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吉祥寺)
1. 개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요릿집)인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 2. 대원각 시절 대원각 소유주 김영한은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했고, 군사정권 시절 대형 요정인 대원각이 됐다. #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은 '요정 정치'라고 불릴 만큼 요정이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3대 요정으로 불린 대원각은 박정희 시절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제3공화국, 제5공화국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기생들이 있는 술집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배경이 대원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요정 문화를 대표하는 대원각을 통해 김영한은 엄청난 부를 이뤘다.
1970~80년대, 한국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대원각과 같은 요정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기생관광의 무대로 활용했다. 1973년에는 정부기관인 국제관광공사 산하에 요정과라는 부서를 설치하고, 관련 업무를 관리하도록 했다. 대원각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유흥음식점으로 지정하여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주었다. 또한 일본인의 입국 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 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성매매 단속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다. 접객 여성들에게는 관광종사원 등록증을 발급해주었는데, 이들 또한 통금 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 3. 내력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진향(眞香). 성북동 기슭에 서울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해 부를 얻었지만,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생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는 계속되었기에,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영한은 말년에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과의 일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김영한(김자야)은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부인,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백석 연구가 송준은 "생전의 김영한을 인터뷰했는데, 의구심이 든다.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고, 백석 전문가 이동순 역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기고했다.
김영한은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고 절을 세워달라며 간청하였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사가 백석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나, 이는 백석 연구가 송준이 백석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도쿄 길상사 1875 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아오야마가쿠인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정확한 주소가 다시 알려졌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과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라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라 어느 정도 참작할만한 근거는 된다.
1999년에 김영한이 죽자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에는 법정도 여기서 사망했다. 극락전에는 김영한의 영정이 있으며, 진영각에는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한다. 사망 이후, 딸 서모 씨가 조계종에 50억 원을 달라고 소송하여 승소했다.
법정이 처음 출가한 사찰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다.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사망하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4. 분위기 이 절은 본래 요정이었기 때문에 절의 풍경부터 다른 전통적인 사찰과는 좀 다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산책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오히려 편안한 측면도 있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 정치가 벌어지던 밀실이 지금은 누구나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불교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이 갖추어졌다.
다만, 요정이었던 길상사 금당은 불상과 주변물 정도만 가져다 놓았을뿐 더 이상 꾸미지 않아 상당히 썰렁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 주변에 비교적 규모가 있는 건물을 새로 세우는 것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
현대식 조각품인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하여 봉안하였다. 사찰의 설립식 행사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직접 절을 방문해 축사를 했고,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답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을 방문해 답사했다. 성모 마리아 비슷한 분위기인데, 나이 지긋한 불자들은 좀 낯설어하기도 하는 듯. 최종태는 길상사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종로구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도 조각했는데, 이 성모상과 관세음보살상은 마치 친자매처럼 매우 닮았다. 제작자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종태의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
대웅전 앞마당에 빼곡히 심어진 꽃무릇이 상당히 아름답다. 이 꽃무릇 밭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