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생명력 그린 화가 오지호
오지호, ‘남향집’, 193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미술품 중 오지호의 ‘남향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오지호가 살던 개성의 초가집을 그린 작품이다. 짱짱한 초겨울 햇살을 받는 초가집과 빨간 옷을 입은 딸,
그리고 낮잠 자는 하얀 개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가가 특히 주력한 부분은 집 앞의 커다란
대추나무이다. 그중에서도 나무 본체보다는 나무의 그림자에 작품의 ‘포인트’가 있다. 어쩌면
화가는 대추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나머지를 모두 그려 넣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듯, 나무 그림자는 그저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닌,
푸른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오묘한 색채로, 담벼락과 지붕 위에 넓게 드리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어두운 시대, 오지호는 어떻게 이렇게 그림자까지도 빛나는 환한 그림을 그렸을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실 그의 생애가 그리 ‘꽃밭’이었던 것은 아니다. 1905년 12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했을 무렵, 오지호는 전남 화순 동복(同福)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복은 자연경관이 말할 수 없이 뛰어났고, 전남 지역에서 자동차가 맨 처음 들어왔을 만큼
부유했고 개화 성향이 강했다.
오지호의 부친은 초기 개화파 인물에 속했고, 일제 강점 이전에는 보성군수까지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되어 경술국치에 이르자 심각한 우울감에 빠졌고, 1919년
3월 고종 인산일에 경성에 갔다가 돌아와 4월에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자책감, 울분,
분노가 뒤엉킨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 것이었기에, 그 어떤 유서조차 남지 않았다.
오지호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랐다. 위로 형이 세 명이나 있었으나, 두 명이 일찍 죽었고, 한 명은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4살 때 부친까지 잃었으니, 오지호는 평생 모든 결정을 독자적으로
하는 것에 길들었다. 그는 매우 어린 나이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부친 자결 후 오지호는 동복을 떠나 전주고보에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기 시작했고, 1년 정도 다니자
여기서는 더 배울 게 없다며 경성의 휘문고보로 편입했다. 이 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만났고, 우연히 본 나혜석의 작품에 매료되어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집에다가는 의학을 배우러
간다고 하고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도쿄미술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그는 이 모든 인생 경로를 혼자서 결정했다.
단식 끝에 얻은 환희
마치 환하고 순탄해 보이는 그의 생애에도 실은 여러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처음 죽음을 직면한 것은
1935~37년의 일. 일본 유학 후 돌아와 개성 송도고보에서 선생을 하던 때였다. 경성에서의 혼탁한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딱 1년만 머물 생각으로 왔던 오지호는, 송악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10년간
개성에 머물게 된다. 바로 이때 그를 평생 괴롭힌 위출혈이 처음 발병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5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거쳐 겨우 퇴원했지만, 재발과 졸도를 반복했다. 오지호는 결국
어떠한 병원 치료도 거부한 채 오로지 단식으로 자가 치료를 결심하게 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태양과 바람과 물만으로도 살아가는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오지호에게 있었다. 바로 그 신념의 증거물로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단식과 일광욕, 그리고 그의 꼿꼿한 정신력은 실제로 효과를 보았고,
오지호는 1937년 되살아나서 학교 생활을 재개하고 그림도 그렸다.
오지호, ‘사과밭’, 1937, 개인소장. 너무나도 눈부시게 환한 나머지 사과나무의 그림자도 보랏빛으로
보인다. 오지호는 이렇게 맑고 밝은 조선의 자연이 습윤하고 음침한 일본의 자연과 구별되는, 조선
고유의 특징이라고 봤다. 오지호는 ‘조선’의 인상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바로 이때 그린 작품이 유명한 ‘사과밭’이었다. 오지호가 그 시절 흠뻑 빠졌던 반 고흐의 영향을
강렬하게 반영하는 이 작품은, 개성 송악산의 사과밭에서 꽃이 피는 단 3일 동안의 야외 사생을 통해
완성되었다. 레몬, 바이올렛, 코발트블루, 에메랄드그린 등 밝은 계열의 제한된 색채만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5월의 태양 아래 생장하는 자연의 한순간을 담았다. 아무런 생명력도 품지
않은 것만 같던 겨울의 앙상한 가지에서, 순식간에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경이(驚異)’.
그러한 자연이 안겨주는 ‘감격(感激)’이야말로 예술이 표현해야 하는 대상이다.
오지호는 그런 사과꽃을 보며, 자신의 생명도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아름답던 갈대꽃
그에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 것은 6·25전쟁 때였다. 해방 후 경성 생활을 거쳐 낙향해 있던 오지호는
고향 동복에서 1950년 말 빨치산에 납치되어 남부군 활동에 끌려다닌 적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작가가 남긴
기록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여러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볼 때 오지호가 ‘납치’되었던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지주 집안 출신에 해방 후 조선대 교수였고 예술가였으니, 처음에는 ‘악질반동분자’로 몰려 6개월간은
부대 내에서도 감시 대상이었다고 한다. 차차 이 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오지호는 시키는 대로 스케치화도
그렸지만 자발적으로 산속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논어, 맹자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52년 1월, 오지호가 속한
부대는 광양 백운산에서 군경토벌대와 대치하다가 대부분 죽었고, 오지호는 낙오되어 국군에게 붙잡혔다.
오지호는 바위 앞에 끌려가 즉결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전시(戰時)
상황이 아니었던가.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만에 다시 눈을 떠 보았다.
기막힌 일이 아니랴. 내 눈 앞에 펼쳐진 갈대숲, 그 희게 핀 갈대꽃 무리 사이로 이제 막 떨어지려는 해가
타는 듯이 붉은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살아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오지호, ‘그 슬프게 팬 갈대꽃 무리’ 중에서)
죽음에 직면해서도 갈대꽃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던 화가 오지호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그를 알아본 한 장교 덕분에 오지호는 군법 재판에 회부되었고, 9개월간의 재판을 거쳐 1심에서
20년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극적이다 못해 얼떨떨한 결말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그려서 쌓아둔 작품 300여 점이 거의 다 불쏘시개로
쓰인 후였다. 이 사실은 오지호에게 무엇보다 큰 좌절감을 안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재기했다.
광주 지산동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발견하고, 주변의 주황색 산봉우리, 초록빛 보리밭, 연분홍 복숭아밭에
취해 정착했다. 직접 화초를 심고 채전을 가꾸며 요즘 말로 ‘친환경’ 자급자족 생활을 실천했다.
무등산의 자연은 오지호에게 충만한 에너지를 선사했고, 이에 보답하듯 오지호는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열심히 화폭에 옮겼다.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한 해는 특히 고무되었다. 본격적인
작업 활동에 몰입하기 위해 조선대 교수직도 그만두고, ‘봄 풍경’, ‘가을빛’과 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오지호, ‘봄 풍경’, 196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가을빛(추광)’, 196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어항 속 열대어
그런데도 끝이 아니었다. 1961년 5월 16일이 일어난 다음 날 새벽 오지호는 또다시
검거되었다. 4·19 이후에 ‘민자통’ 즉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활동에 연루된 이력
때문이었다. 군사정부는 이 활동을 북괴 활동에 동조하는 범죄로 간주했던 데다, 오지호는
과거 빨치산 이력까지 있었기에 졸지에 ‘빨갱이’로 몰렸다. 10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오지호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 있는 항변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원심에서 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그는 다시 무죄로 풀려났다.
오지호, ‘열대어’, 196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무리 오지호라고 해도 이 사건은 꽤 오랫동안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위궤양으로 고생하고 단식으로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 그는, 1963년에서야
비로소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린 작품이 ‘열대어’이다. 어항 속 세계에 갇힌 채 멀뚱멀뚱 바깥
세상을 응시하는 빨간 물고기. 이 작품의 빨간색은 오지호의 여느 풍경화 속 빨간색과는 달리 조금
처절하고 처량해 보인다. 이후로도 몇 년간 오지호의 풍경화에는 어둡고 우울한 푸른색이
지배적이었다. “하늘과 바다 모두가 검푸르다. 청징(淸澄)하고 투명(透明)하게
보였던 대기, 청자 빛깔의 투명이 이젠 나의 눈엔 검게만 보인다.”
오지호, ‘항구’, 196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의 메시지
그러나 결국 오지호의 말년 작품은 다시 환해졌다. “어떠한 추악함이나 증오 속에서도 미(美)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 회화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이 오지호의 굳은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歡喜)’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 삶의 영역에서도
예술에서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지호의 밝고 환한 작품은 결코 어둠을 피하거나 외면해서 얻은 결과물이 아니다.
존경받는 위인이 대부분 그러하듯, 오지호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 굳건한
정신력을 지녔기에 빛나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정신력은 인간에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오지호의 편지 중에서)
오지호, ‘꽃-델피니움’, 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는 새마을운동으로 싹 다 없어질 뻔했던 자신의 지산동 초가집을 호통을 쳐서 지켜내며,
평생 그 초가집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자연을 지나치리만큼 경외한 나머지 문명을 싫어해,
집 근처에서 말을 타고 다닐지언정 택시 타기를 꺼렸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이면
그날따라 타게 된 택시에서 오지호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1982년 숨을 거두었다. 결국은 문명이 그를 죽였다.
평생 오지호의 신념을 따르고 도왔던 아내 지양진은 남편의 유작 34점을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봄에는 오지호다. 그의 작품이 걸려 있는 미술관들에 나들이하기 딱 좋은 계절 아닌가.
이 봄, “삶은 환희”라는 오지호의 신념을 우리도 믿어보고 싶지 않은가.
육명심,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오지호’, 197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지산동 초가집 툇마루에 걸터앉은 오지호의 모습을 사진가 육명심이 촬영했다.
- 글/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