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대한 추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극장은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그곳은 우리를 꿈꾸게 만든다. 우리가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일상적 삶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불이 꺼지고 실내가 어둠에 지배당하면, 사실 우리는 태초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빛이 스크린에 비추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영화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것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그속에는 현실보다 더 뚜렷한 현실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은 세계 재구성의 공간이며, 삶을 비추는 입체적 거울이다.
극장에 대한 사유는 우리를 존재의 본질로 데려가준다. 스크린 앞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타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내 삶의 연장선상에서 비춰지는 내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삶이 저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극장 안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한 편의 영화가 단지 100분 동안의 쾌락적 요소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우리를 삶의 근원으로 데려가 준다.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사유하게 해준다.
칸느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역대 칸느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를 중심으로 35명의 감독들이 그들 각자가 생각하는 영화관을 소재로 해서 만든 3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모은 것이다. 비록 3분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필름 속에는 거장들의 개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내공이 모자라는 감독들이 2시간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거장들은 불과 3분 안에 쥐락펴락한다. 재료를 완벽하게 주물러서 반죽한 뒤 물건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면, 왜 그들이 거장인지를 웅변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불과 3분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의 우주가 생성하고 소멸한다.
당신이 평소 좋아하는 모든 감독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동양에서는 첸 카이거, 장이모우(중국), 차이밍량(대만), 왕가위(홍콩), 기타노 다케시(일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아쉽게도 임권택 감독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데이빗 린치, 코헨 형제(미국),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멕시코) 데이빗 크로넨버그(캐나다), 월터 살레스(브라질), 유럽 대륙의 테오 앙게로폴리스, 난니 모레티, 라스폰 트리에, 켄 로치, 클로드 를루슈, 빔 벤더스 등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기타노 다케시나 라스폰 트리에 감독처럼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하는 감독들도 있다. 시골 들판에 덩그랗게 위치한 낡은 극장 건물로 한 농부가 들어 온다. 극장 안에는 아무도 없다. 농부는 영화를 보려고 하지만 필름은 자주 끊어지고 나중에는 영사실에 불까지 난다. 그렇게 힘들게 영화가 상영되는데, 스크린에 비치는 작품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즈 리턴]이다. 그 유명한 마지막 대사, 텅 빈 학교 운동장을 자전거를 타고 돌던 두 명의 청춘들. 한 명이 묻는다. [우리는 이제 끝난 것일까?]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대답한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 그리고 ㅇ여화는 끝난다. 정말 영환느 아직 시작도 안한 것 같지만 벌써 끝나 버렸다. 농부는 아쉬운 망므으로 극장을 나와 다시 텅빈 시골 들판을 걸어 간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영화를 트는 영사기사로 출연한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조금 엽기적이다. 아마도 칸느 영화제 시사회장 같은 곳에서 턱시도우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칸느 영화제 공식 시사회에서는 턱시도우 정장 차림이 아니면 입장하지 못한다) 그런데 영화업을 하고 있다는 한 남자가 영화 상영되는 동안 옆 사람에게 자꾸만 말을 건다. 자신이 영화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며 실례지만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질문을 받은 그 남자는 자신의 ㅇ여화가 상영되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자신이다. 그는 당신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한다며 벌떡 일어나서 망치로 그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피투성이로 만든다.
35명의 감독들에게 공통점은 없다. 오직 소재가 영화관이라는 것만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할 뿐이다. 우리는 거장들이 재료를 반죽해서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첸 카이거의 작품처럼, 시골 야외 극장에서 정전이 되자 아이들이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밟으며 생산되는 전기를 모아 다시 영사기를 돌리며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순박함부터, 사랑과 이별의 추억이 깃든 장소로서 혹은 현실과 허구에 대한 사유의 장으로까지 다양한 접근버이 허용되어 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켄 로치의 영화는, 극장 매표구 앞에서 줄을 서 있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망설인다. 그러나 긴 줄이 끝나고 막상 표를 사려는 순간이 되자 아들은 마음을 바꿔 야구장에 가자고 한다. 그들은 미련없이 극장을 떠나버린다. 관객이 없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장은 영화생산자와 영화소비자가 만나는 곳이다. 우리는 극장에서 만나 삶의 다양함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