 80년대 학력고사 시대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한마디로 선시험 후지원은 서울대와 연고대를 위한 시험제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몇점짜리 학생인지 아무도 모르던 본고사 시절에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학교를 지원했던 것이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울대 농대가 고려대 법대보다.. 높을 수 가 없었습니다..
서울대 농대가 고려대 법대보다 높다 낮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수 있었을까요?
고려대 법대를 응시해서 떨어지 10명의 학생과 서울대 농대를 응시해서 떨어진 10명의 학생 서울대 법대를 응시해서 떨어지 10명이 학생이 후기에 동시에 성대 법대를 응시 했을때..
확연히.. 나타납니다.. 서울대 농대 불합격생은 성대 법대 합격율이 극히 낮았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고대 법대 불합격생도 합격율이 낮았던 거지요..
이런 정황근거로만 학교를 비교 했던 것이지요..
그당시 성대는 서울대 상위권 불합격생들끼리 경쟁하는 학교이고..
연고대 불합격생들을 또다시 불합격의 아픔을 겪게 할지도 모를 어려운 학교 였지요.
학력고사 시절.. 340점 만점에 295점~305점정도의 점수를 맞았다면..
학교에서 난리 납니다..
학생은 연대 상대나 고대 법대를 원하는대..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서울대에 보내려고 합니다..
이점수면.. 확실히 서울대 사회대나 농대는 합격안정권인데..
서울대 보내면 서울대 합격생 하나가 느는데.. 악착같이 학생을 회유해서 서울대에 응시케 합니다..
각학교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해가 갈수록 서울대의 모든학과가 높아지고 그다음 연고대의 모든학과가 높아지고.. 이런식이 되었지요..
70년대 당시는 이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성대갈정도 실력이면 서울대 중위권응시했으면.. 붙었을 학생이었다..라는 인식이 강했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문과를 이랬습니다..그리고 이과에선 연고대는 없었습니다..
근데 글쓴이가 성대출신인가봐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
왜 3불정책에 본고사가 있는지 대충은 알것같음..
스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