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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3~176)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73>후스 “學歷보다 學力” … 26세 무학의 작가 선충원을 교수로 |제174호| 2010년 7월 11일
▲①1973년 초 대륙을 방문한 우젠슝·위안자류 부부를 저우언라이 총리가 베이징에서 맞이하고 있다. 당시 우는 미국 물리학회 회장이었다. ②1935년 봄, 베이징 중산공원의 선충원. 선충원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김명호 제공
1928년 봄 상하이의 명문 중국공학에 학생소요가 발생했다. 이사회는 전 베이징대 교장 차이위안페이를 교장으로 영입해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학생들은 “도덕과 학문은 나무랄 데가 없는 분이지만 겸직이 많은 것이 흠이다. 학교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 할까 봐 두렵다”며 거절했다. 학교 측은 졸업생 중에서 교장감을 물색했다. 후스(胡適) 외에는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후스는 무지와 무능으로 무장된 이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기상천외한 발상을 내놓는 것을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조용히 있으며 봉급이나 축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취임식 날 “권한을 쥐고 있다 보면 개인의 지식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쉽다. 남들이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한다며 함부로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은 강도보다 더 위험하다”며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선언했다. 후가 생각하는 ‘無爲而治’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 두면 일이 저절로 굴러간다”는 전통적 의미의 ‘無爲而治’가 아니었다. 각자가 할 일을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단, 교수 임용과 교육은 직접 챙겼다.
후의 교육은 문리(文理)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학생들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조기 전문 교육은 지식의 폭을 좁게 만든다. 말하는 기계보다는 사고와 이성의 노예를 양성해야 한다”며 이과에 뜻을 둔 학생들에게 문학과 역사를 호되게 교육시켰다. 인문학 전공자들은 자연과학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의 손자며느리 우젠슝(吳健雄)은 세계적인 여성 핵물리학자였지만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다. 사람들이 의아해 할 때마다 한결같이 “학창시절 후스가 교장으로 온 뒤부터 문학과 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대답을 했다. 후는 우에게 작문 점수 100점을 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일기에 “우젠슝이 100점을 맞은 것은 나에겐 평생을 두고 즐거워해도 좋을 선물이다”고 적었다. 우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에게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다.
후는 교수들의 학력(學歷)보다 학력(學力)을 훨씬 중요하게 여겼다. 학력(學歷)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다 보면 가짜 학력이 판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실릴 만한 인사를 단행했다. 1929년 8월, 26세의 청년작가 선충원(沈從文)을 교수로 임용하자 학교 안팎이 술렁거렸다. 선은 시골 사숙에 몇 년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학생들보다 학력(學歷)이 낮고 단 한 편의 연구 논문도 없었다. 첫 수업은 가관이었다. 며칠 동안 준비한 것을 10여 분 만에 다 떠들어 버리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끝나는 시간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칠판에 “첫 수업이라 준비를 많이 했다. 뭘 했는지 다 까먹었다. 여학생들이 너무 많다. 나는 너희들이 무섭다”고 썼다. 얘기를 들은 후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교장실을 찾아왔다. 편지를 한 묶음 내밀며 읽어 보라고 했다. 선충원에게 받은 편지들이었다. 후는 침착하게 편지를 다 읽었다. 구구절절 명문장이었다. “너와 선충원은 모두 미혼이다. 총각이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연애편지 보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답신을 보내고 안 보내는 것은 네 자유지만 이 편지들을 절대 버리지는 마라”며 여학생을 달랬다. 증국번(曾國藩)의 가서(家書), 루쉰(魯迅)의 양지서(兩地書)와 함께 중국의 3대 서간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종문가서(從文家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후는 20개월간 교장 노릇을 했다. 학교를 떠날 땐 학생 수가 네 배로 늘어나 있었다. <174>육군 상사 출신 선충원(沈從文) ‘京派문학 영수’로 떠오르다 |제175호| 2010년 7월 18일
▲신중국 수립 후 선충원은 ‘분홍색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 문단과 베이징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대륙과 대만 양쪽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였다. 선충원은 1979년 11월 6일, 30년 만에 중국 문학예술공작자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김명호 제공
선충원(沈從文)은 1917년 15살 때 군대에 들어갔다. 정규군과 비적 중간쯤 되는 꼬마 군벌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지휘관은 고적과 고서화를 좋아했다. 제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수장품의 양과 질이 굉장했다. 글을 아는 선충원에게 분류와 관리를 맡겼다. 덕분에 5년간 군인 노릇을 하면서 원 없이 눈 호강을 했다.
못볼 꼴도 많이 봤다. 죽고 죽이는 일을 수없이 목도했다. 아귀(餓鬼)들의 다툼과 다를 바 없었지만 가족과 자녀가 있는 멀쩡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있었다. 인간 세상은 참으로 복잡했다.
상무인서관에서 나온 찰스 디킨스 전집을 읽었다. 당장 써도 그만큼은 쓸 것 같았다. 1922년 봄 육군 상사 선충원은 군복을 벗었다. 석 달치 봉급 27원을 받았다. 친구와 친척집을 다니며 겨우 10원을 빌렸다. 집안 구석에 굴러다니던 성경(聖經)과 사기(史記)를 챙겨들고 작가가 되겠다며 고향을 떠났다. 창샤(長沙), 한커우(漢口), 정저우(鄭州), 쉬저우(徐州), 톈진(天津)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7원60전이 남아 있었다. 역전 여관 숙박부에 ‘20歲, 學生, 湖南省 鳳凰縣人’이라고 적었지만 대학생이 되고자 했던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당시 시행되던 중국어 표기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시골 청년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다. 낮에는 대학 주변을 맴돌고 해가 지면 석탄 창고를 찾아갔다.
고도 베이징은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거리에 문물들이 널려 있었다. 온종일 책방에 서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프고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하루하루가 황홀했다. 고향에 내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24년 말, 선충원은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그동안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보냈지만 바다에 진흙 던지기였다. 2년간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기적이었다. 글로만 접했던 위다푸(郁達夫)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도쿄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소설 한 편으로 명성을 얻은 베이징대학 통계학과 강사 위다푸는 낯선 청년의 편지를 받고 한 밤을 뒤척거렸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발신자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홑껍데기에 피골이 상접한 청년을 만난 위다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입고 온 솜옷을 벗어 입히고 무조건 끌고 나왔다. 방안에 온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선충원은 아사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우선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위다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먹어대는 선충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밥값 1원70전이 나오자 5원을 냈다. 거스름돈을 선충원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놓고 그냥 나와 버렸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이날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했다.
위다푸는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신보부간(晨報副刊)의 새로운 편집인으로 내정된 쉬즈모(徐志摩)에게 선충원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총명해 보이는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쉬즈모가 영국에서 귀국하기 직전이었다.
‘신보부간’은 베이징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던 ‘신보’의 문예섹션이었다. 지난 신문들을 쭉 훑어본 쉬즈모는 짜증이 났다. 서슴지 않고 “변비 걸린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만들어낸 것 투성이였다. 필자도 허구한 날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채택되지 않았던 원고들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라며 위다푸의 혜안에 감탄했다.
쉬즈모는 선충원의 글을 연달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자신의 감상문을 함께 싣기도 했다. 선충원은 하루아침에 후스(胡適), 량치차오(梁啓超), 류하이수(劉海粟), 원이둬(聞一多)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후 10여 년간 80권의 저서를 펴냈다. 베이징을 대표하는 ‘경파(京派)문학의 영수’라는 명칭이 씌워졌다.
중국 신문학운동의 선구자들은 현대 서구사상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체계적이고 정교한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선충원은 이들과 달랐다. 후스처럼 서구인들의 세계관이나 방법론으로 중국 문화를 해석하지 않았고, 저우줘런(周作人)처럼 중국 구문화의 전통 안에 자신만의 정원을 건설하지도 않았다. 루쉰(魯迅)과 궈모뤄(郭沫若)와도 달랐다. 전통문화의 폐해를 폭로하거나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으로 중국 사회를 관찰하려 하지 않았다. 대단한 사상이나 학설이 아닌 전통적인 시골사람의 눈으로 중국의 인간과 자연을 노래했다. <175>옌안의 홍색공주, 장칭·예췬과 악연을 맺다 |제176호| 2010년 7월 25일
◀중공 지도자들은 소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학 중인 쑨웨이스(뒷줄 오른쪽 첫째)를 챙겼다.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공 5대 서기의 한 사람이며 공청(共靑)의 창시자인 런비스(任弼時·왼쪽 첫째)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줄 오른쪽 첫째는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 김명호 제공
1937년 겨울 우한(武漢)의 팔로군(八路軍) 연락사무소에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찾아왔다. 요구가 당돌했다. “옌안(延安)으로 가겠으니 빨리 안내해라.” 연락사무소 측은 나이가 어리고 믿을 만한 조직의 소개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날만 밝으면 찾아왔다. 한결같은 대답을 듣곤 문 앞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일쑤였다. 하루는 한참 울고 있는 여자애 옆을 지나치던 중년의 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 아이의 입은 자물통이었다. 이름을 물어도, 부모가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조건 공산당 중앙이 있는 옌안으로 보내 달라고만 했다. 신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웨이스(維世)가 아니냐?” 여자애의 눈이 반짝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알죠?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10년 전 장제스에게 요참(腰斬)당한 쑨빙원(孫炳文)의 딸을 찾은 저우언라이는 부인을 불렀다. 헐레벌떡 달려온 덩잉차오(鄧潁超)는 쑨웨이스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부터 해댔다. 옌안까지 직접 데리고 가 항일군정대학(抗大)에 입학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옌안에 도착해 항대에 입학한 리윈허(李雲鶴:후일의 江靑)는 쑨을 보자 당황했다.
쑨빙원은 신해혁명 직후 민국일보(民國日報)를 창간한 언론인이었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 즉위 기도를 연일 비판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을 벌인 교육자이기도 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 간의 전쟁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22년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카를 마르크스의 고향에 가겠다며 고향 친구 주더(朱德)와 함께 독일 유학을 떠난 이상주의자였다. 저우언라이를 만나는 바람에 공산당에 입당했고 귀국 후에는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어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과 북벌 시기 국민혁명군 후근사령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27년 4월 국공합작을 파기시키고 공산당 숙청에 나선 장제스는 쑨빙원이 체포되자 직접 찾아가 고관후록(高官厚祿)을 약속하며 회유할 정도로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거절당하자 요참을 지시했다. 쑨빙원은 체포 4일 만에 상하이의 룽화(龍華) 감옥에서 몸이 두 동강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쑨웨이스가 여섯 살 때였다.
쑨웨이스의 모친은 어린 딸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지하공작에 투신했다. 비밀 문건의 소각과 발송을 도맡아 하던 쑨은 열네 살 되는 해에 공산당 지하조직이 운영하던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일곱 살 위였던 리윈허도 같은 극단에 있었다. 쑨은 리를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지만 “리윈허는 행실에 의심 가는 부분이 많다.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는 모친의 주의를 받은 다음부터 리를 멀리했다. 리윈허도 상처받기 쉬운 나이였다. 별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녀를 볼 때마다 수치와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쑨웨이스는 옌안의 유일한 홍색공주(紅色公主)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항일군정대학을 마치고 중앙당교와 마르크스레닌학원을 다니며 정통파 당원의 길을 걸었다. 저우언라이 부부는 쑨의 모친에게 “열사의 혈육을 우리 딸로 삼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혁명가 유자녀와 지하공작자의 자녀들을 무수히 수양아들과 수양딸로 삼았지만 쑨은 이들과 경우가 틀렸다. 1939년 소련에 가겠다며 마오쩌둥을 찾아가 단번에 허락을 받아 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쑨을 직접 소련까지 데리고 갔다.
모스크바에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진산(金山)과 함께 쑨웨이스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린뱌오(林彪)가 총상 치료와 요양을 위해 신혼의 부인 장메이(張梅)와 함께 와 있었다.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청년장군 린뱌오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틈만 나면 몰려가 무용담을 들으려 했다. 쑨웨이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린뱌오는 쑨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거렸다. 유학생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도 전원이 참석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물었다. 불참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몸을 움직였다. 쑨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나와 버렸고 중간에 자리를 뜨면 린뱌오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리를 떴다. 3년을 그랬다. 귀국하기 전날은 부인과 함께 쑨이 다니던 희극학원의 기숙사를 찾아왔다. 부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하더니 혼자 남은 쑨에게 “귀국 즉시 이혼하고 기다리겠다. 너도 빨리 와서 나랑 결혼하자”고 했다. 복잡한 사람인지 단순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엉뚱한 말을 남기고 린뱌오는 돌아갔다.
1946년 가을 쑨웨이스는 7년간에 걸친 유학 생활을 마쳤다. 귀국 도중 하얼빈에 주둔하던 동북민주연군사령관 린뱌오를 찾아갔다. 장메이와 이혼하고 예췬(葉群)과 결혼한 린뱌오는 쑨이 누구인지를 기억도 못 했다. 예췬은 장메이와 달랐다. 눈에 서릿발이 돋았다. (계속) <176>붉은 담장이 낳은 예술가, 47세에 감옥서 ‘요절’ |제177호| 2010년 8월 1일
▲1950년 8월 웨쥐(越劇) 판파이(范派)예술의 창시자 판루이쥐안(范瑞娟·앞줄 오른쪽 둘째), 국가 1급 연기자 푸취안샹(傅全向·앞줄 왼쪽 둘째)과 함께 중난하이로 저우언라이를 방문한 쑨웨이스(앞줄 왼쪽 첫째). ‘의용군 행진곡’ 작사자 톈한(田漢·뒷줄 왼쪽 둘째)과 루쉰(魯迅) 부인 쉬광핑(許廣平·뒷줄 오른쪽 첫째)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제공
중공 1세대 지도자들의 딸 중에는 재녀(才女)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았다. 덩샤오핑과 뤄루이칭(羅瑞卿)의 딸은 부친의 회고록을 펴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마지막 보황파(保皇派) 타오주(陶鑄) 딸 스량(斯亮)은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건국 공신 예젠잉(葉劍英)의 둘째 딸도 중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은 한 차례로 끝났다. 전문성과 예술성에 한계가 있었다.
쑨웨이스는 이들과 달랐다. 영화와 무대예술을 가장 중요한 선전도구로 여겼던 스탈린 시대에 모스크바 희극학원에서 희극과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문혁 시절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붉은 담장이 배출한 유일한 전문가이자 진정한 예술가였다.
1946년 가을 옌안으로 돌아온 쑨웨이스를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연극애호가 장칭이었다. “너는 저우언라이의 딸이고 나는 마오쩌둥의 부인이다. 우리를 흠집 내려는 사람에게 같이 대응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쑨은 “전쟁에 승리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며 묵살했다.
◀쑨웨이스는 자유주의자 기질이 강한 예술인들, 특히 2류당 사람들과 가까웠다. 신중국 선포 직전인 49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딩충(丁聰)과 함께한 쑨웨이스.
쑨웨이스는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하고 해방군 점령지역의 대학에서 영화와 희극이론을 강의했다. 최전선을 찾아다니며 소련 현대희극도 선보였다. 예술성과 선전효과가 뛰어났다. 뤄루이칭은 “쑨웨이스는 당이 키워낸 첫 번째 홍색 전문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중국 설립 후 중국의 연극과 영화계는 옌안에 있던 사람과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던 연예인들이 뒤섞여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쑨웨이스는 청년예술단 총감독과 부단장을 겸하며 연기자들을 휘어잡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집무실도 마음대로 출입했다.
1949년 1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쑨웨이스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오는 난생처음 떠나는 외국여행에 장칭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장이 아무리 졸라도 “스탈린이 속으로 흉본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쑨은 기밀을 다루는 기요비서 겸 통역팀 조장으로 마오를 수행했다.
마오가 소련에 머무는 동안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장칭은 젊은 시절 오해받을 행동을 많이 해 본 사람다웠다. 쑨을 만날 때마다 모스크바행 열차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국가의 기밀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다.”
문혁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7년 장칭은 린뱌오의 부인 예췬과 손을 잡았다. “네 원수는 내가 갚아주마. 내 원수는 네가 처리해라.”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이었던 예췬은 1930년 전 린뱌오와 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쑨의 남편을 간첩혐의로 체포하고 가택수색에 나섰다.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연애편지에 가까운 것도 많았다.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쑨에게 보낸 편지를 들고가 저우를 몰아붙였다.
중요 인물의 체포는 저우언라이의 서명이 필요했다. 저우는 진땀을 흘렸다. 이날 장칭은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저우의 동생에 대한 체포지시서도 덤으로 받아냈다.
이듬해 3월 1일 군이 관리하던 베이징 공안국에 끌려온 쑨웨이스는 7개월간 얻어맞기만 하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쑨웨이스는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명심했어도 피할 수 있는 화를 자초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똑똑한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경구 따위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
첫댓글 강청과 임표 각시는 질투가 고랑 모를 정도였네. 아무리 질투가 하늘을 찌를 듯해도 질투의 대상이 맞아죽도록 뒤에서 조종하다니. 그러니 문화혁명 때 온갖 패악질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했댔던 게 아닌가. 지독한 년들!!
두 아지망덜 질투가 저픈 거 담다....ㅎㅎ
문화대혁명 미친 보름에
죄도 어시 비명에 간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지.........
암튼 중국이란 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