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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씨(拓拔氏) 북위(北魏·後魏)는, 고구려(高駒驪)다.
고구려(高駒驪-高驪)와 연연(蠕蠕-柔然-芮芮-茹茹)의 婚脈
2023년 05월 31일
○ 현존(現存)하는 “조선사(朝鮮史)”는 : 역사통설(歷史通說) 【역사통설(歷史通說)이란 : “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말하는 것이고, 실증사학(實證史學)에서 자신(自身)들의 입맛에 딱 맞게 첨삭(添削)하고, 왜곡(歪曲)·조작(造作)을 더해 정리(整理)하여 해설(解說)해 놓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에서 설명하는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이다.
➨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는, 한국사(韓國史)와 동류(同流)인가? 이류(異流)인가? 에 대한 답변(答辯)은 “동류(同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조선사(朝鮮史)와 한국사(韓國史)”는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卽) “한국사(韓國史)”란 “대한제국(大韓帝國) 이후(以後)로부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짧은 기간(期間)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 ‘한국사(韓國史)’는 『지금(只今)도 자주(自主)와 자립(自立)의 역사(歷史)가 아닌 식민지(植民地) 역사(歷史)다』 뭐 하나 독단적(獨斷的)으로 행(行)할 수 없는 나라란 뜻이다. 좀 과한 이야기지만, ‘비굴(卑屈)한 민족(民族)’이다. 그저 정신승리(精神勝利)로, 자기만족(自己滿足)에 빠져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역사통설(歷史通說)에 의한 『고구려(高駒驪)는 BC58∼AD668년간에 있었던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로, 『오늘날의 한강이북(漢江以北)으로부터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의 요수(遼水)까지가 최대(最大) 영토(領土)였다』고 설명(說明)한다.
헌데 이렇게 설명(說明)하면서도 : 『대륙사(大陸史)에서는, 헌원황제(軒轅黃帝)의 손자(孫子)였던 제곡고신(帝嚳高辛)의 후예(後裔)로 상주(商周) 때도 ‘구려(句驪)=구려(駒驪)’로 있었다고 하였으니, 기원전(紀元前) 1165년 이전(以前)의 하(夏) 왕조(王朝) 때도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에 대해서 ‘까막눈’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 : 一貫)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자(者)들임에 틀림없다.
➤ 이러한 『‘고구려(高駒驪)’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서 잠시 흥성(興盛)했던 연연(蠕蠕)과 왕실(王室)과의 혼인(婚姻)으로 결속(結束)되어 주변국(周邊國)들을 공포(恐怖)로 몰아넣었다』고 전(傳)하고 있다.
반도(半島) 북방(北方)에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카스피해[Caspi, 海]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대충 어림잡아도 15,000∼20,000 리(里)쯤 떨어져 있고, 실제로 길을 간다면 여기에 몇 천리(千里)를 더해주어야 한다. 산(山)을 넘고, 강(江)을 건너고, 꾸불꾸불 길을 따라가야 하니 수천(數千) 리를 더 가야 도착(到着)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다만 가능성(可能性)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그 근접(近接)한 땅에 고구려(高駒驪)가 자리잡고 있었다면 이러한 기록(記錄)은, 기록(記錄)에 따라 고증(考證)과 해설(解說)이 사실(史實)로써 설명(說明)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발상전환(發想轉換)이 필요(重要)한 것이다.
➤ 『연연(蠕蠕) 또는 유연(柔然) 혹은 예예(芮芮), 혹은 여여(茹茹)』라고도 불리웠던 종족(種族), 부족(部族)에 대한 확실(確實)한 근원지(根源地)는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학자(學者)들마다 의견(意見)이 다르고, 그 후예(後裔)들이라고 자처(自處)하는 국가(國家)가 없다 보니 그들의 기원(起源)에 대해 정확(正確)하게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때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흥성(興盛)했던 종족(種族), 국가(國家)로 많은 속국(屬國)을 거느리고, “고구려(高駒驪) 왕실(王室)과의 혼인(婚姻)으로 주변(周邊)의 여러 나라들을 떨게 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두 나라가 은밀(隱密)하게 모의(謀議)하여 지두간국(地豆干國)의 땅을 빼앗아 서로 나누어 가지려 했다는 사실(事實)이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을 정도였다는 사실(事實)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연연(蠕蠕)”이 어디에서 흥성(興盛)했으며, 주변(周邊)의 어떤 나라(國家)들을 정복(征服)하여 속국(屬國)으로 만들었을까? 이런 기록(記錄)들이 후세(後世)에까지 전(傳)해지고 있는 걸까?
즉(卽) 『연연(蠕蠕)=유연(柔然)』 : 〈4세기(世紀) 말부터 6세기(世紀) 말까지 서북(西北)과 서토(西土)【동구라파(東歐羅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땅에 존립(存立)했던 유목(遊牧)민들로 ‘여여(茹茹), 예예(芮芮)’ 등의 이칭(異稱)으로도 불렸는데, 이들의 종교(宗敎)는 샤머니즘(shamanism)이었으나, 불교(佛敎)도 행해졌다〉고 전해지는 가운데,
➨➨➨ 연암집(燕巖集)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순찰사에게 답함』편을 보면 : 《邪學本以昇天之說。誑誘愚民。本出柔然。: 사학(邪學 : 天主敎)은 본시 천당(天堂)에 올라간다는 설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었는데, 이 근본은 유연(柔然)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 “사학(邪學 : 天主敎)의 근본(根本)은, 유연(柔然)의 샤머니즘(shamanism)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이해(理解)될 수 있는데, 곧 ‘천당(天堂)으로 간다’는 핵심적(核心的)인 교리(敎理)는 연연(蠕蠕)의 샤머니즘(shamanism)에서 핵심적(核心的)으로 행해졌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당시(當時) ‘연암(燕巖)’의 생각이었다는 것일까?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면 오늘날의 기독교(基督敎) ‘천당(天堂)’ 이야기는 “연연(蠕蠕)=유연(柔然)의 샤머니즘(shamanism)”에서 차용(借用)한 것으로 이해(理解)될 수 있다.
한때 강력(强力)한 국위(國威)를 떨쳤던 오손(烏孫)도 5세기(世紀) 후반(後半) 무렵에 선비(鮮卑)와 연연(蠕蠕: 柔然) 등에 의해 소멸(消滅)되었고, 동구라파(東歐羅巴) 일부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여러 나라들이 정복(征服)되어 속국(屬國)이 되었다. 4 - 6세기(世紀) 연연(蠕蠕 : 柔然)이 매우 강성(强盛)했음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 이러한 결과(結果)로 “당시(當時)의 연연(蠕蠕 : 柔然)의 땅”을 파헤치면 : 『고구려(高駒驪) 영토(領土)의 서계(西界 : 서쪽 경계 땅)도 밝혀지게 된다.』는 점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效果)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러차레 언급(言及)되었고, 게재(揭載)되었던 것을,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집중적(集中的)으로 찾아 고증(考證)해 보기로 한 것이다.
(1) 通典 北狄 : 《鹽漠念 : 皆北狄種類,相與婚姻,高氏聘蠕蠕女為妻,宇文氏以突厥女為后 : 모두 북적(北狄)의 종류로 서로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고씨(高句驪)는 연연(蠕蠕)의 여식(女息)을 처(妻:王妃)로, 우문(宇文)씨는 돌궐(突厥)의 여식(女息)을 왕비(后)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 ‘통전(通典)’의 저자(著者)인 당(唐) 재상(宰相) “두우(杜佑)”는 : 왜 “염막념(鹽漠念)”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생소(生疏)한 북적(北狄) 국가(國家) 기록(記錄)에 ‘고구려(高駒驪)와 연연(蠕蠕)’ 왕실(王室) 간의 혼인(婚姻) 이야기를 기록(記錄)해 놓았을까? ‘고구려(高駒驪)나, 연연(蠕蠕)이나 염막념(鹽漠念)’이나 다 같은 종류(種類)였다는 뜻이 아니면 설명(說明)될 수 없으며, 부족(部族)이나 종족(種族)의 여식(女息)을 보낼 때는, 그 상대국(相對國)을 받드는 경우(境遇)가 많았다는 것은 역사상식(歷史常識)이요,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질서(秩序)였다.
(2) 『北史 契丹』 편을 보면 :《太 和 三 年, 高 句 麗 竊 與 蠕 蠕 謀, 欲 取 地 豆 干 以 分 之. 태화 3년[AD479], 고구려(高句驪)가 몰래(竊) 연연(蠕蠕)과 모의(謀議)하여 “지두간(地豆干)”국의 땅을 빼앗고 나누자고 하였다. 契 丹 舊 怨 其 侵 軼, 其 莫 賀 弗 勿 干 率 其 部 落, 車 三 千 乘, 眾 萬 餘 口, 驅 徙 雜 畜 求 內 附, 止 於 白 狼 水 東 . : 글란(契丹)은 옛 원한으로 번갈아 침략하니, “막하불물간(莫賀弗勿干)”은 부락(部落)의 무리들을 이끌고, 수레 삼천(三千)승에 무리 만(萬) 여구(口) 및 여러 가축(家畜)을 몰고 이동(移動)하여 내부에 붙기를 청하였는데,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머물렀다.》고 하였으니,
주변(周邊)의 여러 나라들이 공포(恐怖)에 떨었다는 이야기다. 【필자(筆者) 주(注) : 北魏 孝文帝 太和三年 : AD 479 : 고구려(高駒驪) 장수왕(長壽王) 67年이다】
➊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柔然)』이 왕실(王室) 간에 혼인(婚姻)으로 결속(結束)되어, 북해(北海)의 남(南)쪽에 있었다는 “지두간국(地豆干國)”을 빼앗아 서로 그 땅을 분할(分割)하자는 은밀(隱密)한 모의(謀議)를 했다는 것인데, 이때의 고구려(高駒驪)는 장수왕(長壽王) 67년 때다. 여기서 “지두간(地豆干)”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스피해(裏海)+아랄해(咸海)의 주변(周邊), 아무다리아강(嬀水) 남(南)쪽과 북(北)쪽 지방】의 요충지(要衝地)와 동구라파(東歐羅巴) 일부(一部)에 있었다던 “연연(蠕蠕: 柔然)이 고구려(高駒驪)”와 은밀(隱密)히 모의(謀議)하여 주변(周邊)의 나라를 침공(侵攻), 그 땅을 나누자고 했을 때는, 『연연(蠕蠕: 柔然)의 동계(東界)와 고구려(高駒驪)의 서계(西界)가 맞닿아 있을 때 가능(可能)한 것이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➋ 『北史 烏洛侯國』 편을 보면 : 《烏洛侯國在地豆干北,去代都四千五百餘里.其地下濕,多霧氣而寒. : 오락후국(烏洛侯國)은 “지두간(地豆干)”국의 북쪽에 있으며, 대도(代都)에서 4,500 여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낮고 습하며, 안개 기운이 많아 춥다. 其國西北有完水,東北流合於難水,其小水,皆注於難,東入海.又西北二十日行,有于巳尼大水,所謂北海也. : 그 나라의 서북(西北)에 “완수(完水)”가 있어,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해지며, 작은 물은 모두 “난수(難水)”로 유입되어 “동해(東海)”로 들어간다. 또 서북(西北)쪽에 20일을 가면 우사니대수(于巳尼大水)가 있는데, 소위 북해(北海)다. 太武真君四年來朝,稱其國西北有魏先帝舊墟石室,南北九十步,東西四十步,高七十尺,室有神靈,人多祈請.太武遣中書侍郎李敞告祭焉,刊祝文於石室之壁而還. : 태무(太武) 진군(眞君) 4년에 래조(來朝)하였는데, 이르기를 : 그 나라의 서북(西北)에 위(魏) 선제(先帝)의 오래된 석실의 옛터가 있다. 남북(南北) 90보, 동서(東西)가 40보이며, 높이가 70척(尺)이다. 석실에 신령(神靈)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기원한다. 태무제(太武帝)가 중서시랑(中書侍郎) “이창(李敞)”을 보내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석실의 벽에 축문(祝文)을 새기고 왔다.》고 하였으니,
‘지두간국(地豆干國)’은, 북해(北海)의 남(南)쪽에 있었던 오낙후국(烏洛侯國)의 바로 남(南)쪽 땅에 있었던 나라였다. 북해(北海)는 “서시베리아”【西伯利亞=鮮卑利亞 : 본래(本來)의 만주(滿洲 :滿州➨滿洲➨滿珠➨曼珠)】의 북(北)쪽 바다(北海)”를 칭한다.
【필자(筆者) 주(注) : 또 다른 주장(主張)도 있다. 그러나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나누는 기점(基点)을 생각하면 그곳의 북(北)쪽 바다(海)가 ‘북해(北海)’라는 것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또한 ‘대도(代都)에서 4,5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서북방(西北方) 4,500 여리면 바로 위에서 설명(說明)한 곳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빼앗아 “연연(蠕蠕)과 고구려(高駒驪)”가 그 땅을 분할(分割)하자고 하였다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고구려(高駒驪)의 땅이 이곳 가까이에 있어야 하며, 『연연(蠕蠕 : 柔然)의 동계(東界)와 고구려(高駒驪)의 서계(西界)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결론(結論)을 도출(導出)할 수 있는 것이다.
➌ ‘고구려(高句驪)’가 『반도(半島)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대륙(大陸)에서 기록(記錄)된 역사서(歷史書)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이며, 반도사관(半島史觀)이나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일천(一千) 수백(數百)년 전(傳)에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아닌 “서북공정(西北工程)”의 프로젝트가 가동(可動)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또는 수억(數億) 광년(光年)이나 떨어져 있는 외계(外界)의 외계(外界)인들이 몰려와 “고구려(高駒驪) 땅을 10,000리 이상(以上) 서(西)쪽으로 강제(强制) 이동(移動)시켰다”는 말일까? 외계(外界)인들이 왜 그래야만 했을까?
➍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척발(拓跋)”씨에 관한 것이다. “오낙후국(烏洛侯國)”의 서북(西北)쪽에 북위(北魏)를 창건(創建)한 태무제(太武帝)의 선조(先祖)가 있었던 석실(石室)이 북해(北海)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척발(拓跋)씨들의 활동(活動) 거점(據點)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북위(北魏)=북로(北虜)’ 기마군단(騎馬軍團)의 백제(百濟) 침공(侵攻), 고구려(高駒驪)와 연연(蠕蠕)의 관계(關係)를 보면 : 『‘탁발씨(拓跋氏)의 북위(北魏)’는 고구려(高駒驪)에 예속(隸屬)된 ‘부락(部落)=속국(屬國)’이었을 뿐으로, 태왕(太王)의 왕사(王師) 역할(役割)을 수행했을 뿐이다.』라는 것이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일 수밖에 없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의 말대로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고구려(高駒驪)가 있았다”는 논리(論理)에 따르면 :
당시(當時)의 서토(西土)【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땅을 주름잡고 있었던 ‘연연(蠕蠕) =유연(柔然)’과 ‘고구려(高駒驪)’가 손을 맞잡고 주변(周邊)의 종족(種族)과 부족(部族), 나라(國家)들을 약탈(掠奪)하고 빼앗으려 모의(謀議)하였다면 :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황제국(皇帝國)으로 수백(數百) 년을 군림(君臨)했다는 ‘북위(北魏)=후위(後魏)’는, 그 자체(自體)가 “고구려(高駒驪)였다는 증거(證據)다.”』
➎ ‘북위(北魏)=후위(後魏)’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황제국(皇帝國)이었다고 한다면 :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의 고구려(高駒驪)가 북방(北方) 초원(草原)의 패자(霸者)였던 ‘북위(北魏)=후위(後魏)’를 뛰어넘어 서토(西土) 땅으로 진군(進軍)할 수 없다.〉
즉(卽) ‘북위(北魏)=후위(後魏)’ 땅을 건너뛰어 “꽃을 쫓아 나비(蝶)처럼 서토(西土)로 날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즉(卽) 고구려인(高駒驪人)들은 신(神)이 아닌 인간(人間) 무리였고,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卽) “북위(北魏)=후위(後魏)”의 탁발씨(拓拔氏)는, 고구려(高駒驪)에 예속(隸屬)된 부족(部族)으로, “고구려(高駒驪)”를 반도(半島) 땅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고구려(高駒驪)를 각색(脚色)해 만들어 놓은 왕조(王朝)일 뿐이다.
이렇게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에 따라 “고구려(高駒驪)”를 동방(東方)에 놓고 보면 서방(西方)의 ‘연연(蠕蠕)=유연(柔然)’과 상접(相接)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형편(形便)이니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북해(北海)의 남(南)쪽 지대】에 있었던 조그만 나라들을 빼앗아 그 땅을 나누어 갖기로 은밀(隱密)하게 모의(謀議)할 수 있는 것이다.
➤➤➤ 여러 고전원문(古典原文)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해 보면 : 『연연(蠕蠕)의 동계(東界)가 바로 고구려(高駒驪)의 서계(西界)가 되는데, 즉(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총령(葱嶺)과 발하슈호【Balkhash 湖 : 파이객십호(巴爾喀什湖)】동(東)쪽에 고구려(高駒驪)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위(北魏)가 이들을 쳤다고 하였지만, ‘북위(北魏)’는, 고구려(高駒驪)와 연연(蠕蠕) 사이에 낄 자리가 없다. 『그 뒤의 이야기지만 : ‘연연(蠕蠕)=유연(柔然)’과의 왕실(王室) 간의 혼맥(婚脈)이 깨지고, 고구려(高駒驪)가 연연(蠕蠕 : 柔然)을 쳐 몰아냈으니, 연연(蠕蠕 : 柔然) 땅이었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 일부(一部) 땅은 자연스럽게 고구려(高駒驪)의 땅으로 병합(倂合)되어 버린 것이다.』
※ 筆者 注 : ‘半島(반도) 平壤(평양)’으로부터 ∼ ‘구글어스’로 보는 직선거리(直線距離)
➀ 아랄해[Aral, 海] ∼ 5,300여 km
➁ 카스피해[Caspian, 海] ∼ 5,800여 km
➂ 발하슈호[Balkhash, 湖] ∼ 4,000여 km [蒙古語 : 큰 호수(湖水)]
➃ 자이산호[Zaisan, 湖] ∼ 3,500여 km
➄ 벨루하산[Belukha, 山] ∼ 3,300여 km [金山=阿爾泰山=白頭山=長白山]
➅ 아무다리아[Amu Darya : 중간수역] ∼ 5,200여 km [嬀水]
➆ 발틱해[Baltic, 海 : 중간수역] ∼ 7,000여 km
‘반도(半島)’ 땅에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위에서 열거(列擧)한 곳【➀∼➆끼지】을 가려면 직선거리(直線距離)로 ‘10,000∼15,000리(里)’에 이르므로, 도보(徒步) 또는 말을 타고 간다[馬行]면 여기에 수천(數千) 리가 더 추가(追加)되어야 갈 수 있는 당시(當時)의 실정(實情)으로 보면 꿈(夢)속에서도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연연(蠕蠕)=유연(柔然)’은 : 바로 위에서 열거(列擧)한 동구라파(東歐羅巴)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을 굴복(屈服)시켜 병합(倂合)했다고 하였다.
※ 위의 지도(地圖)에서 : 【➊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 ➋ 하(河) 이북(以北)의 초원지대(草原地帶) 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에서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서토(西土) 땅에 있었던 국가(國家)와 왕실(王室) 간의 혼인(婚姻), 교류(交流) 및 출정(出征)하려 한다면 위의 “➋ 하(河) 이북(以北)의 초원지대(草原地帶)”를 통과(通過)해야 하는 것은 선택(選擇)이 아닌 필수적(必須的)이다. 이때 이곳의 패자(霸者)는 탁발씨(拓拔氏)로 대표되는 북위(北魏)라고 우리는 배우고 가르쳤으나, 이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卽) ‘고구려(高駒驪)가 연연(蠕蠕 : 柔然)’과 혼맥(婚脈)으로 이어져 결속(結束)되고 이들과 함께 북해(北海)의 남(南) 땅에 있던 나라들은 빼앗아 서로 나누자는 모의(謀議)를 할 수 있으려면 : ‘연연(蠕蠕 : 柔然)의 동계(東界)’와 ‘고구려(高駒驪)의 서계(西界)’가 ‘서로 맞닿아’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기마(騎馬)를 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중간(中間)에 끼인 “➋”의 “하(河) 이북(以北)의 초원지대(草原地帶)”의 패자(霸者)는 북위(北魏)가 아니라 고구려(高駒驪)여야 마땅한 일이고, 통전(通典)이나 북사(北史) 등 여타(餘他)의 고전원전(古傳原典)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이건 ‘고구려(高駒驪)+북위(北魏)+연연(蠕蠕)’ 모두가 인간(人間) 무리였기 때문이다. ‘신(神)들의 역사(歷史)’라면 : 고구려(高駒驪)가 북위(北魏)를 펄쩍 뛰어넘어 서토(西土)로 진군(進軍)할 수 있으나, 이는 말 그대로 신화(神話)일 뿐, “인간(人間)의 삶이 아니다.”
(3) 通典 北狄 : 蠕蠕
《蠕蠕姓郁久閭.中略.至其子車鹿會,雄健,始有部眾,自號柔然.後魏太武以其無知,狀類於蟲,故改其號曰蠕蠕 [宋齊謂之芮芮,隋史亦曰芮芮] : 又六代孫社崙,兇狡,甚有權略. 度漠北,侵高車,深入其地,遂并諸部,凶勢益振. : 또 6대손 두륜(杜崙)은 흉악하고, 교활하여, 권세와 모략(權略)이 심하였다. 막북(漠北)을 건너 고차(高車)를 침입하여 그 땅 깊이 들어가, 마침내 여러 부(部)를 병합하여, 흉한 기세가 더하여 떨쳐 일어났다. 北徙弱落水,始立軍法,千人為一軍,軍置將一人:百人為幢,幢置帥一人. : 북쪽의 약낙수(弱落水)로 옮겼다. 처음으로 군법을 세웠는데, 일천 인을 1군으로 하고, 군(軍)에는 장수 1명으로 하고, 백인(百人)을 당(幢)으로 하고, 당(幢)에는 우두머리 1인을 세웠다. 其西北有匈奴餘種,國尤富強,盡為社崙所并,號為強盛. : 그 서북(西北)에는 흉노의 여러 종족들이 있었으나, 나라는 더욱 부강(富强)해져, 두륜(杜崙)이 모두 병합해 버리고, 강성(强盛)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4) 通典 高車 :
《高車,蓋古赤狄之種也.初號為狄歷,北方以為敕勒,諸夏以為高車,丁零焉, : 其遷徙隨水草,衣皮食肉,牛羊畜產盡與蠕蠕同,唯車輪高大,輻數至多. : 宣武詔曰:蠕蠕,嚈噠與吐谷渾所以交通者,皆路由高昌國,犄角相接. : 선무제(宣武帝)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연연(蠕蠕), 엽달(嚈噠), 토곡혼(吐谷渾)은 상호 막힘없이 오가는 자(者)들인데, 모두 고창국(高昌國)의 길을 통하며, 앞뒤에서 서로 접하여 호응하고 있다. 今高昌內附,遣使迎引.蠕蠕既與吐谷渾路絕,姦勢亦危,於卿彼蕃,便有所益. : 지금 고창(高昌)이 내부(內附)하였으니 사신을 보내 이끌고 맞이하였다. 연연(蠕蠕)은 이미 토곡혼(吐谷渾) 과의 길이 막혔다. 간사한 세력 또한 위험하니, 그 번(蕃)에게 벼슬을 주어, 조그만 이익이라도 편리하게 하여야 한다. 彌俄突尋與蠕蠕主伏圖戰於蒲類海北, 大敗. : 미아돌(彌俄突)과 연연(蠕蠕) 왕(王) 복도(伏圖)가 포류해(蒲類海) 북쪽에서 싸워 대패(大敗)하였다. 明帝初,彌俄突又被蠕蠕主醜奴大敗,殺之. : 명제(明帝) 초, 미아돌(彌俄突)이 또 연연(蠕蠕)의 주(主) 추노(醜奴)에게 대패하여 죽었다.》
➨고차(高車)는 아주 고대(古代)의 적적(赤狄)의 한 종류(種類)라고 분류(分類)하는 종족(種族)인데, 적력(狄歷)이라고도 하였는데, 북방(北方)에는 칙륵(勅勒:鐵勒)이나 고차(高車), 정령(丁零) 등의 여러 하(夏)들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➊ [其遷徙隨水草,衣皮食肉,牛羊畜產盡與蠕蠕同 : 그들은 물과 풀을 쫓아 이동하며,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고기를 먹으며, 소(牛)나 양(羊)들의 가축을 기르며 사는데 연연(蠕蠕)과 같다고 하였다. 즉(卽) “연연(蠕蠕)과 동류(同類)의 부족(部族), 종족(種族)이었다”는 뜻이다.
➋ 위의 글에서 눈길을 끄는 구절은 [諸夏以為高車,丁零焉]인데 “제하(諸夏)”라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즉 “여러 하(夏)”란 뜻이 뭐냐? 여러 번역본(飜譯本)에서는 『제하(諸夏)는 중국(中國)이다』라고 하였는데, 중국(中國)도 여러 중국(中國)이 있었는가? “하(夏)”가 중국(中國)을 뜻한다는 말은 곧 20세기(世紀)에서 주창(主唱)된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이야기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 『중국(中國)의 역사(歷史) 속에서 절반(折半)은, 이민족(異民族)들의 왕조(王朝)였다.』고 말이다. 또 한족(漢族)이란 물가를 따라, 쫓아 사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뭔 한족(漢族)? 20세기(世紀) 손문(孫文)과 그 무리들로부터 주창(主唱)된 것이 아니던가?
(5) 통전(通典) 돌궐(突厥) 편을 보면 :
《突厥 / 木杆可汗,狀貌奇異,面廣尺餘,其色甚赤,眼若琉璃,性剛暴而多智 : 목간(木杆) 가한【토문(土門)의 아들이며, 이름이 “사근(俟斤)”인데, 일명 “연윤(燕尹)”이라고도 한다.】얼굴 모양이 기이하여, 얼굴이 일척(尺) 여로 넓고, 그 색깔이 아주 붉고, 눈(眼)은 유리 같았고, 성격은 강직하고 사납고 슬기(지혜)가 많았다. 西破蠕蠕,擫噠,東走契丹,北并契骨,威服塞外諸國. : 서(西)쪽으로 연연(蠕蠕), 엽달(擫噠)을 파(破)하고, 동쪽으로 글란(契丹)을 달아나게 하고, 북쪽으로 계골(契骨)을 병합하여, 새외제국을 위력으로 굴복시켰다.》고 하였으니,
➊ [西 破 蠕 蠕, 擫 噠 : 서(西)쪽으로 연연(蠕蠕), 엽달(擫噠)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여기서 ‘엽달(擫噠)’이란 나라는 아랄해[Aral,海)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Amu Darya] 강(江)의 남북(南北) 연안(沿岸)에 있었던 옛 나라였다.
※ 필자(筆者) 주(注) : [아무다리아강(Amu Darya, 江)] :《규수(嬀水)=오서하(烏墅河)=오호수(烏滸水)=오호하(烏滸河)=아무강(江)=오호하(烏滸河)【見後漢書, 新唐書】=馬滸河》이고, 또한 《아모하(阿母河)=암포하(暗布河)=아매하(阿梅河)=아서하(阿書河)》라고도 하였다. [함해(鹹海)=달리강아박(達裏岡阿泊)=아랄해(海)]로 들어간다.
➋ “서(西)쪽으로 연연(蠕蠕), 엽달(擫噠)을 깨뜨렸다”고 한 것은, 이들 두 나라가 중앙아세아 한복판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는 말과 같다. 당시(當時) “연연(蠕蠕)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6) 通典 嚈噠 [挹怛 同]
《嚈噠國,或云高車之別種,或云大月氏之種類.其源出於塞北.自金山而南,在于闐之西,東去長安一萬一百里 : / 挹怛 同.至隋時又謂挹怛國焉.挹怛國,都烏滸水南二百餘里,大月氏之種類也.俗同吐火羅.南去 漕國千五百里,東去瓜州六千五百里.按劉璠梁典,滑國姓嚈噠,後裔以姓為國號,轉訛又謂之挹怛焉》
(7) 北史 嚈噠國
《嚈噠國,大月氏之種類也,亦曰高車之別種。其原出於塞北。自金山而南,在于闐之西,都烏滸水南二百餘里,去長安一萬一百里。其語與蠕蠕、高車及諸胡不同。: 其人凶悍,能鬬戰,西域康居、于闐、沙勒、安息及諸小國三十許,皆役屬之,號為大國。與蠕蠕婚姻。: 》
➨ 위의 통전(通典)과 북사(北史)를 보면 : 〈엽달국(嚈噠國)은, 장안(長安)에서 1만 1백리 떨어져 있으며, 오호수(烏滸水 : 아무다리아 江) 남(南)쪽 2백여 리에 도읍(都邑)하고 있었으며, 그 나라의 말은 연연(蠕蠕)과 같았으며, 서(西)쪽 땅의 강거(康居), 우전(于闐), 사륵(沙勒), 안식(安息)등과 여러 작은 나라 30 여개 나라가 모두 복속(服屬)되어 대국(大國)으로 불렸는데, 연연(蠕蠕 : 柔然)과 혼인(婚姻)하였다〉고 하였다.
즉(卽) ‘연연(蠕蠕 : 柔然)과 같은 무리였다’는 것이다.
(8) 通典 西戎 滑國
《滑國,車師之別種也.後魏之居桑乾也,滑猶小國,屬蠕蠕. : 골국(滑國)은 거사(車師)의 별종으로, 후위(後魏)때에 상건(桑乾)에서 살았는데 ‘골(滑)’은 작은 나라로 연연(蠕蠕)에 속했다. 後稍強大,征其旁國波斯,渴槃陀,罽賓,焉耆,龜茲,疏勒,姑墨,于闐,句盤等國焉 : 뒤에 점점 강하고 커지자, 그 곁에 있던 나라를 정복했는데, 파사(波斯), 갈반다(渴槃陀), 계빈(罽賓), 언기(焉耆), 구차(龜茲),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闐), 구반(句盤)등 여러 나라이다.》 라고 하였다.
역시(亦是) ‘연연(蠕蠕 : 柔然)‘에 복속(服屬)되어 있었던 국가(國家)였다.
(9) 通典 賖彌
《賒彌,後魏時聞焉.在波知之南.山居.不信佛法,專事諸神.亦附嚈噠 : 사미(賖彌)는, 후위(後魏) 때 견문한 것인데, 파지(波知)의 남(南)쪽에 있는데 산에 산다. 부처를 믿지 않고, 오로지 여러 신(神)을 모시며, 또한 엽달(嚈噠)에 기대어 산다.》고 하였고,
(10) 北史 賒彌國
《賒彌國,在波知之南。山居,不信佛法,專事諸神。亦附嚈噠。: 사미국(賖彌國)은, 파지(波知)의 남(南)쪽에 있는데 산에 산다. 부처를 믿지 않고, 오로지 여러 신(神)을 모시며, 또한 엽달(嚈噠)에 기대어 산다.》
➨ 위의 글 (9)+(10)의 ’사미국(賖彌國)‘은, 〈후위(後魏) 때 견문한 것인데, 파지(波知)의 남(南)쪽에 있는데 산에 산다. 부처를 믿지 않고, 오로지 여러 신(神)을 모시며, 또한 엽달(嚈噠)에 기대어 산다.〉고 하였다.
(11) 通典 西戎 小月氏
《小月氏,理富樓沙城.其王本大月氏王寄多羅子也. : 寄多羅為蠕蠕所逐,西徙,後令其子守此城,因號小月氏焉.在波路西南.[後魏史云,去漢萬六千六百里] : 소월씨(小月氏)는, 부루사성(富樓沙城)에서 다스렸는데, 그 왕(王)은 본래 대월씨(大月氏)의 왕 기다라(寄多羅)의 아들이다. [대월씨(大月氏)]의 왕(王) 기다라(寄多羅)는 연연(蠕蠕)이 뒤를 쫓자 서(西)쪽으로 도주하였는데, 뒤에 그의 아들이 이 성을 지키니, 이로인해 소월씨라고 불렀다. 파로(波路)의 서남(西南)쪽에 있다. [후위사(後魏史)에서 전하기를 : 한(漢)에서 1만6천5백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12) 通典 大月氏
《大月氏,漢時通焉.理藍氏城,在大宛西可二三千里,居媯水北,其南則大夏,西接安息四十九日行,北則康居,去長安萬一千六百里. : 대월씨(大月氏), 한(漢) 때 통하였다. 람씨성(藍氏城)에서 다스렸는데, 대완(大宛)에서 가히 서(西)쪽 2, 3천리(千里)에 있는데, 규수(嬀水 : 아무다리아 (江) 북(北)쪽에 있다. 그 남(南)측은 대하(大夏)이고, 서(西)쪽은 안식(安息) 과 이어져있는데 49일을 가야한다. 북(北)측은 강거(康居)인데, 장안(長安)에서 1만1천6백리 떨어져 있다. 土地,氣候,物類,風俗,錢貨與安息同.出一封橐駝 : 토지(土地), 기후(氣候),물류(物類), 풍속(風俗), 전화(錢貨)등은 안식(安息)과 같고, 일봉(一封)의 낙타(駱駝)가 나온다. 至後魏代,北與蠕蠕接,數為所侵,遂西徙都薄羅城,去弗敵沙二千一百里[弗敵沙在藍氏城東] : 후위(後魏)》대에 이르러, 북(北)쪽에 연연(蠕蠕)과 접하고 있었는데, 수차례 쳐들어오니, 서(西)쪽으로 도주하여 박라성(薄羅城)에 도읍하였는데, 불적사(弗敵沙)에서 2100리 떨어져 있다. [불적사(弗敵沙)는 람씨성(藍氏城) 동(東)쪽에 있다] 고 하였다.
➊ 대월씨(大月氏)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1,6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연연(蠕蠕 : 柔然)의 수차(數次)에 걸친 침탈(侵奪)로 인하여 패하자 서(西)쪽으로 도주(逃走)했다고 설명(說明)한다. 결국(結局) 그들의 땅이었던 곳은 “연연(蠕蠕 : 柔然)”의 땅이 되었다는 뜻이다.
➋ 대하(大夏)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대원(大宛)의 서남(西南)쪽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월지(月支)가 대하(大夏)를 정복(征服)했다고 하였다.〉하였으니, 곧 월지(月支)를 말하는 것인데, 쿠싼왕조【귀상제국(貴霜帝國)】라고도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학자들은 월지족이 인도유럽인 계통의 집단이라고 믿고 있으며, 일부는 더 나아가 이들이 특정 토하라인 집단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제안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 조선사(朝鮮史)에서의 “월지(月氏)”는 “월지국(月支國)”을 말하는 것으로 마한(馬韓)의 54개 나라 가운데 한 곳으로, 이곳에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54개국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월지(月支)’와 ‘목지(目支)’는 비슷한 글자 같지만 전혀 다른 글자다. 이걸 혼동(混同)한다? 그건 학자(學者)가 아니다. 한문(漢文)을 달토록 쓰고 읽고 하던 분들의 얘기는 결코 될 수 없다. 후대(後代)의 사이비 사가(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위략(魏略)을 참고(參考)】
大夏 (中亞古國)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大夏,又稱巴克特里亞(英語:Bactria),是一個中亞古國,位於古希臘人所說的巴克特里亞地區(縛喝羅)。主要疆域在阿姆河以南,興都庫什山脈(古希臘稱Paropamisus)以北,西邊與安息接壤。
巴克特里亞 (巴克特里亞語:βαχλο, Bakhlo;希臘語:Βακτριανα;波斯語:بـلـخ;亦有譯巴克垂亞)是一個中亞古地名,主要指阿姆河以南,興都庫什以北地區。古希臘人在此地建立希臘-巴克特里亞王國,中國史記稱之為大夏,後來此地更名為吐火羅。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에 의하면 : “하(夏)”는 중원왕조(中原王朝)의 ’중화(中華)=화하(華夏)‘를 말하는 것으로 “한족(漢族) 왕조(王朝)의 대표성(代表性)”을 나타내는 말과 같다.
즉(卽) ”하조(夏朝)는 : 〈後人常以華夏, 諸夏自稱,使之成為中國的代名詞 : 하조(夏朝)는, 후인(後人)들이 이를 화하(華夏) 또는 제하(諸夏)라고 자칭하는데, 이는 중국의 대명사(代名詞)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대하(大夏)”는 “화하(華夏)”의 조부(祖父)님이신가? 이건 또 뭔 말인가? 아니면 당시(當時)의 박트리아【巴克特里亞:Bactria】가 화하(華夏)였다는 말일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 중원왕조(中原王朝)는,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였다는 것인가!』 한치도 틀림없는 말이다.
(13) 北史 西域 / 大月氏國
《大月氏國,都賸監氏城,在弗敵沙西,去代一萬四千五百里. : 北與蠕蠕接,數為所侵,遂西徙都薄羅城,去弗敵沙二千一百里 : 대월씨국(大月氏國)은, 람씨성(監氏城)에 남았는데, 불적사(弗敵沙) 서쪽 있어 대(代)에서 14,500리 떨어져 있다. : 북(北)쪽에 연연(蠕蠕)과 접(接)하고 있어, 수차(數次) 걸쳐 침입하니, 서(西)쪽으로 옮겨 박라성(薄羅城)에 도읍하였는데, 불적사(弗敵沙)로부터 2,100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 ’북사(北史)나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내용은 ’(11)+(12)‘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똑같은 내용(內容)이다. 즉(卽)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 강(江)【규수(嬀水)】남(南)쪽에 서울을 두고 있었는데, 그 북(北)쪽에 있던 연연(蠕蠕)의 침략(侵略)에 패하자 서(西)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새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즉(卽) “연연(蠕蠕)=유연(柔然)”은, 당시(當時)에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카스피해[Caspian 海 : 리해]와 아랄해[Aral 海] 등지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기록(記錄)임을 알 수 있다.
(14) 北史 悅般國
《悅般國,在烏孫西北,去代一萬九百三十里.其先,匈奴北單于之部落也.中略. : 열반국(悅般國)은, 오손(烏孫) 서북(西北)에 있었는데, 대(代)에서 10,930리 떨어져 있었다. 그 선대(先代)는 흉노(匈奴) 북선우(北單于)의 부락(部落)이다. 與蠕蠕結好,其王嘗將數千人入蠕蠕國,欲與大檀相見 : 연연(蠕蠕)과 결호(結好)하여, 그 나라의 수천인(數千人)이 연연(蠕蠕)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연연(蠕蠕)=유연(柔然)‘과 가깝게 인접(隣接)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 北史 烏孫國
《烏孫國,居赤谷城,在龜茲西北,去代一萬八十里。其國數為蠕蠕所侵,西徙葱嶺山中。無城郭,隨畜牧逐水草。: 오손국(烏孫國)은, 적곡성(赤谷城)에서 살았는데, 구차(龜茲) 서북(西北)에 있다. 대(代)에서 10,080떨어져 있다. 그 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연연=유연(柔然)‘이 침략하니, 서(西)쪽 총령(葱嶺) 산중(山中)으로 옮겼다.》
(16) 北史 于闐國 :
《于闐國在且末西北,葱嶺之北二百餘里,東去鄯善千五百里,南去女國三千里,去朱俱波千里,北去龜茲千四百里,去代九千八百里。: 우전국(于闐國)은 차말(且末) 서북(西北)에 있는데, 총령(葱嶺)의 북(北)쪽 2백여리로, 동(東)쪽으로는 선선(鄯善)까지 1,500리, 남(南)쪽으로는 여국(女國) 3,000리, 주구파(朱俱波)는 천리(千里) 떨어져 있고, 북(北)쪽으로는 구차(龜茲) 1,400리 떨어져 있는데, 대(代)까지 9,800리 떨어져 있다. 獻文末,蠕蠕寇于闐。于闐患之,遣使素目伽上表曰:西方諸國,今皆已屬蠕蠕。奴世奉大國,至今無異。今蠕蠕軍馬到城下,奴聚兵自固,故遣使奉獻,遙望救援。: 헌문(獻文)【AD466-470 : 高駒驪長壽王54∼58년】말(末), 연연(蠕蠕)이 우전(于闐)을 약탈(掠奪)하니, 우전(于闐)은 걱정되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기를 : 서방(西方)의 여러 나라들이, 지금 모두 이미 ’연연(蠕蠕)=유연(柔然)‘에 복종(服從)하고 있다. 종(奴 : 奴隸)로 대국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獻文末,蠕蠕寇于闐。于闐患之,遣使素目伽上表曰:西方諸國,今皆已屬蠕蠕。奴世奉大國,至今無異。今蠕蠕軍馬到城下,奴聚兵自固,故遣使奉獻,遙望救援。:헌문(獻文)【AD466-470 : 高駒驪長壽王54∼58년】말(末), 연연(蠕蠕)이 우전(于闐)을 약탈(掠奪)하니, 우전(于闐)은 걱정되어 사신(使臣)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 서방(西方)의 여러 나라들이, 지금 모두 이미 ’연연(蠕蠕)=유연(柔然)‘에 복종(服從)하고 있다. 종(奴 : 奴隸)으로 대국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당시(當時)에 “연연(蠕蠕)=유연(柔然)”의 영토(領土)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는 내용(內容)으로,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신강성(新疆省)의 서(西)쪽 일부까지를 영역(領域)으로 확장(擴張)하고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이런 “연연(蠕蠕)=유연(柔然)”과 혼맥(婚脈)으로 결속(結束)되어 주변국(周邊國)들을 공포(恐怖)에 떨게 했다면 : ’고구려(高駒驪)와 연연(蠕蠕)의 땅‘은 연이어져 있어(連接) 언제든지 출정(出征)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북위(北魏)가 낄 자리가 없다. 곧 북위(北魏)는 고구려(高駒驪)의 다름 이름일 뿐이었다”는 뜻이다.
(17) 北史 朱居國
《朱居國,在于闐西。其人山居,有麥,多林果。咸事佛,語與于闐相類,役屬嚈噠。: 주거국(朱居國)은, 우전(于闐)의 서(西)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산에서 살며, 맥(麥)과 많은 임과林果)가 있다. 부처를 모시는 일을 다하며, 말은 우전(于闐)과 함께 상류(相類)이며, 엽달(嚈噠)에게 속해 노역(奴役)을 감당한다》
(18) 北史 渴槃陁國
《渴槃陁國在葱嶺東,朱駒波西.河經其國東北流,有高山,夏積霜雪.亦事佛道,附於嚈噠 : 갈반타국(渴槃陁國)은 총령(葱嶺)의 동(東)쪽에 있는데, 주구파(朱駒波)의 서(西)쪽으로, 하(河)가 그 나라의 동북(東北)쪽을 지나가며, 높은 산이 있는데, 여름에도 서리와 눈이 쌓인다. 역시 부처를 모시는데, 엽달(嚈噠)에 기대어 산다》
(19) 北史 缽和國
《缽和國,在渴槃陁西。其土尤寒,人畜同居,穴地而處。又有大雪山,望若銀峰。其人唯食餅麨,飲麥酒,服氈裘。有二道,一道西行向嚈噠,一道西南趣烏萇。亦為嚈噠所統。발화국(缽和國)은, 갈반타(渴槃陁)의 서(西)쪽에 있다. 그 땅은 매우 추워, 가축과 함께 사는데, 구덩이에서 산다. 또 대설산(大雪山)이 있어 봉우리가 은빛으로 보인다. 두 길이 있는데, 그 한 개 길은 서(西)쪽으로 엽달(嚈噠)을 향했고, 한 개의 길은 서남(西南)쪽 오장(烏萇)으로 달릴 수 있다. 또한 엽달(嚈噠)에게 병합되었다.》
➨ 위의 ’(17)+(18)+(19)‘의 나라들 역시 모두가 ’엽달(嚈噠)‘에게 병합(倂合) 또는 합병(合倂), 기대어 사는 나라들이라고 하였다. ’엽달(嚈噠)‘은 또한 ’연연(蠕蠕)=유연(柔然)‘과 언어(言語)도 똑같았고, 함께 혼인(婚姻)하며 살아가는 같은 무리였다. ’연연(蠕蠕)=유연(柔然)‘과 동류(同類)의 부족(部族)이었다는 뜻이다.
그곳은 바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요충지(要衝地) 땅으로 카스피해와 아랄해의 남쪽 땅을 중심으로 사방(四方)으로 영토(領土) 확장(擴張)을 꾀했다는 것이다.
(20) 조선사(朝鮮史) : 海東繹史 6권 세기(世紀) 6 / 고구려(高句麗) 1 : 《3년에 [長壽王 67年, 468] ‘고구려에서 몰래 연연(蠕蠕)과 더불어서 모의해 지두간(地豆干)을 취하여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다. 거란(契丹)에서는 그들의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부락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內附)하였다. [後魏書]
위나라 효명제(孝明帝) 희평(煕平) 원년(元年)에 [文咨王 25年, 516] 유유(蠕蠕)의 임금 배노(配奴)가 용병을 잘하여 서(西)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강역이 넓어져서 동쪽으로는 옛 조선 땅의 서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서 한해(瀚海)에까지 다달았고, 남쪽으로는 대적(大磧)에까지 이르렀다. [文獻通考]》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 연연(蠕蠕)의 동계(東界) 곧 고구려(高駒驪)의 서계(西界) 사이의 ’탁발씨(拓拔氏)‘ 위(魏)나라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➊ “아세아(亞細亞)【우랄산맥(Ural, 山脈) 동(東)쪽 수만리(數萬里) 초원지대(草原地帶)】초원지대(草原地帶)의 패자(霸者)”가 “고구려(高駒驪)였다”는 말인가?
➋ 아니면 : “구라파(歐羅巴)로부터 아세아(亞細亞) 수만리(數萬里) 북방지대(北方地帶) 패자(霸者)”는 “연연(蠕蠕 : 柔然)과 고구려(高駒驪)였다”는 말인가?
○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와 한국사(韓國史)”는 같은 것 같지만 실제(實際)로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사(韓國史)는 조선사(朝鮮史) 뒤(後)【에필로그[epilogue]라고 하면 어떨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즉 “한국사(韓國史)”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냉전(冷戰)의 산물(産物)인 신생(新生)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歷史)』【현대사(現代史)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치욕(恥辱)의 역사(歷史), 그대로가 지금도 진행(進行) 중이다.】를 말하는 것이다.
➨➨ 엄밀(嚴密)하게 분류(分類)해 보면 : 〈자주(自主), 자립(自立)의 독립국(獨立國)이 아닌 열강(列强)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제2의 식민지(植民地) 국가(國家)‘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제약(制約), 보이지 않는 많은 제약(制約)으로 인하여 『자주(自主)와 자립(自立)‘이 막혀버린 이름만 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이기 때문이다.』〉
자주(自主)【남의 보호(保護)나 간섭(干涉)을 받지 않고 독립(獨立)하여 행(行)함. 즉 자기(自己)에 관(關)한 일은 자기(自己)의 힘으로 다스림】와 자립(自立)【 얽매임이 없이 스스로의 지위(地位)에 서는 것】과 자위(自衛)【몸이나 나라, 일터 따위를 스스로 막아 지킴】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군대(軍隊)의 지위(地位)에 관한 것이다.
특히 자위(自衛)에 관한 일은, “뒈지고 얻어맞고 있으면서도 미국(美國)이란 나라의 사인[Sign]이 없으면, 그토록 좋아하는 어퍼컷[Uppercut] 하나도 날릴 수 없다”는 점이다.” 【윤석열의 어퍼컷[Uppercut]은, 자기부정(自己否定)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실(實) 상황(狀況)에서 날리지도 못하는 어퍼컷[Uppercut]은, 법전(法典)에 있는 사문화(死文化)된 법조문(法條文)과 같다. 그것을 무엇에 쓸 수 있나? 분노(憤怒)의 표현(表現)일 뿐이다.】
➊ 대한민국(大韓民國), 2023년 지금도, 비상사태(非常事態)나 외침(外侵)을 당했을 때의 자위(自衛)를 위한 전시작전권(戰時作戰權)이 없다. 또 평화시(平和時)에도 전방(前方)의 많은 부대(部隊)에 관한 작전권(作戰權)도 제한(制限)되어 있으며,
➋ 남북(南北)의 통일(統一)에 관한 것 역시(亦是) 천조국(天朝國)의 사인[Sign]이 없으면 할 일이 없다.
➌ 북한(北韓) 또는 외침(外侵)에 의한 핵(核) 공격(攻擊)을 받더라도 천조국(天朝國)의 사인[Sign]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無能力)한 나라다.
➍ 천조국(天朝國)의 치밀(緻密)한 계획(計劃)과 사전포석(事前布石) 덕분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은 허울 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체제(體制)를 갖추고 있지만 : ’자주(自主)와 자립(自立)과 자위(自衛)‘와는 전혀 다른 국가체제(國家體制)를 갖고 있어, 미합중국(美合衆國)의 50개 주(州) 중 1개 주(州) 정도만도 못한 지위(地位)를 갖고 있을 뿐이다. 아니라고 당당(堂堂)하게 말할 수 있는 자(者) 있는가?
➎ 그래서 일부(一部) 사람들이나 일부(一部) 국가(國家)에서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미국(美國) 식민국(植民國)‘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게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오늘의 현실(現實)이다.〉그래서 감지덕지(感之德之)【이를 감사(感謝)하게 생각하고 이를 덕(德)으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분에 넘치는 듯싶어 대단히 고맙게 여기는 일】할 건가?
2023년 05월 31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