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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9일
902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 오늘의 사회자 김덕기 -
기억상 2016년 8월의 사드반대 김천촛불투쟁의 열기는 대단했다. 300회 이상 김천시청과 김천역 앞에 매일 수백명의 김천시민과 연대세력이 사드반대와 평화기원을 위해 운집했다. 당시 그 집회 사회자가 바로 김덕기 전 김천YMCA 사무총장이었다. 날마다 열리는 집회라서 매일 진행하는 사회가 가능할까 싶었는데, 300회 이상 꿋꿋하게 사드반대 집회의 사회자 자리를 지켰다. 그 의지 발현은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혹독한 희생을 겪도록 만들었다. 7년이 지난 오늘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열망과 의지로 김천역 평화광장 집회에 다시 섰다. 김천평화집회에 큰 에너지가 더해졌고, 열정있는 사회로 인해 집회의 활기가 넘쳐졌다.
-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
우리의 사드반대 투쟁은 경건하고, 정의로우며, 가치있는 행위이다.
오늘 7년째 평화촛불을 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자.
- 사회자 발언 -
전국에 산불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예부터 민중이 화가 많이 나고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다행히 비가많이 와서 진화가 되었다. 현 대통령 탄핵이 빨리 일어나야 산불이 덜 날 듯 하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다. 건강 주의하셔야 한다. 오늘 사드철거를 위한 평화집회 힘차게 시작하자.
1. 박태정 공동위원장 여는 발언
사드는 우리 힘으로 빼야 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사드를 뺄수 있다. 과거 일본 식민지 36년 경험 이후 지금은 미국 식민지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드철거에 대해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빼자. 노곡리, 소성리, 김천 모두 똘똘 뭉쳐 꼭 빼내자.
지금 세상이 흉흉하다. 한반도도 언제든 전쟁터가 될 우려가 높다. 우리땅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는 뭐든지 우리 힘으로 해낸다 생각하고 투쟁을 하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아내며 협심하여 사드빼는 그날까지 계속 함께 하자.
2. 소성리 파수꾼 정진석 발언 및 노래
4. 9. 통일열사 48주기 추모식 현대공원에서 발언과 추모연주를 하였다.
혹시 인혁당 사건을 아십니까?
인혁당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추모행사였다.
가까운 지인분들의 친구의 추모
하얀나비와 문익환목사님을 기리는 노래를 많이 연습했다.
우리나라가 해결하지 못한 분단의 역사가 가슴 아팠다. 지금 정권의 행태는 거꾸로 달리는 폭주기관차 같다. 우리가 있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래의 가사에 우리의 현실과 슬픔이 녹아있었다. 노래를 준비하면서 정말 우리가 뭔가 해야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정말 분단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지속되는 억압을 극복해야 한다.
그 자리에는 현 윤석렬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 탄핵이야기도 많았다. 마음 속 폭발하는 응어리가 있는데 이를 표현하기 힘들다.
이를 노래로 표현해 보려 한다.
<그대 오르는 언덕>
3. 김천농부 우현덕 발언 및 노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뜻하지 않게 농사를 짓게 되었다.
농사 생업을 하면서 김천역 평화광장 촛불집회의 자리까지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존경스럽다.
어렸을 적 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멋진 회사 취직이었다. 30살 즈음에 받았던 꿈 질문에는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었다. 지금 농사 짓겠다는 꿈은 이루어졌다.
<나이 서른에 우린>
<너와 나의땅>
4. 박석민 자문위원 발언
김덕기 사회자가 김천역평화광장 촛불집회에 등장하는 막내인줄 알았습니다. 김천촛불에서 막내신분을 벗어나나 싶었는데, 고참 중에 고참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쉽다. 계속 김천역 촛불집회 운영팀 공식 막내를 계속 맡겠습니다.
4월9일, 오늘은 국제사법계 암흑의 날입니다. 1975년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8명의 피고들을 사형 선고 받은 지 18시간 만에 모두 사형에 처해 박정희 정권이 사법살인을 저지른 날로, 2007년 대법원 재심에서 인혁당 사건은 고문에 의한 날조사건이라는 무죄평결이 내려져 명예가 회복 되었습니다.
오늘 평화이야기 주제는 1990년대 초반 동북아의 근본 지형을 변화시킨 한중수교 이야기지만 그에 앞서 올해로 75년을 맞은 제주 4.3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합니다.
2005년 제주는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핵심적인 이유는 한국현대사에서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간 아픈 4.3을 겪었던 역사, 가장 평화를 원하는 과거 때문입니다. 작년 당선자 신분으로 제주를 찾았던 윤석열은 올해는 4.3 참석 대신 지지 세력 결집을 위해 또 대구를 방문하는 정치행보만 하고 있고, 꼴뚜기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고 국민의힘 대표 김기현도 불참하고, 입만 열만 사고치는 김재원은 4.3은 중요하게 기념할게 아니라고 떠벌여 된통 혼나는 중입니다. 최고위원이 된 태영호는 4월3일 당일 제주 4.3은 김일성이 저지른 일이라고 망발을 해대고 있습니다. 역대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4.3을 폄훼하고 이념 대결로 몰고 갔었는데, 올해는 아예 서북청년단이라는 극우보수 세력이 기념식을 흔들어 놓고, 엉망으로 삐뚫어진 언론은 이들과 인터뷰까지 보도하는 등 최악의 4.3을 맞은 상태입니다.
75년이 지났지만 지금 4.3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제주 43이 제대로 된 역사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4.3 50년을 맞아 1998년 한일 역사학자 심포지움때 일본 학자가 질문 했습니다. "어떻게 정권에 반대한다고 자기 국민을 그렇게 학살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심각한건 어떻게 그 사실을 50년이나 숨길 수 있었는가?" 한국 역사 학자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물론 일본도 2차대전 막바지 일본 본토 방어 저지선으로 정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잠깐 소개하면, 미국은 1,500척의 미군 함대를 집결시켜 3월 25일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는데, 이때 미군은 지상 전투부대만 18만명으로 후방까지 합치면 54만명인데 비해 일본 수비대는 약 10만명 중 3분의1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으로 전력상 비교가 안되는 전투였습니다. 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한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은 참화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니며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가장 큰 범죄는 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자살령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군의 강압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했고, 집단 자살을 택하지 않은 주민에겐 군대가 수류탄을 던져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3개월간 집단사망 지역이 30곳이 넘어 당시 오키나와에는 30만 명의 주민 가운데, 일본군은 7만7166명. 오키나와 주민은 149193명이 사망했고, 한국인 희생자도 1만명 가량으로 조선에서 끌려온 위안부도 있었습니다. 본토 공격의 교두보로 오키나와를 뺏으려는 전투에서 미군도 큰 피해를 입고 원자폭탄 투하를 결심하고, 미국이 전쟁 막판 핵무기를 사용하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키나와 전투가 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주 43은 이승만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분단과 반공국가를 건설한 이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금기어였습니다. 처음 43을 세상에 드러낸건 1978년 ‘순이삼춘’ 소설이었는데, 작가 현기영씨는 모진 고초를 겪은바 있습니다. 김대중 집권후 1998년 처음으로 제주 공설운동장에서 공개적인 추모식. 그때 공개적으로 처음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을 불렀던 자리로 1999년 김대중의 약속과 2000년 특별법으로 2008년 4.3 평화공원이 문을 열었는데,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게 누워있는 하얀 돌기둥. ‘백비’제주 43의 이름이 정해지면 세울 예정입니다. 이미 제주 4.3은 43민중항쟁으로 불리고 있지만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이를 확증해야할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들은 3.1절 기념식으로 진행했고, 행진할 때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 이를 계기로 시위가 거세졌고, 우리나라 투쟁중 경찰과 사법만 제외한 모든 행정기관이 파업에 동참하는 민과 관의 공동 파업투쟁이 전개되기도 했는데, 경찰도 20%가 파업에 참가했다가 파직당하고 그 자리는 나중에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으로 채워졌습니다. 당시 남한을 지배한 미군정과 정부는 머리 숙여 사과하고 사태를 수습하기보다 2천여명이 넘는 청년들이 연행하는 등 가혹한 탄압에 제주도민은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제주의 구호는 “탄압이면 항쟁이다”였습니다. 1년여의 탄압에 맞선 투쟁이 진행되다가 5.10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분단을 기정사실화하자 이를 반대하는 투쟁의 시작이 4월 3일로 4.3 제주 민중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주 4.3이 발생한 이유와 진행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제주 민중이 학살당한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제주도 작전’을 감행해서 제주 43의 실질적 책임이 있는 미 군정은 7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사과는커녕 책임지지 않고 있음을 75년을 맞는 제주 4.3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미군 대령의 진압 책임자 부임해서 당시 경비대·경찰을 통솔했고, 정부 수립 이후 군사고문단·미사절단 등으로 한국 정치에 직접 개입한 것은 2003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제주도에 다녀온 진압 주체들의 책임과 함께 미군정 당국과 미군사고문단에도 책임을 묻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딘 군정장관은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 작전’이라는 제목의 전문(1948년 4월18일)을 보내 경비대(국군의 전신)를 작전통제하에 두고 진압작전에 사용하도록 했고, 같은 해 5월10일 총선거에서 제주도 내 2개 선거구의 투표가 참여자 과반 미달로 실패하자 미군정은 같은 달 중순께 브라운을 제주도 군·경을 통솔하는 진압 책임자(최고 지휘관)로 파견, 미군 대령이 진압 책임자로 나섰습니다. 이는 제주도 사태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당시 국내 신문들은 “하늘에는 미군 정찰기, 연안에는 미군함, 육상에서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고, 제주도에 배치된 미군 연락기. 미군이 조종한 이 연락기는 중산간에 피신한 주민들을 찾아내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진압 책임자였던 브라운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토벌작전을 강화해 심부름 노릇을 한 경비대(한국군)는 5월22일부터 6월30일까지 주민 5천여명을 검거하는 등 당시 신문들은‘제주도는 울음의 바다’라며 제주 상황을 보도했습니다. 4·3 시기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서한(1948년 9월29일)을 보내 “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제주 4.3 전후 미국이 만든 각종 보고서와 문서는 제주 4.3에 미국이 직간접적 개입을 증명하는 기록을 숱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 제주 4.3은 지금도 진행형이고 학살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과제는 지금도 진행중인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