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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迦誕辰日에 回想하는 佛敎文化財 둘러보기
釋迦誕辰日(佛紀 2564년 陰曆 四月 初八日, 西紀 2020.05.30)을 맞아 全國 山寺에 있는
佛敎文化財들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佛敎信者는 아니지만 山行하면서 자연히 山寺에 들리게 되면서, 佛敎文化財에 關心을
갖게 되어 점차 다른 文化財에도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文化財는
三國時代부터 高麗時代까지는 佛敎國家였으며, 抑佛政策의 朝鮮時代에도 庶民層의 佛敎信仰으로
山中의 寺刹이 계속 유지되어 우리나라 문화재의 가장 큰 比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佛敎文化財이기도 하다.
사진은 山行하면서 둘러본 寺刹 또는 寺刹을 踏査하면서 찍은 文化財 寫眞 중에서 國寶와 寶物을
爲主로 하고 일부 地方指定文化財인 有形文化財와 文化財資料를 添加해서 발췌했다.
(*寫眞 撮影日字 省略)
카메라를 장만하여 사진을 찍기 전에 방문해 사진이 없거나, 外部人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寫眞撮影不可로 사진을 찍지 못한 문화재는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진을 복사해 올렸으며,
說明文은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爲主로 하고 다른 자료와 현지 案內文을 追加했다. 설명문에
漢字를 많이 사용한 것을 佛敎와 관련된 용어는 漢字가 많아 불가피했음을 惠諒해 주기 바란다.
2020. 06. 06 孤 山 朴 春 慶
佛敎文化財
둘러보기(5-1) 서울·京畿地方 (6-1) 서울 (1)
서울 地方
曹溪寺 -서울 鍾路區 堅志洞에 있는 사찰.
大韓佛敎曹溪宗의 直轄敎區 本寺이자 總本寺로 中央總務院·中央宗會 등이 있는 韓國佛敎의
중심지이다. 1910년 覺皇寺라고 했으며, 日帝强占期에는 ‘太古寺’라고 부르다가 1954년
佛敎淨化運動 이후 曹溪寺로 改稱했다.
*大韓佛敎曹溪宗
27개 宗團의 하나이며, 韓國佛敎 最大의 宗團이다. 新羅 때 九山禪門의 하나이며 道義國師가
開山한 迦智山門에서 起源하여 高麗時代 普照國師 知訥의 重闡을 거쳐, 普愚國師 太古가
九山을 통합하여 ‘曹溪宗’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創宗의 精神은 普照國師의
禪·敎一致에 있다. (*訥: 말 더듬거릴 눌 *闡: 밝힐 천)
朝鮮時代에는 排佛政策으로 命脈만 유지하면서 禪·敎兩宗의 八道都總攝 制度가 壬辰倭亂 때까지
繼承되어오다가, 韓末까지는 南北總攝時代로 禪宗과 敎宗이 兩立했는데, 禪宗은 曹溪宗·天台宗·
摠南宗, 敎宗은 華嚴宗·慈恩宗·中神宗·始興宗이었다. (*摠: 다 총 *攝: 다스릴 섭)
1911년 日帝의 佛敎 統合政策으로 寺刹令이 制定되고 31本山(本寺)制度가 생기면서
禪·敎 兩宗의 명칭이 사용되고, 1923년 財團法人 朝鮮佛敎中央敎務院 理事制度가 되고,
1924년 禪·敎 兩宗을 통합하여 朝鮮佛敎曹溪宗을 설립했다.
總本山은 太古寺(지금의 曹溪寺)에 있었으며, 傘下 31개 本山의 住持는 朝鮮總督이 승인했으며,
末寺인 1,384個寺의 住持는 道知事의 승인사항이었다. 光復 後 大韓佛敎曹溪宗으로 새롭게
출발했으나 1954년부터 1962년까지 比丘·帶妻僧 間의 분규가 끊이지 않아 ‘佛敎淨化運動’이
계속되고, 1962년 4월 比丘·比丘尼만 인정하는 統合宗團으로 大韓佛敎曹溪宗이 再發足,
오늘에 이르고 있다.
宗團의 宗旨는 釋迦牟尼의 ‘自覺覺他 覺行圓滿’의 根本敎理를 받들어 修行·實踐하여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法을 전함으로써 衆生을 濟度함에 있다.
宗團의 주요기구는 中央宗正機關인 總務院과 最高議決機關인 中央宗會가 있고, 별도로
布敎院 등이 있으며, 地方에 25敎區本寺가 있고, 그 밑에 末寺를 거느린다.
宗團本部는 서울 鍾路區 堅志洞 曹溪寺 境內에 있다.
(01) 서울 曹溪寺 大雄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7호
大雄殿은 禪宗系統 寺刹에서 釋迦牟尼佛을 本尊佛로 모신 法堂으로, 曹溪寺 大雄殿은
1922년 全北 井邑에 建立한 普天敎의 總本山인 普天寺의 法堂 十一殿으로 사용했으며,
1938년 普天敎 敎主 車京石 死後 [十一殿]의 競賣에서 落札, 移建하여 ‘太古寺 大雄殿’으로
사용하다가 1954년 太古寺가 曺溪寺로 바뀌면서 ‘曹溪寺 大雄殿’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02) 曹溪寺 七層石塔
法堂 앞에 있는 七層石塔은 1930년에 건립했다. 石塔 안에는 1930년 스리랑카의
達摩婆羅가 모셔온 釋迦牟尼의 眞身舍利 1顆를 奉安했다. (*顆: 낟알 과)
佛敎中央博物館
曹溪寺 境內에 있는 博物館으로 大韓佛敎曹溪宗에서 2007년 3월 設立·開館했다. 首都圈의
唯一한 常設 佛敎專門博物館으로 全國 各 寺刹에서 收藏하기 어려운 佛敎文化財를 保存·展示한다.
(03) 南楊州 興國寺 塑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1798호
南楊州 興國寺 塑造釋迦如來三尊坐像 및 十六羅漢像 一括(보물 제1798호)의 主尊佛로
左右에 彌勒菩薩과 提華褐羅菩薩이 夾侍한다.
(*彌: 미륵 미 *塑: 흙 빚을 소 *褐: 갈색 갈 *薩: 보살 살)
釋迦如來像은 塑造로 제작했으며, 大衣를 왼쪽 어깨 위에 걸친 채 結跏趺坐하고 있다.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왼팔이 드러나 보이며, 무릎 부분의 옷주름을 굵게
표현했다. 곧게 세운 上半身은 긴 편이고, 넓은 무릎 위에 오른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작고 가늘게 묘사한 눈은 눈꼬리 부분이 올라가 있으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어 謹嚴한
인상을 풍긴다. (*跏: 책상다리 할 가 *趺: 책상다리할 부)
*夾侍/脇侍; 左右에서 가까이 모심
釋迦如來像에서 나온 發願文과 羅漢像 바닥의 墨書에 1650년 8월에 重修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造成時期는 알 수 없으며, 발원문에 따르면 全北 完州 安心寺 藥師庵에
봉안하다가, 1892년 佛像들을 南楊州 興國寺로 옮겼다. 塑造釋迦如來三尊坐像은 2011년
3월 京畿道 有形文化財 제254호로 指定되었다가 이후 關聯記錄을 추가로 발견하면서
塑造釋迦如來坐像을 포함한 모든 遺物을 보물로 昇格·指定했다.
(04) 眞言勸供(諺解) -보물 제1053호
德宗 妃 仁粹大王大妃가 僧侶 學祖에게 [施食勸供], [日用常行] 등 佛敎의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燕山君 2년(1496) 印經木活字로 4百部를 刊行하게 한 것으로, 가로 21.2㎝,
세로 34.5㎝이다. (*勸: 권할 권 *諺: 언문 안)
仁粹大王大妃(成宗 母后)와 貞顯大妃는 成宗이 昇遐하자, 燕山君 1년(1495) 成宗의 冥福을
빌기 위해 圓覺寺에서 인쇄하고 그 이듬해에 걸쳐 印經字를 만들어 <天地冥陽水陸雜文>을
찍어내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刊行하게 했는데 施食勸供·日用常行 등 불교의 여러 가지
행사를 정리했다. (*遐: 멀 하)
內帑金을 들여 活字를 정성껏 찍어냈기 때문에 글자새김이 잘되어 인쇄가 매우 精巧하고,
특히 한글의 表記가 완전하게 실제적인 소리로 還元되어 國語史 硏究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帑: 금고 탕)
(05) 寧國寺 靈山會 後佛幀 -보물 제1397호 -가로 274.5cm, 세로 289cm
중앙의 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좌우로 文殊·普賢 등 菩薩과 聖衆들을 빽빽하게 배치한
後佛撑畵로, 朝鮮時代 佛畵 가운데 비교적 제작시기가 이르다. (*撑: 버틸 탱)
이 그림은 印文 一派가 주도하여 그린 전형적인 群圖形式의 작품으로 本尊 주위를 빙 둘러
眷屬들을 배치했으며, 上段에는 부드러운 黃·綠·紅色의 색구름을 둔 뒤 나머지 여백을 짙게
처리하여 空間感을 부여했다. 주변 인물들을 위로 갈수록 작게 그렸으며 모두 本尊佛을
향하도록 해 平面의 畵面에 遠近感을 나타냄은 물론, 禮拜畵로서의 성격을 浮刻시키고 있다.
主 色調는 단순한 듯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를 보여 솜씨가 뛰어남을 볼 수 있다.
테두리 하단 중앙에 먹으로 쓴 畵記로 康熙 48년[肅宗 35년(1709)]에 印文·敏機·洗淨 등
佛畵僧 3인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 크게 유행한 群圖形式의 典型을 보여주고, 造成年代와 製作者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前半~18세기 初盤에 이르기까지의 佛畵樣式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06) 宜寧 修道寺 甘露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18호
修道寺 甘露圖는 2m의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畵面에 七如來와 引路王菩薩, 餓鬼, 地獄과
現實의 모습을 담은 人物群 등을 표현했다. (*餓: 주릴 아)
畵面 下端에 墨書로 기술한 畵記에 乾隆 51년(1786)에 제작했으며, 畫師인 評三 ·惟性
·性允 ·祭敏 등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장면마다 墨書로 芳記銘을 밝히고 있어
朝鮮時代 甘露撑의 圖像學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康熙나 乾隆은 모두 淸나라의 年號로 朝鮮時代에 儒敎가 盛行하면서 朝鮮 王의 年號가
있는데도 中國 淸나라의 年號를 썼다. 中國을 ‘大國’으로 섬기면서 스스로를 小國인
屬國으로 格下시킨 朝鮮 士大夫들의 한심한 意識構造를 엿볼 수 있다.
(07) 蔚珍 佛影寺 佛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8호
蔚珍 佛影寺 大雄寶殿에는 佛牌 2位가 있으며, 불패 1(왼쪽)은 座臺와 牌身으로 구성되었는데,
牌身 앞면에는 ‘우순풍조 국태민안(雨順風調 國泰民安)’이라는 글자(원래 한글로)가 적혀
있으며, 額子 주위는 黃龍과 雲紋 등 화려한 文樣을 장식하했으며, 크기는
높이 71.8cm×폭 40.5cm이다. 佛牌 2는 座臺가 缺失되어 復原하고 仰蓮臺와 牌身만
남아있는데, 額子 중앙의 銘文을 확인할 수 없고, 주위로 鳳凰, 雲紋과 꽃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높이 34cm×폭 24.2cm이다. 佛牌 1의 牌身 뒷면에는 불패를 조성하게 된
發願文의 墨書에 佛菩薩의 명칭을 적은 佛牌 3位와 王室의 安寧을 기원하는 殿牌 3位를
朝鮮 肅宗 4년(1678)에 제작했다고 했으나 현재는 2점만 남아 있다. (*牌: 패 패)
*佛牌; 佛·菩薩의 名號나 發願內容을 적은 나무패로, 用途나 銘文에 따라
佛牌ㆍ經牌ㆍ願牌ㆍ位牌 등으로 구분된다.
(08) 月印釋譜 -東國大學校 出版社 影印本
*月印釋譜 -보물 제745호
<月印釋譜>는 <月印千江之曲>과 <釋譜詳節>을 합하여 世祖 5년(1459)에 편찬한
佛經諺解書이다. <釋譜詳節>은 1447년 王命에 따라 首陽大君이 昭憲王后의 冥福을 빌기
위해 지은 釋迦의 一代記를 한글로 쓴 佛經書이며, <月印千江之曲>은 世宗이 <釋譜詳節>을
읽고 각각 2句節에 따라 讚歌를 지은 것이다. ’釋譜’는 釋迦牟尼佛의 年譜 즉 一代記이다.
<月印釋譜>는 訓民正音 創製 이후 제일 먼저 나온 한글불교대장경으로, 朝鮮前期의
훈민정음 연구와 佛敎學 및 書誌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09) 麗水 興國寺 銅鍾 -보물 제1556호
朝鮮時代 鑄鐘匠 중에서 金龍岩·金成元 등과 더불어 私匠系를 대표하는 金愛立이
順天 桐裏山 大興寺 鐘으로 顯宗 6년(1665)에 鑄造한 높이 121㎝의 鐘으로, 당시로서는
大鐘이다. 外形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砲彈과 같은 모습이며,
간단하면서도 힘있는 雙龍을 鐘 고리로 삼고 天板에는 큼직한 蓮花紋帶를 돌렸다.
鐘身에 새긴 文樣은 섬세하고 화려하며 잘 정돈된 느낌을 보여준다.
이 종은 思印比丘와 버금가는 技術的 力量을 지닌 金愛立 梵鐘의 특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匠: 장인 장 *桐: 오동나무 동 *裏: 속 리)
(10) 佛說預修 十王生七經 -보물 제959호
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보물 959호) 중 하나로 25行 15字로 이루어진
折帖本 형태이며 表紙는 脫落되었다. 刊記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高麗 末에 刊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經典은 死後에 행할 佛事를 미리 行하여 功德을
쌓아 冥府十王의 地獄에 가지 않도록 하는 十王信仰에서 비롯된 豫修齋에 관한 것이다.
(*祇: 땅 귀신 기 *腹: 배 복 *藏: 감출 장 *折: 꺾을 절 *帖: 문서 첩 *冥: 어두울 명)
(11) 義城 雲嵐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腹藏 遺物-銅鏡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8호
<陀羅尼集經>의 [佛說莊嚴道場 金供養具知寮濯法]에는 道場儀式에 사용되는 供養具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데 큰 거울 28면과 작은 거울 48면이 사용되고, 佛像의 腹藏에
供養物로 納入한 것을 알 수 있다. (*嵐: 남기 람 *陀: 비탈질 타 *寮: 동관 료/요 *濯: 씻을 탁)
雲嵐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腹藏에 납입되었던 銅鏡은 6점으로 최근 연구를 통해 2점의
銅鏡이 日本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銅鏡은 雲嵐寺 佛像腹藏 외에
奉化 淸凉寺 木造菩薩坐像, 公州 東鶴寺 木造三佛坐像 등의 腹臟에도 納入했다.
(12) 密陽 表忠寺 佛輦, 表忠寺 遺物 중 하나이다. (*輦: 가마 연)
-朝鮮 1720년 제작 -소장; 表忠寺 護國博物館
*密陽 表忠寺 遺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3호
慶南 密陽에 있는 表忠寺는 壬辰倭亂 때 僧兵長 四溟大師를 追慕하는 祭祀를 봄·가을에
지내던 祠堂이 있는 寺刹로, 祠堂을 당시 書院처럼 보아 ‘表忠書院’이라 했는데, 寺刹에서
관리해 오면서 ‘表忠祠’가 ‘表忠寺’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溟: 바다 명)
丙子胡亂 때 廢墟가 되어 肅宗 40년(1714) 再建하면서, 四溟大師와 그의 스승인 西山大師,
壬辰倭亂 때 錦山戰鬪에서 戰死한 騎虛堂 靈圭의 影幀을 모셨다. 이 절의 遺品 展示館에는
宣祖 38년(1604) 日本에 갔다 오면서 선물로 받은, 大型 木鐸과 북을 포함하여 200여점의
展示物 대부분이 四溟大師가 사용하던 遺品이다.
(*墟: 터 허 *騎: 말 탈 기 *幀: 그림족자 정 *鐸: 방울 탁)
*佛輦: 護法聖衆(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善神)이 타는 가마. 호법성중을 받들기 위해 鳳凰,
龍, 蓮花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 佛座를 莊嚴하기 위한 닫집과도 의미가 相通한다고 한다.
서울 탑골공원
(13)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2호
圓覺寺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朝鮮 世祖 11년(1465)에 세웠다.
朝鮮의 崇儒抑佛政策 속에서도 중요한 寺刹로 보호되다가 1504년 燕山君이 이 절을
세웠다. 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僧侶들을 내보내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芳: 꽃다울 방)
이 탑은 朝鮮時代의 石塔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 약 12m의 大理石塔으로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大理石의 灰白色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基壇은 3단으로,
‘亞’字形이며 각 층 옆면에는 龍, 獅子, 연꽃무늬 등을 彫刻했으며, 塔身部는 10층으로,
3층까지는 ‘亞’字形이고 4층부터는 正四角形의 平面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재료가 거의
花崗岩인데 비해 大理石이며,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高麗時代 敬天寺址
十層石塔과 매우 비슷하며, 탑 윗부분에 있는 기록으로 朝鮮 世祖 13년(1467)에
建立한 것을 알 수 있고, 形態가 특이하고 表現裝飾이 풍부하여 傑作品으로 손꼽히고 있다.
*花崗岩보다 都心公害에 더 脆弱한 大理石塔의 風化作用을 방지하기 위하여
遮斷幕을 설치했다. (*脆: 연할 취)
(14)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2호) 基壇 側面의 彫刻
(15)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보물 제3호
圓覺寺의 創建 來歷을 적은 碑로, 朝鮮 成宗 2년(1471) 전체 높이 4.9m, 碑身 너비 1.3m로
건립했다.
題額 [大圓覺寺之碑]는 私淑齋 姜希孟의 글씨로 새겼으며, 碑文은 當代 名臣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碑文은 乖崖 金守溫, 安齋 成任, 뒷면의 追記는 四佳亭 徐居正,
虛白堂 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乖: 어그러질 괴 *崖: 언덕 애)
三成洞 修道山 奉恩寺
江南區 三成洞 修道山 자락에 있는 奉恩寺는 新羅 元聖王 10년(784) 緣會國師가 創建하여
見性寺라고 했다. 朝鮮時代에 燕山君 4년(1498) 成宗의 繼妃 貞顯王后가 宣陵(成宗陵)을 위하여
重創했으며, 明宗 6년(1551) 禪宗의 中心寺刹로 삼고 普愚를 住持로 佛敎를 中興했으며,
明宗 17년(1562) 文定王后의 主導로 見性寺 터가 明堂이라고 修道山 아래로 옮기고 寺刹名을
奉恩寺로 改稱했다.
中宗 때는 이곳에서 僧科試를 치르던 곳이며 西山·泗溟大師도 여기에서 登科했다.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復原했으나 丙子胡亂으로 다시 燒失되어 肅宗 때 重建하고
純祖 25년(1825)에 重修했으나 1950년 6·25戰爭으로 대부분의 殿閣이 파괴되어 이후에 再建했다.
丙子胡亂 때 避亂 가던 많은 사람들이 漢江에서 溺死했는데 그들의 魂을 위로하는 水陸齊가
奉恩寺에서 열렸으며 현재도 매년 윤달[閏月]에 水陸齋가 열린다.
大韓佛敎曹溪宗 奉恩寺는 우리나라 禪宗佛敎의 대표적인 寺刹로, 境內에는 大雄殿을 비롯하여
法王樓·北極寶殿·禪佛堂 등의 堂宇와 秋史 金正喜가 死亡 3일전에 썼다는 扁額이 걸린 板殿에는
佛經板 13종, 3,479장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奉恩寺에 한 번 가본적이 있는데, 奉恩寺가 있는 江南區 三成洞은
1950년대에는 京畿道 廣州郡 彦州面 三成里였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지만 당시에는
地上 運行하는 電車를 타고 東大門驛에서 下車하여 동대문 바로 밖에 있는 메리어트호텔과
동대문종합시장이 있는 곳에서 電動車를 타고 뚝섬으로 가 漢江邊에서 나룻배를 타고 漢江을
건너고, 논틀길, 밭틀길을 한참 걸어 野山을 넘어야 奉恩寺에 도착할 수 있었다. 廣州郡 彦州面
三成里는 1963년에 서울특별시 城東區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신설된 江南區에 編入되었다.
(16) 奉恩寺 眞如門
寺刹의 첫 번째 門은 ‘一柱門’인데 奉恩寺는 ‘眞如門’이라고 했는데 ‘眞如’는 ‘事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므로, 眞如門에 들어서는 것은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서는 것을 뜻한다.
眞如門은 奉恩寺 創建 때부터 있었으며, 宣陵의 奉陵寺刹이며 禪宗의 首寺刹이었던
奉恩寺에는 眞如門, 天王門, 解脫門이 차례로 서 있었으나 1939년 大火災로 燒失되어
1982년 一柱門 자리에 眞如門을 건립했다. 가운데 大門에는 칼과 창을 든 神衆像, 천장에는
飛天像을 그렸으며, 좌우에는 1988년 法王樓를 신축하면서 철거된 天王門의
木造 四天王立像이 있다.
眞如門 前面의 扁額 [修道山 首禪宗 奉恩寺]는 菁南 吳齋峯이 썼으며, 後面의 [眞如門]은
奉恩寺 住持를 歷任한 昔珠스님이 썼다. (*菁: 우거질 청)
(17) 奉恩寺 木四天王像, 北方 多聞天王(왼쪽)-東方 持國天王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
*奉恩寺 木四天王像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
이 4軀의 四天王像은 큰 통나무를 깎아 彫刻하고 부분적으로 돌출된 부분이나 추가해야 할
부분에는 따로 조각하여 몸체에 결합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奉恩寺 木四天王像은
얼굴 크기에 비해 다소 작게 표현된 身體, 넓적하고 큰 얼굴, 세밀하고 정교하나 다소
硬直되게 보이는 무늬에서 18세기 中葉 彫刻樣式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軀: 몸 구)
奉恩寺 木四天王像은 1746년이라는 造成年代가 분명하여 18세기 중엽의
木造 佛敎彫刻樣式 연구에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四天王像은 土造인데 비해 木造이며,
多量의 腹臟遺物이 출토되어 당시의 腹臟硏究에 귀중한 자료이며, 일부 持物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原形이 잘 保存되어 價値를 가진다.
(18) 奉恩寺 木四天王像, 南方 增長天王(왼쪽)-西方 廣目天王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
(19) 奉恩寺 選佛堂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4호
選佛堂은 奉恩寺 大雄殿 한段 아래 왼쪽에 있는 일반대중을 위한 禪房으로, 1941년
心劒堂이 있던 자리에 건립했으며, 基壇은 長臺石 한 벌의 긴 섬돌 위에 다듬은 礎石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前·後·左·右 네 곳에
작은 合閣을 두어 兩 側面과 함께 6개의 합각이 보인다. 박공도 작은 박공을 남북방향으로
좌우 양끝에 대칭으로 올렸는데, 이것도 한국 전통가옥에서는 쓰지 않던 技法이다. (*劒: 칼 검)
20세기 건물로, 年代가 오래지 않고 내부 天障과 뒤편의 增築 등으로 다소 변형되었으나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다. 또 禪房의 크기도 서울에서는 유례가 없는 귀중한 목조건물이다.
1990년 實測調査 때 ‘龍 昭和十六 佛紀二千九百六十八辛巳四月八日正午
上樑之後天下泰平佛日增輝 龜(용 소화16불기2968신사4월8일정오상량지후천하태평
불일증휘 구)’라는 마루도리의 墨書銘이 발견되어 1941년 10월 8일에 上樑한 것을 알 수 있다.
(20)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 三佛坐像 -보물 제1819호
奉恩寺 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木造佛像은 釋迦佛坐像을 중심으로 迦葉尊者와
阿難尊者立像이 좌우에서 夾侍하고 있어 三尊을 구성하고 있다. (*葉: 땅이름 섭)
孝宗 2년(1651) 彫刻僧 勝一이 首彫刻僧으로 9명의 彫刻僧들을 이끌고 제작한 彫刻像으로,
1765년의 改金發願文을 통해 肅宗 15년(1689) 火災로 本尊 釋迦像이 燒失되어
高宗 32년(1895) 새로 造成했음을 알 수 있다. 本尊 釋迦像은 夾侍像보다 30cm 정도 크고,
變形式 偏袒右肩으로 法衣를 걸치고 降魔觸地印을 한 모습이어서 造形的으로 구별되나
着衣와 手印 등은 17세기 중엽의 佛像樣式을 따르고 있다. 彫刻 솜씨가 우수하고 發願文과
改金門으로 三世佛의 奉安과 改金에 참여했던 施主者와 제작한 彫刻僧들을 알 수 있어
朝鮮後期 17세기 中·後半 佛敎彫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2007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보물 제1819호로 승격·지정되었다.
(*偏: 치우칠 편 *袒: 웃통 벗을 단 *肩: 어깨 견 *觸: 닿을 촉)
(21) 洪武 25年 長興寺銘 銅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6호
京畿 驪州 長興寺에 봉안되었던 것을 지금은 奉恩寺 大雄殿 안에 있는 鐘으로, 移轉時期는 '
정확히 알 수 없으나, <奉恩本末寺誌> [奉恩寺不忘記]에 따르면 肅宗 31년(1705)
長興寺가 철거되면서 佛像과 器物 등을 奉恩寺로 移轉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때
移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높이 60㎝, 입지름 49㎝의 靑銅 鑄鐘으로, 鐘身에 ‘洪武貳拾伍年九月…’로 시작되는 銘文이
있는데 洪武는 중국 明나라 太祖의 年號로 ‘洪武 25년’은 朝鮮을 건국한 해인 1392년이다.
製作年代와 지금의 京畿道 驪州市인 川寧縣 象頭山의 長興寺에서 金 300근을 마련하여
造成했다는 내용과 關與한 僧侶, 施主者와 匠人의 이름을 새겼다. 高麗와 朝鮮이 交替되는
시기에 만든 것으로 高麗時代 梵鐘의 樣式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22) 奉恩寺 板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5호
奉恩寺 板殿은 1856년에 창건되고 1878년 重修한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봉은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經板을 보관하는 藏經閣인 동시에 禮佛을 드리는 佛殿으로, 經板保管과
禮佛 技能을 竝用하기 위해 독특한 窓戶를 갖추는 등 建築的으로 稀少性이 있다.
板殿에는 哲宗 7년(1856) 律師인 南湖 永奇가 造成한 大乘佛敎의 대표적 經典인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木版>(서울 유형문화재 84호)을 비롯하여 <金剛經>,
<維摩經> 등 13종류 經典의 木板 3,749枚를 보관하고 있으며, 귀중한 經板을 보관하기
위해 바닥을 온돌로 만들어 濕氣를 방지하고 있다. 정면에 扁額 [板殿]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이다. (*隨: 따를 수 *疏: 소통할 소 *維: 벼리 유 *摩: 문지를 마)
(23) 奉恩寺 板殿 懸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
朝鮮後期의 文臣·學者·書畵家인 秋史 金正喜(1786∼1856)의 末年 作品으로 落款에
‘七十一果病中作/71살 果川 늙은이가 病中에 쓰다.’라고 새겼다.
秋史는 北學派의 一人者인 楚亭 朴齊家의 弟子로, 淸나라 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金石學을
연구하고, 뛰어난 藝術家로 秋史體 글씨를 만들었으며, 文人畵의 大家이다.
秋史 金正喜는 純祖 9년(1809) 生員이 되고, 純祖 19년(1819) 文科에 及第했으며
우리나라에 考證學을 도입했다. (*款: 항목/정성 관)
秋史가 ‘七十一果病中作’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他界했다고 傳하는데, 沒年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다.
(24) 奉恩寺 彌勒大佛
奉恩寺 彌勒大佛은 높이 23m로 1986년 영암 스님이 民族統一을 念願하는 뜻에서
彌勒大佛을 奉安하자고 發願하여 1만 명 이상이 佛事에 동참하여 1996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彌勒佛
大乘佛敎의 대표적 菩薩 중의 하나로, 釋迦牟尼佛에 이어 衆生을 救濟할 未來의 부처이다.
釋迦牟尼佛이 入滅한 뒤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에 다시 娑婆世界에 出現하여
華林園 龍華樹 아래에서 成佛하고, 3회의 說法으로 모든 衆生을 敎化한다고 한다.
이 法會를 ‘龍華三會’라고 하며, 龍華樹 아래에서 成佛하기 이전까지는 ‘彌勒菩薩’이라
하고, 成佛한 이후는 ‘彌勒佛’이라고 한다. (*釋: 풀 석 *迦: 부처이름 가 *尼: 여승 니
*娑: 사바세상 사 *婆: 음역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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