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2023. 4. 1. 18:27ㆍ명태조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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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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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에 난초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공을 낳았다. 정축생 따라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흑룡이 동산의 배나무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 놀라 깨어 나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또 몽룡(夢龍)이라 하였다. 관례(冠禮)하면서 지금의 이름 몽주로 고쳤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연달아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시중 좌명공신 삼중대광 익양군 충의백(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에 이르렀다. 이씨가 천명을 받자, 공은 절의에 죽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권근(權近)의 청에 따라 그의 절의를 포상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 처음에 공은 태조(太祖)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여러차례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갑진년(1364)에 태조가 병마사로서 삼선(三善)을 격퇴할 때에 공은 태조의 종사관이 되었고, 무오년(1378)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를 격퇴하였으며, 계해년(1383)에는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태조를 따라 정벌하는 데 나아갔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자기와 함께 승진케 하여 상(相)이 되었다. 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그 세력을 꺾고자 하여 은밀히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였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혹 근거없는 모함을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청하였다.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혹은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로 되어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하고 읊으니, 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읊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였다. 태종이 공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공이 태조에게 문병을 핑계로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주인은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며, 뜰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은 드디어 뜰 안으로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오늘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나왔다. 그 집 사람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얼마 있다가 정 시중(鄭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활을 메고 그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부(武夫)가 있었다.
공은 수행하는 녹사(錄事 의정부의 관속)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 하였다.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고,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화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함께 죽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당시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 수행 녹사의 성명을 기억한 사람이 없어서 드디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으니, 생각건대 그가 신우를 왕씨의 출생으로 알았더라면 곧 다른 날 신우를 추방하는 데 자신도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신하로서 섬기다가 일조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만일 왕씨의 출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呂政)이 제위에 오름에 영(嬴)씨는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추방되고 살해될 때는 공신까지 되고 다시 후일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퇴계가 답하기를, “정자의 말씀에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여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포은의 큰 절개는 천지에 경위(經緯)가 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남을 공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남의 미덕을 이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기를 마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매양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공의 사당(祠堂)은 옛적에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孫舜孝)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못하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중종(中宗) 때, 조정에서 공의 문묘 종사(文廟從祀)가 허락되었다. 그런데 한 대신이 불가하다고 이의를 주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몽주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唐) 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 5백년의 종묘 사직이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묘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송도(松都)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 신미년과 임신년 사이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숭양(崧陽)’이라 하여 공을 주사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배사하였다. 서원이 완성되자 유사가 공의 신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뢰었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몽주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겠는가. 비록 영의정의 추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다만 ‘포은 선생’이라고만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후정쇄어(侯鯖瑣語)》
○ 선조 계묘년(1603)에 공에게 제사를 내리는 제문에 고려 문하시중 충의백 정공지묘(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라고 쓰려고 하였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추증한 직함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또한 정공(鄭公)이라 칭함은 국가사제(國家賜祭)의 의식이 아닐 것 같으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옛적에 제왕이 선대 학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신하의 예로써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비록 한때 국사를 맡았던 신하라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곧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전하께서 어진 이를 받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룩해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광해(光海) 경술년(1610)에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하였다. 《전고(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
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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