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는 우리 둘이 비익새가 되어 살고지고
땅위에서는 우리 둘이 연리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천지는 영원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땐가 마지막 날이 오는데
그러나 이 슬픈 사랑의 한스러움은 길이길이 다할 날이 없으리.‘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쓴 것이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인 중에 하나로 꼽힌다. 이 이야기가 나왔을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저는 백낙천의 ‘장한가’를 전부 암송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다른 여자와 같은 화대로 저를 부를 수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시였다고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연리지는 과거 문헌상에도 상서로운 나무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내물왕 7년(362) 시조묘의 나무와 고구려 양원왕 2년(546)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지가 됐다고 썼고, ‘고려사’에는 광종 24년(973), 성종 6년(987)에 연리지 출현을 기록할 정도였다. 홍기응 가옥 외에도 우리나라 몇몇 곳에 연리지나 연리목이 있지만, 집 안에 이런 나무가 있거나 단풍나무가 연리지로 변한 것은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놓아 만든 구멍이 있는데, 이는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을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보안경‘이다. 이종호 제공

이 집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또 하나 있다. 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놓아 만든 구멍이 그것이다. 이 구멍의 용도는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을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현관문에 설치하는 ‘보안경’이다.
우리 선조들은 강도가 달려와도 갈짓자(之)만 걸었고 이방인이 밖에서 ‘이리 오거라’라는 소리에 늦게 문을 열었다고 투덜댈 정도로 양반의 체통을 중요했다. 또 다른 사람의 개인 사생활만은 철저하게 보호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안경이란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당대에 신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와 세태가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투박하던 시대에 남보다 앞선 아이디어를 내고 살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이야기다.
더불어 집 뒤에 약 0.5킬로와트 정도의 태양전지 판이 있다. 최첨단 현대문물 기기엔 태양전지로 전기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보면 선조의 앞선 생각이 후손에게도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옥에 대해 약간 설명하려고 한다. 우선 ‘호’와 ‘채’의 개념부터 정리하겠다. 호는 일정 단위 면적 안에 집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합한 개념이다. 안채, 사랑채, 부엌 등등을 합한 것이 호가 되는 것이다. 반면 채는 단독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말한다. 한옥의 경우 집 하나에 여러 채의 건축물이 들어서므로 집 전체를 호로 부르고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채라 부른다.
건물의 구조를 설명할 때 3량가, 또는 5량가, 7량가라고 하는데 이는 지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설명이다. 3량가는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간단한 구조다.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종도리(서까래가 받치는 횡부재)를 설치하고 지붕의 앞뒤 양쪽 가장자리에 두 열의 처마도리(외벽의 상부에 있으며 서까래 등을 받치는 보)를 두어 세 열의 도리가 서까래를 받치게 만든 방식이다. 일반적인 일반적인 양반 건물은 5량가이며, 원형기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게 기본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65호로 지정된 ‘홍기헌 가옥‘의 모습. 위쪽 사랑채는 정면 4칸의 전후좌우 4방향 퇴를 꾸몄고, 대청을 한쪽으로 시설한 남도방식의 건축으로 지붕은 합각지붕이며, 기단이 높은 편이다. 아래쪽 문간채는 오른쪽으로부터 대문간 2칸, 광, 헛간, 잿간으로 이뤄졌고, 남쪽 끝의 지붕구조가 특이하다. 다소 번거로운 초가지붕을 계속 유지했다. 이종호 제공

중요민속자료 제165호로 지정된 홍기헌 가옥은 활 모양으로 휘어진 샛길을 따라 진입하므로 집 안이 밖으로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건물은 서향이며 전체적으로 직선을 축으로 배치됐다. 중심 맨 안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앞쪽에 북쪽으로 곳간채가 있으며, 안채의 중앙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있다. 사랑 마당 앞에 대문채를 두어서 안마당으로 출입하려면 사랑채의 남쪽 측면을 지나게 된다. 사랑공간과 안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나 사랑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구분되도록 배치돼 있다.
1790년에 건설돼 도래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사랑채는 정면 4칸의 전후좌우 4방향 퇴를 꾸몄으며 대청을 한쪽으로 시설한 남도방식의 건축으로 지붕은 합각지붕이다. 사랑채는 당시에 호화주택으로 법에 위반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단을 높이 쌓은 것 말고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인데, 무엇이 호화주택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면이 있다. 다행히도 이런 이야기에 휘둘려 집을 고치지 않고 옛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문간채는 20세기에 지어진 5칸 겹집의 초가다. 오른쪽으로부터 대문간 2칸, 광, 헛간, 잿간으로 이뤄졌는데 남쪽 끝의 지붕구조가 특이하다. 마을의 다른 집들은 대부분 새마을 사업 때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지붕 또는 아예 벽돌집으로 다시 지었다. 이런 시절을 거치면서도 다소 번거로운 초가지붕을 계속 유지했다. 이 집도 장독대를 담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어 대가집에서 먹거리를 중시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홍기창 가옥‘은 안채만 남아 있다. 비교적 큰 규모라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각 방 앞에는 툇마루로 외부와 쉽게 연결된다. 안채는 특별히 높은 기둥 2개가 있고, 7량가로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왼쪽 아래)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이종호 제공

전라남도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된 홍기창 가옥은 1918년에 건축됐는데 원래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갖췄으나 현재는 안채만 남았다. 평면 구성과 건물 구조가 건실해 당시 주택 모양을 살필 수 있다. 안채는 비교적 규모가 커서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했고, 각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둬 외부와 편리하게 연결됐다. 안채는 서향으로 배치됐고, 앞에 안마당이 있으며, 안마당 남쪽에 최근에 지은 아래채가 있다. 담장은 사랑채 터와 안채 뒤까지 크게 막아서 경계로 삼고 있으며, 예전의 중문을 지금의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2고주(高柱, 여러 기둥 중에 특별히 높은 기둥), 7량가다.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사용한 합각지붕이다. 원형기둥은 일반 민가에서 보기 드문데, 이 집의 경우 영광바닷물에 3년간 담궜던 비자나무로 만들었다. 대청마루는 검은빛을 띄는 먹감나무를 말 오줌에 2년간 담궜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부와 권리를 과시하려던 당시 전남의 부농주거의 특성이 배어 있는 건물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선정한 시민문화유산 제2호인 ‘나주도래마을옛집‘의 모습. 안채와 문간채, 별채로 구성됐고,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흡수되면서 한 채의 복합형 살림집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종호 제공

도래마을에는 남다른 우리 유산인 ‘나주도래마을옛집’이 있다. 이 집은 시민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된 건물인데, 시민유산은 국가에서 미처 지정하지 못한 비지정 문화재를 직접 보전하려는 운동으로 추진됐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건설된 대지 1051㎡, 건평 157.78m² 규모의 나주도래마을옛집을 시민유산으로 지정하고 관리에 들어갔다. 시민유산으로 선정된 이 한옥은 안채와 문간채, 별채로 구성돼 있는데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흡수되면서 한 채의 복합형 살림집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는 1920년 전 조선시대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으로 근대화 과정 중에 요구되는 효율적 공간 활용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건물 자체의 규모는 작지만 지정문화재에서 느낄 수 없는 아기자기하고 친근감이 넘치는 시골집과 유사한 한옥이므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6년에는 이 집을 문화유산기금 1억 원으로 매입했다. 이후 국무총리산하 복권위원회 복권기금 6억 원을 들여 안채와 대문채를 원형으로 복원했으며 다목적공간으로 별당채를 신축했다. 별당채는 현대시설도 도입한 한식으로 내부에 화장실, 샤워, 부엌을 갖추고 있다. 이 집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에 이어 시민문화유산 제2호가 되었는데, 내셔널트러스트 3호로 지정된 곳은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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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mystery123@korea.com
참고문헌:
「나주도래마을 한옥의 건축형식에 관한 연구」, 류성룡,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9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눌와, 2002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한필원, 북로드, 2007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과학삼국사기』, 이종호, 동아시아, 2011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첫댓글 어느 시절이고 선구자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듯...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