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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은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꺾는가
칼뱅의 예정론과 관련하여 두 집단의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집단은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교리가 정직하게 살려는 의욕을 오히려 꺾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사도 바울을 예로 들어 이를 반박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선택받은 목적은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우리가 선택받은 목적이 거룩한 삶이라면, 이 선택은 우리의 태만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이끌어 거룩함을 숙고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사람이 정결하고 흠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선택받은 사람의 소명과 버림받은 사람의 완고함과 무지함을 계속해서 논의합니다.
부르심은 택하심의 결과이자 증거다
먼저 칼뱅은 부르심이 택하심의 결과이자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두신 택하심은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칼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택하심의 증거로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미리 아신 이들이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고, 그가 예정하신 이들을 부르셨으며, 그가 부르신 이들을 의롭게 하셨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칼뱅은 부르심을 택하심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의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선택하신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듣는 부르심과 신자에게 임하는 부르심
칼뱅은 부르심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보편적인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보편적인 부르심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자기에게 오도록 초대하시는 복음의 외적인 선포 속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의 가르침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도록 하실 때 신자들이 이 부르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적인 부르심에는 신자로 여겨져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입지 못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칼뱅은 가룟 유다를 그 예로 듭니다. 유다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구원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
그러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한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이라는 로마서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이 돌아와 살기를 원하신다는 에스겔서의 말씀 등 예정론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칼뱅은 예정론과 섭리론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우선 바울의 주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모든 개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와 조건의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을 막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의 자비를 풍성하게 베푸셔서 모든 부류의 사람이 구원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칼뱅은 또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겠다”는 출애굽기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비를 베푸시려는 사람을 선택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약속이 우리 안에서 효력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 약속은 우리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가 은혜 안에 받아들이실 사람과 거부하실 사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약속하신다는 주장과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칼뱅은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으로 알리시려는 뜻은 주님의 자비가 그 자비를 구하고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Ilya Repin, 「Job and His Friends」(1869). 칼뱅은 고난과 역경조차 우연이나 운명의 변덕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섭리에 대한 믿음은 형통할 때에는 감사를, 환난 가운데에서는 인내를 불러일으킨다고 강조했다. ⓒ이미지 출처: Russian Museum/Wikimedia Commons
섭리는 운명론이 아니다
그러면 섭리는 과연 운명과 우연을 배제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섭리를 기껏해야 하나님의 예지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호하고 일반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여 세상의 모든 세세한 부분을 유지하고 운영하시는 것이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운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토아주의자들과 달리 칼뱅은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자연 안에서 만물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칼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이자 통치자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의 지혜에 따라 자신이 하실 일을 결정하셨고 이제 그의 권능으로 그가 결정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신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섭리지만 인간에게는 우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일까요. 이런 의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칼뱅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일어나지만, 이 모든 일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우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운명이 모든 것을 제멋대로 바꾸면서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이 전개될 때 그 사건의 질서와 이유와 목적과 필연성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감추어져 있고 인간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는 사건들조차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우연처럼 보일 수 있다고 칼뱅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런 우발적인 사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도 칼뱅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이런 방식으로도 저런 방식으로도 진행될 수 있는 미결정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고 칼뱅은 말합니다.
섭리를 믿는다고 위험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해서 신중할 필요가 없다거나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는 순간을 이미 정해놓으셨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칼뱅은 섭리를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합니다. 생명이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선물이라면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를 보여주신다면 어리석고 무모하게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을 주셨다면 그 방책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과연 어떻게 경험하는 것일까요. 칼뱅은 그리스도인이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결정된다고 확신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을 일으킨 여러 이차적인 원인의 역할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뱅은 예수께서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신 후, 곧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작은 새보다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훨씬 더 세심하게 돌보시며, 그의 허락 없이는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확신을 준다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에는 감사하고 역경 속에서는 인내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형통할 때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역경 가운데에서는 인내하며, 미래를 향해서는 특별한 확신을 갖게 된다고 칼뱅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을 경험하는 것이든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사용하여 우리를 도우신 것이든,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우리가 역경을 당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가르쳐 인내하고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 즉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을 선으로 바꾸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도 재난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거두셨으니 주님의 이름이 찬송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놀라운 말로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므로 역경에 처해 분노와 조급함을 다스릴 더 좋은 방책이 없을 때, 그런 일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숙고하는 법을 배우고 “주님께서 이 일을 뜻하셨으니 인내하며 견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큰 진보라고 칼뱅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형통할 때에는 감사를, 환난 가운데에서는 인내를 북돋운다는 것이 칼뱅의 확신입니다.
섭리가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일의 책임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칼뱅은 만약 우리가 자신의 방심이나 부주의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놓고도 우리는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죄악을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죠.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천 가지 질병의 수용체다”
칼뱅은 인간의 삶이 헤아릴 수 없는 불행에 에워싸여 시달린다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특히 인간의 몸은 ‘천 가지 질병의 수용체’이며, 질병의 원인 자체를 그 몸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칼뱅은 이것을 자신의 몸으로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칼뱅은 평생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극심한 편두통과 만성적인 소화기 질환, 위장 장애, 신장결석, 통풍과 관절 통증, 천식과 지속적인 기침, 늑막염과 폐질환, 열병 등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칼뱅은 사람이 어디를 가든 죽음을 가까이에 가지고 다니며, 인간의 삶 자체가 어느 정도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운명의 변덕에 맡겨버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인간의 생명이 우연에 따라 좌우된다면 인간의 삶은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신자의 마음을 비추면 그는 이전에 자신을 괴롭혔던 공포와 고뇌에서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모든 의심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칼뱅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그의 권능으로 붙드시고 그의 뜻으로 다스리시며 그의 지혜로 통제하시기 때문에, 그가 정하신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그의 보호 아래 두시고 그의 천사들에게 우리를 맡기셔서, 홍수나 불이나 칼이나 그 밖의 어떤 것도 주님의 뜻이 달리 결정하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놀라운 위로를 얻는 것, 이것이 고난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예정론과 섭리론을 오늘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렇다면 칼뱅의 예정론과 섭리론은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성장한 우리에게 인간의 삶이 신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은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 결정론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운명이나 우연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 이유를 알 수 없는 악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악의 근원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정론과 섭리론은 인간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치유와 해방이라는 의미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은 성과사회와 무한경쟁사회의 압박으로부터 심리적인 해방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삶을 우연이 아니라 섭리로 해석할 때,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은 삶에 서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단지 생물학적 시간의 길이로 보지 않고 전 우주의 역사 속에서 바라볼 때 그 누구의 삶도, 그 어떤 삶도 우주의 무게를 갖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는 삶은 없다는 의식은 자신의 삶은 물론 타인의 삶과 다른 피조물의 삶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정론과 섭리론은 우리 시대에 다시 해석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신학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소중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