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 17,1-9
기도의 목적
오늘은 주님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 변모 축일은 기도에 대한 예시입니다.
기도의 장소는 이스라엘 전통상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모세는 진리이고 엘리야는 은총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곧 하느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고,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미사 때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변모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모하기 위함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악령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마태 17,17)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이 세상을 참아내고 치유하기 위한 힘을 얻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의 죽음입니다.
미워하는 내가 죽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안에 그 미움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국 나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오늘 복음이 이 기도의 올바른 목적을 말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잘못 알고 헛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인도 수도사가 18년이 걸려서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랑처럼 떠드는 제자에게 스승은 묻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갠지스강 건너는 뱃삯)를 벌었네.”
기도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 자신이 죽었는지, 얼마나 더 그리스도로 변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워룸(2015)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돈을 횡령하고 외도하려고 하며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미워 옆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자 옆집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기도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워룸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이 하는 회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할머니는 집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남편과 싸우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과 싸워 하느님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라고 합니다.
남편이 어느 날 옷장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적힌 것을 보고 아내가 이미 자신의 외도사실까지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아내와 딸에게 사과합니다.
기도로 싸워야 할 대상은 은총의 가치를 모르는 나 자신입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 라면 하나도 부모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부모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불만 가득했던 내가 죽고 부모님의 뜻을 따라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계신다면 나도 기도할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의 가치를 알고 순종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은총을 많이 받았지만, 그 은총의 값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자에 빠진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게 만듭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눈도 뽑힙니다.
그제야 삼손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이 당신 눈을 빼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자 이제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미움을 함께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 미움도 죽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셔야 용서와 사랑이 성취됩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모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 17,1-9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극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던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매일 마음속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묵직한 고민 거리들이 열 가지 정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느 날 세수를 하던 중,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좀비 한 마리가 거울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나 정신이 빠져나가 버린, 그저 몸만 흐느적 흐느적 거리며 돌아다니는 영락없는 좀비였습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도생활 연륜도 30년, 40년인데, 계획대로라면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하고 당당한 얼굴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뾰쪽하고 모난 곳은 깎이고, 움푹 패인 곳은 잘 메꾸어져,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로 변모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니, 그때 느낀 참담함이 엄청났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한번 변화되어 보고자 그토록 발버둥을 쳐왔습니다만, 그 변화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님 변모 축일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봐야겠습니다.
보다 긍정적인 태도에로의 변화, 보다 인간적이면서도 보다 영적인 삶에로의 변화, 보다 거룩한 삶,
천상적 삶에로의 변화...
오늘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단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되십니다.
얼굴과 몸 전체가 눈부실 정도로 광채로 빛났습니다.
주님 얼굴의 거룩한 변모는 조만간 맞이하게될 메시아의 운명을 넌지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대사건입니다.
성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속제 제물이자 희생양이 되셔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으로 내려가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정복하십니다.
그리고 참혹했던 주님의 얼굴은 당신의 부활로 인해 더없이 찬란하고 빛나는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과 영광의 삶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다양한 죄속에서 살아가고 이런저런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지만,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삶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23. 8. 6.)(마태 17,1-9)
<하느님 나라 체험>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태 17,1-6).”
1)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목격했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특별한 체험을 한 장소가
‘산’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 들판, 바다, 산, 어디든지 장소가 아니라 ‘체험’ 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인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요한 20,24-29).
또 우리 교회가 본격적으로 교회로 창립된 계기가 된 사건인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도 ‘집’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사도 2,1-4).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표현을 조금 바꿔서,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체험이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 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믿음이 먼저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신 일은,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음은 있지만 아직 용기와 힘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일이 많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체험을 통해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경험해도 그저 신기해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체험이 없어도 믿음이 유지되고, 어떤 체험을 한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시고, 다른 아홉 명은 기다리게 하신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 명을 소외시키신 것일까? 차별하신 것일까?
또는 그 세 제자만 편애하신 것일까?
그것은 아니고, 그 일은 “체험을 증언하는 이들의 믿음과 그 증언을 믿는 이들의 믿음은 같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로 해석됩니다.
<그 세 제자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중요한 일에는 늘 그들을 데리고 가신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세 명을 편애하거나 특별대우하신 것은 아니고, 다른 아홉 명을 멀리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사도들의 믿음과 그들의 증언을 믿고 신앙인이 된 우리의 믿음은 ‘같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신앙인이 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인도를 받아서 나중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의 믿음도 ‘같은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의 증언 외에도,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스테파노의 증언이 더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7,55-56).”
스테파노의 체험과 증언은 순교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스테파노는 바로 그 모습을 보았고 증언했습니다.
그 체험 덕분에 스테파노는 자신이 이제 곧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순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이 없다가 믿게 된 일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주님의 응답’을 얻은 일입니다.>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나라 체험은, 신앙여정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는 큰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어떤 놀라운 일을 체험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얻는 크고 작은 기쁨들,
또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다는 느낌들, 그것들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여정은 그 자체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내가 나 혼자서 지고 가는 멍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고, 이웃들이 함께 나누어서 지고 갑니다.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신앙생활이 축복이며 은총이라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가 힘들어할 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