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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키움
지난 해 8월 초 막내아들 대영이가 아이들에게 생명의 탄생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뜻에서 ‘달걀부화기’를 사서 유정란 12개를 사다가 부화기를 틀었단다. 21일이 지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와 삐약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21일은 삼국유사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사람으로 태어나려고 기도 금식한 기일과 일치한다.)
8살 서진이가 알에서 깨어 나오는 것을 맨 먼저 보고 신기해 놀란듯이 “엄마, 아빠! 병아리가 나왔어요”라고 외쳤다. 엄마 아빠도 그래 방에서 쫓아와 보고서 “참으로 신기하구나!”하고 부화의 성공함에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아침 잠에서 갖 깬 동생 6살의 예진이도 꿈틀거리는 알을 보더니, “이 알에서도 병아리가 나오고 있어요!”하며 생명의 탄생을 처음으로 지켜봄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면서 이에서 눈을 좀처럼 떼지 못했다. 알들은 2일 동안 연달아 깨어 나왔다. 온 식구가 병아리기 알에서 깨어나오는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직접 체험하면서 즐거워했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병아리의 깨어남을 말했고, 이웃집의 동무들이 구경하자고 찾아왔다. 친구들도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서진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엽게 생긴 병아리를 만져보기도 하였다.
마지막 알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았다. 병아리는 모두 11마리가 태어났다.
처음에는 비틀거리더니 몇 시간이 지나니 몸놀림이 가여워져서 사뿐 사뿐 걸었다. 아이들은 어린 병아리가 무엇을 먹고 자랄 것인가가 궁금하기만 했다.
대영이는 병아리 먹이를 이미 주문해 놓았다. “애들아 ! 아빠가 병아리 밥을 주어야겠다며, 종재기 접시에 모이를 약간 담어 주었더니 병아리들이 모여들어 찍어먹기 시작했다. 모이를 먹는 병아리들을 보니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털이 새로이 나기 시작하였다. 저마다 약간씩 옷 색깔이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
병아리들은 저들이 태어난 바구니를 벗어나 거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병아리가 하루하루 활발해지고 자람을 신기롭게 보고 있었다.
대영이는 프라스틱 병아리 집을 짓는 것을 인테넷으로 주문해 이를 조립해 새장과 같은 닭집을 지었다. 엄마 아빠가 병원에서 돌아오는 저녁시간 까지 아이들은 이웃집 친구들과 함께 이모할머니로부터 병아리가 삐약비약 걸음마를 배우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며 모이를 주고 물통에 물을 담아주니 용하게 찾아서 물통에서 물을 방울 방울 받아 먹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서진이는 할아버지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병아리 기름을 조잘 조잘 이야기 했다. 나는 손자인 서진이게 매일 같은 시간에 병아리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를 일기를 쓰라고 했다.
1 주일이 지나자 병아리들의 모이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대영이 부부는 아이들이 병아리에 대하여 흥미를 크게 가짐을 보고 마음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다가 병아리가 귀엽게 자라는 것을 보고 가져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주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병아리 두 세 마리 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15일 만에 병아리 다섯 마리가 남았다. 더 이상 분양은 하지 않기로 했다. 힘께 태어난 병아리들은 생활공간이 달리지는 이별의 인연은 이에서 끝났다.
병아리의 자람은 매일 매일 다르게 활발해져 15일이 지나자 이를 아파트 안에서 더 이상 키우기 어려움을 알고 대영이는 아이들과 합의를 본 후 이를 할아버지인 우리 집 옥상에 가져오기로 했다.
대영이 내외는 이들 병아리가 크는 것을 보러 온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집을 주말 마다 오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대영이는 병아리 집을 짓기 위해 바닥에 깔 천막, 그리고 집을 지을 부품, 병아리 모이통, 물통 등을 택배로 주문해 우리집에 도착하게 하였다. 모이는 ‘병아리 메추리먹이’라는 곱게 간 가루 5kg 2포를 시켜왔고, 물에 타는 방역 약 한 통을 주문해 놓았다.
어느 토요일 병원에서 저녁 8시쯤 퇴근한 대영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아리 다섯 마리를 닭장에 담아 용인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왔다. 한 두 시간 안에 대영이는 우리집에 받아 놓은 자료를 조립해 옥상에서 훨씬 크게 지었다. 병아리 집에는 아래위로 열고 닫는 하얀 색 철사의 창문을 세 개 만들어 놓았다. 병아리는 사람이 보듬어 주어서인지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에는 알게 모르게 대영이 엄마의 도움이 컸다. 엄마에게 닭이 낳는 달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와 집식구는 병아리 키움에 신경을 써야했다. 아이들은 외손녀 김민경이 집에 오는 날에는 두 사람이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간다. 이는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밤새동안 셋이서 놀다가 늦게 잠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 일요일인데 병아리 보러 가자는 나의 말에 세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옥상으로 가서 옥상을 거니는 병아리를 보면서 즐거워했다.
병아리가 깬 후 두 달이 지났다. 병아리 벼슬을 보니 암수의 구별이 확연히 나타났다. 병아리 감별사는 병아리가 태어나자마자 식별해서 수평아리는 그냥 버려 죽이거나 육계용 가축으로 싼 값에 넘겨진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병아리 암수감별사는 하루에 수천마리의 암수를 감별해 낸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는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오직 계란을 내기 위한 목적일 뿐 수평아리는 2~3개월 기르는 식용용의 양계장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처음 병아리 사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수평아리는 그대로 매장해 사멸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집에 온 다섯 마리 중 2마리가 수평아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곧장 버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큰 덕을 베푼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계란을 얻기 위해 양계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훗날 수평아리 신세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처해졌다.
10월 말 : 닭장 만듦
병아리 다섯 마리가 두 달을 크니 새장과 같은 조립식 닭장으로는 너무나 협소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챘다. 그래서 아랫 층 방한공사에 쓰고 남은 각목을 가지고 인테리어 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훤칠한 닭장을 마련했고, 겨울 철 눈을 대비하여 천장을 남쪽으로 기울게 했고, 닭의 먹이통도 짜서 달아 주었다.
밑에는 프라스틱 받침대를 이용해 10cm 정도 올려 짓고 바닥은 아들이 준비해온 텐트용 판을 두겹으로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덮어주었다.
닭집으로서는 고대광실이라라고 할 만한다. 닭먹이도 이제 병아리가 먹던 사료에서 한 등급 높여 사서 산란용 20kg 두포를 주문해 받았다. 병아리가 자라면서 낱알 곡식을 좋아하여 이도 먹이면서 이를 소화하기 위한 모래도 가끔 새로이 넣어 주었고 닭이 올라 가 자도록 홰를 세 개 만들어 주었으나 이에 올라가 자는 닭은 없었다. 문제는 닭똥을 어떻게 제거하는 가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얼마후 아내의 뜻에 따라 닭장안의 흙을 모두 파내 옥상에서 말려 대충 구별해 내는 방식을 취했으나 이후 닭똥을 매일 매일 치우는 방식이 유효함을 알게되었다.
11월 말: 장탉의 울음
두 마리 장탉이 목청이 터지라고 울기 시작했다. 원래 장탉은 새벽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6~70년 전만 해도 시골 농촌마을에서 자식들의 통학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주는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닭울음 소리에 밤잠에서 깨어나 아침 새벽밥을 짓곤 했다.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전령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도시환경에서 가로등, 아파트 전등 빛으로 밤에도 어둡지 않아 언제가 새벽인지 모르고 낮에도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탉은 낮에도 “꼬코오 코옥!”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댄다. 그러나 새벽녘에 동쪽에 뜨는 태양을 초대하는 울음을 울부짓는 지도 아래층에 살고 있는 우리가 모르고 지낼 뿐일지도 모른다.
닭만이 태생의 시간 감각을 잃은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도 새벽에 잠에서 깨어 잠 자리에서 뒤척이면서 시간의 흐름을 시냇물처럼 흘러버리곤 하는 점에서는 닭과 인간의 차이가 오십보, 백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뜬 눈으로 잠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80~90평생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되는지를 헤아리지 않는다. 하룻밤의 허비하는 시간이 비록 짧다고 해도 한달, 일년, 수십년을 합치면 우리가 허송하는 시간의 길이가 몇 년, 또는 몇 십년이 될지 모른다. 인간이 이를 자각해서 낭비하는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닭이 이제 제법 컸다. 먹이도 산란용 먹이로 바꾸어 주었고, 우리들이 먹다가 남긴 과일의 껍질을 잘게 썰어서 먹이에 석어 준다. 가을철 김장의 배추 잎을 대달아 주면 뜯어 먹곤 했다. 배추 김장에서 버린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이웃집에서 버린 배추겉잎을 주어다 먹였을 정도이다. 닭 다섯 마리가 영계백숙으로 사용할 정도로 자랐다. 닭은 색깔은 토종닭이면서도 수탁과 암탁의 색갈이 달라지기 시작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12월 중순이후 1월말까지
풍성한 가을이 지나가고 영하 10도를 더 내려가는 겨울이 닥쳐왔다. 닭 키움에 제일 신경써야하는 것을 집식구는 추위라고 닭 집의 사방을 비닐로 둘러주자고 했다. 아내의 뜻에 따라 겨울채비를 해주었으나 몰아치는 찬바람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닭은 원래 추위를 막기 위해서 털이 나지 않았는가 하고 적당히 잠자리만의 방풍을 막아주는 수준으로 끝냈다.
그러나 막상 기온이 영하로 떨어짐에 닭에게 물을 주는 일이 제일 신경을 썼다. 물바가지를 닭이 뒤집기 때문에 그 안에 무거운 벽돌 한 장을 넣어두었더니 물을 쏫는 일은 이제는 없었다. 그런데 따라 준 물이 꽁꽁 얼어서 먹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두 번 이상 커피 보트로 물을 끓여서 어름위에 부여주곤 했는데 닭들이 갑자기 대들어 뜨거운 물에 부리가 되지나 않을 가 염려했다. 그리고 먹이를 삭이게 하기 위하여 새 모래를 넣어주고 닭우리에서 닭똥을 치우는 것도 매일 같이 한다.
겨울 첫눈이 내렸을 때에는 닭은 내 놓아 눈을 밟아보도록 했다. 닭들은 눈을 찍어먹곤 했다. 이를 휴대폰으로 찍어 손자손녀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1월 중순 쯤 장탉 한 마리를 없애기로 아내와 합의했다. 아내는 이웃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닭 모가지를 비틀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으나 이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내와 함께 이를 잡자고 했다. 그래서 닭장에서 숫탉 한 마리를 잡았다. 어느 것을 붙잡을 가를 고려하지 않고 잡히는 대로 붙들었다. 우연히 잡힌 장탉의 목을 비트니 숨이 끊겼으나 알 수 없어 한 참을 매달아 두었다. 아내가 물을 끓여 털을 뽑았고 인삼을 넣고 찹 쌉을 넣어 백숙을 만들었으나 나는 전혀 젓가락이 가지지 않았다. 비록 가축이지만 정들여 키운 것이라 그랬을까
나는 이에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생각했다.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이와 다를까? 닭의 견지에서 생각해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이 인간이 결정한 것일까? 닭에게도 평안한 죽음의 세계가 있을까? 우리의 태어나고 죽는 운명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의 힘에 의한 것일까? 이는 아는 자는 없다고 함이 정답일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을 인연으로 해석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가장 올바른 듯하다. 생명의 근원과 죽음은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그 일부가 과학적으로 밝혀져 신의 기능이 부정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것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이다.
2월 중순부터 닭이 알을 낳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닭이 알을 낳더니 5~6일이 지나니 세 마리가 모두 낳기 시작했다. 나는 닭이 알을 낳는 바구니를 넣어주고 옷을 깔아주었다. 한 마리는 지금도 바닥에 흘리고 두 마리는 자기의 알집 바구니에서 낳는다. 바닥에 알을 낳는 닭의 알 바구니를 세 개를 만들어 주었지만 그 버릇을 고칠 수 없다. 이는 나의 숙제거리이다. 알집 바구니는 박스에 옷을 넣어주었는데 때로는 이 옷을 물어다 내놓기도 한다.
& 장탉의 포악함
남은 한 마리의 장탉은 털색갈이 아주 아름답다. 주황색 깃털에 몇 줄기 검은 색 깃털이 나 있고, 꼬리와 부리는 아주 잘 생긴 수준급이다. 그런데 이 닭이 사람을 찍기 시작하여 아들 대영, 그리고 아내, 나도 손등을 찍혔다. 그리고 두 마리의 암탉도 등에 털이 벗겨질 정도로 상처가 났다. 이는 장탉이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모이를 주려면 닭들이 닭 우리를 나온다. 그 수탉은 마치 코브라처럼 머리를 세우고 덤벼든다. 그래서 온 가족에 “장탉 조심하라!”고 하여 몽둥이나 빗자루를 들고 방어할 준비를 하게 하였다. 쌈닭 대회에 나가면 좋을 정도로 완전 성숙했고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느 날 닭우리에서 나왔는데 나를 공격하여 내 앞정갱이를 쪼아 상처가 여러 곳 났다. 더 이상을 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마침 미국에서 나온 처남이 이를 잡기로 했다. 처남은 아침에 나가 날개를 잡고 칼로 목을 찔러 피를 빼니 곧 죽었다고 했다. 처남이 털까지 뽑았다. 지금은 고기가 흔한 세상이라 그런지 닭고기 맛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옛날 같으면 집에서 기른 씨암탉 잡아먹으면 최상의 맛이었는데 고기 맛은 그저 그랬다. 우리의 식성이 변해서일까?
그런데 남은 세 마리 암탉은 두 마리는 형제처럼 황갈색이고 몸 크기도 비슷하다. 황갈색 두 마리는 서로 싸우지 않았다. 한 마리는 검은 색을 띠었는데 이 닭의 양쪽 허벅지 위의 털이 빠져 있었다. 세 마리가 암탉이 잘 지내지 않고 이 튀기형의 암탉이 모이를 먹으려면 쪼아 대 먹지를 못했다.
그래서 아내는 원래 처음 키우던 새장 집을 붙여 옆에 달아 주었다. 그리고 원래의 닭 집과 이 새집의 통로를 내주어 닭들이 왔다갔다하게 하였다. 작은 우리는 튀기의 전용우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곳에 알바구니를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세 마리의 다툼을 막아주는 방안을 나는 생각해냈다. 나는 요즘 아침 6시 반, 저녁 5시 30분이면 모이를 주고 물을 주는 일은 전적으로 내 담당이다. 내자는 다리가 불편하여 한층을 올라감에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모이를 주기 위해서 닭장을 열면 세 마리가 닭우리에서 나온다.
모이를 따라 제일 앞장서 오는 닭이 검둥이 튀기이다. 동쪽 담 밑으로 내가 가면 세 마리가 졸졸 따라온다. 이에 먹이를 조금 주면 셋이서 싸우지 않고 먹는다. 다음에는 모이통을 들고 북쪽 담 밑으로 옮긴다. 다음은 서쪽 담 밑으로 나중에 남쪽 담장 밑으로 옮긴다. 이렇게 30평의 옥상을 두 바퀴 식 운동을 시킨다. 암탉 세 마리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동북서남으로 옮겨 운동을 시키면 닭이 설사를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동서남북 벽 밑으로 닭을 유인하여 모이를 주면 서로 부리를 맞대며 싸우지 않고 모이를 찍어먹는다. 20여 일을 이렇게 모이를 주었더니 이제 제법 훈련이 되었고, 닭우리 안의 모이통에 먹이를 주어도 세 닭이 서로 싸우지 않고 먹도록 했다.
사방의 신에게 기도하는 방식은 내가 최근에 연구한 조선조 중기의 상량문에서 배운 바 있다. 도목수는 대들보를 올리기 위해 동북서남 상하로 대들보를 밀면서 아랑위(어영차)라고 외치고 천지4방과 하늘 땅의 신에게 축원한다. 맨 먼저 해가 뜨는 동쪽으로 밀고 북방, 서방, 남방 그리고 위의 하늘, 아래의 지신에게 축원하는 것을 연상해 나는 이를 실천하고 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닭의 모이를 주면서 닭의 평온과 평화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빌 곤한다. 물론 닭들이 이런 생각을 전해줄 수 있는 영적 교감을 할 수 없다. 아니면 이는 나의 내중심의 판단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우리가 먹는 음식, 과일 껍질, 채소 잎 등 버리는 것이 거의 없다. 매일 같이 칼로 곱게 썰어서 사온 사료와 섞여 먹인다. 이틀에 한 번씩 큰 주전자로 물을 담아 넣어준다. 대영이가 사온 첨가제를 타서 먹인다. 달걀이 무르면 칼슘분이 부족함을 염려하여 생선가시. 조개껍질, 달걀 껍질을 부수어 적당히 먹인다. 닭 세 마리의 똥을 매일 치우는 일도 하나의 일이다. 아침저녁으로 옥상에서 운동을 하면서 변을 보기 때문에 요즘 닭우리 안의 똥은 어쩌다 한번 치울 정도가 되었다.
아침에 달걀을 꺼내오면서 먹이를 더 주었더니 요즘 아침 일찍 세 마리가 알을 꼬박 꼬박 낳는다.
닭을 키우면서 느낀 소감을 대충 적어보았다, 가축을 키우다보니 집을 떠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 들 닭을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닭은 반려동물에서 시작하여 가축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2023년 4월 20일 정구복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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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닭기르는 일을 소상히 적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닭을 기르게 된 연유와 그 교육적 효과와 여러가지 문제점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글 가운데서 소개한 바와 같이 병아리가 부화되어 세상에 나오고 자라나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암탉이 달걀을 낳는 것도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수탉 두 마리 가운데 먼저 한 마리를 처리한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며
나머지 한 마리도 너무나 사나워서 처치해버린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닭을 길렀기 때문에 공감이 많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계란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시장에 가져가서 돈으로 바꾸거나 마을로 계란을 사러 오는 상인에게 팔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때의 양계는 주로 가정의 부업으로 여겼고 가정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양계업자가 아닌 경우라면 취미나 교육적인 목적이나 영양섭취라고 해석되는데 나름대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계를 생각하면 투계가 연달아 생각납니다. 일어로 "겡까도리"라고 하여 사나운 수탉을 서로 싸우게하고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다투면 "닭 싸우듯 한다"(계속)
고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자주 싸운다는 뜻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당사자에게는
매우 불쾌한 말이었습니다.
닭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다보니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생각납니다.
정치인들은 마치 투계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뻗고 상대방이 달아나거나 지쳐 쓰러질 때까지 찍어대는
챔피언처럼 논리나 염치나 체면이나 수치를 벗어나 싸우는 것 같습니다.
국회의사당은 진정한 국가발전을 위한 정책을 토론하고 입법하기 보다는 반대당을 무슨 수로든지
비판하고 능멸하고 공격하고 핏대를 세우기 때문에 "투계장"을 연상케 하고 이전투구라는 말까지 끌어들이게 합니다.
벌써 20여년(?) 전에 어느 자리에서 강연하는 정치인이 "견자교"라는 말이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여의도로 들어가는 교량을 가리켜 "견자교"라고 부른다는 것이었습다.
의사당은 투구장(이전투구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동물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얻고 배우고 깨우치기도 합니다.
이솝의 우화들이 자연계의 동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지성과 양심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낙암선생님의 좋은 글을 읽고나서 스스로 횡설수설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림)
낙암 교수님의 ‘닭 이야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번 옥고를 ‘창작’ 공간에 올리지 않으시고,
‘생활 이야기(Life Story)’에 올리신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도심 주택 화단에 닭장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이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를 큰 닭이 되도록 키워봐서 낙암 교수님 닭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 옵니다.
닭을 기른 시기가 지난해 8월 말부터 시작하여 올해 2월 알 낳기까지 거의 1년 동안
관찰기를 꼼꼼하게 쓰셨습니다. 사진까지 보여주시니 더욱 생생한 현장감 전해 옵니다.
고림 교수님 댓글 옥고도 흥미롭습니다.
낙암 교수님의 ‘닭 이야기’와 고림 교수님 ‘소감 댓글’이 합쳐지니,
감상하는 독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고림 교수님 댓글 소감에서 ‘닭싸움’을 정치권에 비유한 대목은
마치 궁수가 과녁의 정곡을 맞춘 것과 같은 공감을 줍니다.
과녁이 ‘닭’이 아니고 ‘멧돼지’였더라도 독자에게 주는 통쾌한 기분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두 분 학자님 삶의 철학이 깃든 귀한 옥고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림 지교수님의 댓글은 제 글보다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소식과 평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지난날 시골에서 계란은 아주 귀했습니다. 특히 닭장에서 갓 낳은 알을 그냥 먹는 것은 참으로 귀한 보약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닭 싸움에 대한 이야기, 정치판은 과연 철학자 다운 시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천 윤승원님의 댓글은 저의 글을 읽고 평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교수님의 아호를 맨 처음으로 불러주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더구나 고림 지교수님의 댓글까지 언급해 주시니 글을 올린 보람을 크게 느낍니다. 사진을 올리는 것이나 찍는 것도 서툴러 부끄럽습니다. 닭을 키우면서 닭을 먹이로 꾀어 싸우는 습관을 일부 고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고림, 장천 두 분에게 깊은 감사를 거듭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