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해남군 계곡면 주민들과 함께 할 땐 이보다 행복한 일이 없었다. 순찰을 하다가 농작물이 부지런히 자라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처럼 즐거웠다. 이런 자연의 시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했었다. 그는 옥천면 경찰서를 걸쳐 해남경찰서에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줄곧 광주에서 공직생활을 하였고 몇 해 전에 고속도로 순찰대 부대장으로 있다가 처음으로 지방으로 옮기게 됐다. 그의 고향은 함평군 나산면이다. 어릴 때 광주로 일찍 올라갔지만, 시골에 대한 전원적 풍경을 동경했고 그 속에서 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 희망이 이미 이루어 진 셈이다. 그동안 아이들의 교육과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살아오다 보니 뒤돌아 볼 시간이 없었다. 인정 많은 해남 사람들과 깨끗한 자연 환경 속에서 다시 새롭게 꿈을 펼쳐나갈 생각에 감개무량하단다. 그는 어려운 살림에도 조선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나왔다. 어머니가 양동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의무경찰 경력으로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경찰공무원을 하고 있단다. 아내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같은 과에서 만나게 됐다. 군 생활과 졸업 후 시험공부까지 8년 열애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됐단다.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 서로 여행을 좋아해 가고 싶은 데가 달라 의견 조정을 하면서 약간 싸우는 적은 있었을 뿐이었다. 장현준 씨는 1남 1녀를 두었다. 교육의 첫 번째의 원칙은 "따뜻한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미는 자가 되라.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끊임없이 해야 하나 안다고 잘난 체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며 "강직한 신념을 좋으나 그것은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그 신념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라고 직접으로 이 원칙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품성에서 깨닫게 했다. 아들은 고려대 보건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딸은 공주사범대 졸업생으로서 이번에 임용고시를 치렀다. 해남이 마치 고향에 오는 것처럼 포근하다. 처음 계곡치안센터에 있을 때에도 온화한 그의 미소는 모든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농촌 일을 거들어 준다. 친부모 형제자매처럼 사는 것이 그의 천성이다. 하늘이 주는 마음 그대로 실천하면 즐거움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장현준 경위를 달고 해남에 온지 5년 만에 지난 23일 경감으로 특별 승진했다. 해남경찰서 청문감사관실에서 3년 동안 일한 결과다. 전국16개 지방경찰청 청염도 평가에서 전남경찰청이 1등을 했다. 작년도에서 전남이 꼴찌를 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해남경찰서에서 전국에서 청렴도평가에서 1위를 하는 셈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전국에서 하나인 특별승진을 받아냈다. 권영만 해남경찰서장은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 경감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다. 또한 경찰서 내에서 호의적 관계가 뛰어나다. 경감으로 승진하는 데에는 당연한 귀결이다”고 밝혔다. 2014년 청문감사운영실적 우수성에 대한 내용은 이렇다. 경찰관 스스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프로그램과 안정된 시스템이다. 직원들 상대로 청렴교육은 물론 청렴동아리를 만들어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스스로 마음 수련을 꾸준히 했었다. 또한 자체인지 처분으로 적극적 감찰활동을 통해 미리 예방적 차원을 중요시했다. 특히 올 상반기에 인권영화 ‘손가락 한마디의 변명’을 자체 제작했고 이에 대한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해남경찰서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바뀌게 되는 데에는 홍보를 통한 인권 비위 예방이다. 자체 노력에 의한 평가가 전국에 1위에 올라서게 되는 데에는 어느 한사람 때문도 아니다. 직원 모두가 하나로 집중 될 때 그 뜻은 창대하게 이루어 진 것이라고 했다. 장현준 경감은 개인의 승진이 아니라 한다. 해남경찰서의 승진이다. 장 경감은 얼마 전에 딸이 임용고시를 보았는데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2015년 새해에는 해남이 사건 사고가 없기를, 직원들 각각 건강하기를 소원한다. 경감은 전남권에서 발령을 한다. 아쉽지만 해남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해남을 잊지 않겠다. 아니 다시 돌아와서 노년을 대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